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Saturday, September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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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루가 15:1~10)

그리스도교 신앙이 위대한 까닭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늘 의식하며 인정하도록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를 늘 인정하는 일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지혜와 판단이 언제든지 부족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함이 늘 모자란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는 일이 신앙인의 품격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위대한 까닭은 하느님께서 부족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이에 감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더는 돌아보지 않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인정을 삶의 큰 격려로 삼습니다. 유혹에 더 빠지지 않으려 몸과 정신을 또렷하게 하고, 미혹하는 정보에 눈과 귀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류를 교정하는 새로운 지식과 늘 대화하며 배우려 합니다.

손가락질받던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자,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생각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못마땅해” 합니다. 여기서 상식이 뒤바뀝니다. ‘죄인들’은 경청하며 배우려 하고, ‘의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죄인들’은 예수님께 혼나기도 하고 따가운 지적을 받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의인들’이라 여기는 이들은 ‘예수’라는 낯선 청년의 새로운 일과 지식과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관습 안에서 젠체하며 판단만 하려 듭니다. 자신이 만든 신념이라는 우상에 붙들려 고집을 피우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삽니다(출애 32:8~9).

15년 전 9.11 테러 사건으로 미국에서 무고한 사람들 3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일어난 전쟁으로 잃은 군인과 시민의 목숨은 그보다 수십 배에 달합니다. 이 무자비한 사건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잘못된 신념을 다시 돌아보고 고치지 않은 탓입니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상실, 보복과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의 기쁨이 사라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을 더는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기존에 품었던 생각과 신념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오랜 경험과 고정관념이 혹시라도 자기 눈을 가리는 고집이 되는 현실에서 자신을 돌이켜 새로운 세계와 바른 가르침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가르침이 하나라도 아쉬워 간절하고 그 배움에서 변화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찾은 예수님의 기쁨이 이제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회개하며 배우고 고치는 죄인의 기쁨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회개하여 기뻐하는 죄인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의인’이라 인정받은 은총 안에서 살아갑니다.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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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Sunday, June 5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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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루가 7:11~17)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위로의 말을 찾기 어렵고, 자기 몸이 끊어져 나간 듯한 아픔을 겪은 당사자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둠의 구멍 속으로 끝을 모르고 계속 추락하는 느낌일 뿐이라는 증언과 함께 어떻게도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눈물로만 확인할 뿐입니다. 오늘 성서 이야기는 극한의 슬픔에 덮인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추락을 멈추려 그 슬픔의 밑바닥에 닿으려 온 몸을 내미는 엘리야 예언자와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구원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엘리야와 과부는 이미 인연이 깊습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배고픔에