부활절 메시지 – 캐서린 쇼리 주교, TEC

Wednesday, April 20th, 2011

부활절 메시지 2011

지구 남반구에서는 부활을 전혀 다른 표상과 은유로 이해할 것입니다. 부활절기가 여름에서 겨울로 변하는 시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반구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강추위가 꾸물거리며 비키지 않고 사월에서 여러 곳에 눈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임박한 새 생명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나타날 새로운 창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우리 세계의 곳곳에서 처참한 재앙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키우시는 새로운 못자리 – 그것이 무덤일지라도 – 를 목격합니다. 아이티의 상황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루하루 희망을 밝히며 키워내고 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의 재건 계획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를 축복하고 좀 더 나은 정부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내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성공회는 이 모든 가능성을 위해 협력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새로 주교좌 성당을 건설할 계획이 그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 삼위일체 성당과 성 피에르 대학의 무덤은 이제 꽃피는 정원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사목 활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은 여러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전히 찾아야 할 테지만, 나무에서 움트는 첫 싹이 트고, 눈 얼음은 따뜻한 봄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가 남긴 결과는 여전히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벌이는 사투는 지금도 부활보다는 묵시적 종말에 걸맞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일본 북동부에서는 많은 신앙인이 노인들을 먹이고 집을 잃은 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차적인 관심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에너지의 사용과 소비주의에 빠진 생활 태도에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건네는 선물은 인간이 하느님이 누리는 거룩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에, 인간은 이제 하느님과 같이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고난과 부활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우주적인 선포입니다. 부활의 백성인 우리는 죽음과 파괴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늘 일하시며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은총을 가져다주신다는 확신을 새기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우주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을 치우려는 작으나마 기꺼운 의지와 더 큰 전체에 자신을 접붙이려는 새로운 기회를 통해서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낮추고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요, 거룩한 한 분에게서 나온 공동의 운명체인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이 하신 일을 이제 우리가 나눠야 합니다. 부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펼치시는 일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삶 속에서 그 부활의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은총이 부활절기를 통해 넘쳐나기를 빕니다. 나가서, 주위 세계를 위한 부활이 됩시다.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원문: http://www.episcopalchurch.org/79425_127900_ENG_HTM.htm
번역: 주낙현 신부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

한국 성공회 여성 성직 10주년 생각

Saturday, April 9th, 2011

한국 성공회가 여성 성직 서품을 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성찬례와 곁들인 축하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몸이 함께 하지 못하니 기쁘게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작은 후원금을 보내는 일로 하릴없이 대신했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교회 역사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 그리고 교회 일치 대화에서 여성 성직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여성 성직 서품이 결정되기까지 수많은 여성이 흘렸는 땀과 눈물, 여전히 남은 과제들. 이는 또한 사적인 경험과 잡감으로도 번진다.

1. 여성 성직: 교회 일치의 걸림돌?
2. 사적인 인연
3. 세계 성공회 여성 성직 연대기

1. 여성 성직: 교회 일치의 걸림돌?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묻혀 있던 교회 여성의 역할을 추적하고 그 자리를 되살려 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여성 성직은 늘 성공회와 천주교 간 교회 일치 대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천주교 안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미래는 요원하다. 여성 성직에 대한 성공회의 태도를 간결하면서도 잘 드러낸 글은 이것이다. >> 여성 성직: “무엇”과 “어떻게”의 사고 방식

이런 참에 8세기 이탈리아에서 나온 전례문 한 토막을 흥미롭게 읽는다. 바로 여성 부제 서품식문이다.

여성 부제로 서품받을 후보자를 주교에게 추천한다… 후보자가 머리를 숙이고, 주교는 그의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한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거룩한 독생자를 동정녀에서 태어나게 하시어 여성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또한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셨으니, 성령님은 남성에게만 오시지 않고 여성에게도 오시나니, 이제 주님의 이 여종을 돌아보시어, 이 여인을 주님의 섬기는 직책으로 부르시고, 이 여인에게 넘치는 성령의 은총을 내려 주소서. 아멘.”

주교는 서품받은 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

“지고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여성을 축성하여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님을 위한 봉사자의 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페베를 선택된 사목직으로 직분으로 받아들이신 것처럼 이들 위에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시어 이 여종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 이 여인을 주님께로 축성하시어, 주님이 펼치신 사목의 은총을 수행케 하소서…”

(8세기 이탈리아-비잔틴 전례서 <여성 부제 서품식문> 바티칸 도서관)

그런데 왜 여성을 부제직에만 제한해야 하는가? 서품식문에 담긴 신학은 이미 사제직으로 연장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2. 사적인 인연

한국 성공회에서 여성 성직 논의는 1970년대 이후로 계속되었다. 사적으로 여성 성직 서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터에, 여성 성직 실현에 박차를 가하려고 마련한 여성 성직 특별위원회에서 신학 자료 조사위원으로 ‘잠시’ 힘을 보탠 적이 있다. 1999년이었을 것이다. 태부족한 신학 자료들과 다른 나라의 역사적인 경험을 정리하고 좀 더 나은 토론의 길잡이로 제공하는 일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지금의 여성 성직자들이 그 일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잠시’만 일한 연유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구 의회에서 교회 발전 계획 보고서가 채택되었는데, 그 안에는 여성 성직 서품 논의에 관한 ‘보고서’도 들어 있었다. 그 보고서의 결론은 여성 성직 서품을 허용하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이 보고서 채택을 여성 성직 서품 허용으로 해석하여 어느 교구에서 여성 성직 서품을 전격 실행했다. 그 뒤 여성 성직 특별위원회는 갑자기 해체되었다. 어떻게 나도 그 일을 그만두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갑작스러운 실행을 보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조금 늦더라도 좀 더 내실을 다지면서 나갔으면 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갑작스러운 실행이 장기적으로 여성 성직 후보자와 이후 여성 성직자의 사목 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염려했다. 운동을 하더라도, 하는 사람이나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좀 더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이 개혁을 유보하는 논리로 이용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당시 논의 수준과 준비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나는 이런 생각이 혹시 나 자신이 누리는 남성 기득권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했다. 둘러보니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분투했던 많은 여성과 여성 성직 후보자들의 땀과 눈물이 흥건했다. 내 염려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무엇때문에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희생을 담보로 유보할 수는 없다. 내 불필요한 염려, 혹은 내 무의식의 남성 기득권이 누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나 않았나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쉬움은 남는다. 교황청의 경고를 받고 교수직에서 쫓겨난 한국 천주교의 어떤 사제 학자는 매우 독특하게 여성 사제 반대 논리를 편 적이 있다 한다. 남성들이 오랫동안 지배해서 망쳐놓은 성직자 상과 성직자주의를 타파하지 않고 여성 사제를 허용했다가는 여성들마저 망친다는 주장이었다. 천주교는 여성 사제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처지인지라 우스개로 던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이 매우 깊은 반성에 자리한 고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 오기 전, 교구 내 어느 여성 성직 후보자에게 짧게 당부했던 말이 기억난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남성에다, 별 무리 없이 성직 서품을 받은 사람으로서 말하기 참 미안합니다. 그 미안함을 무릅쓰고 부탁합니다. 저 같은 남성 성직자보다 더 잘하셔야 합니다. 불평등한 요구라는 걸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첫걸음의 발자국을 따라 다른 이들이 걸을 테니까요.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이 된 탓에 생긴 성직자 권위주의의 유혹이 곧 뒤따를 거에요. 그 유혹을 조심하세요. 끝까지 저 같은 남성 성직자를 동지로 여기고 참된 도전을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잘해 주세요.

아직도 이 당부가 유효할까? 떠난 지 오래여서 알 수가 없다. 아니 더는 이런 부탁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여성 성직 10주년, 한국 성공회의 모든 여성 성직자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연대와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3. 세계  성공회 여성 성직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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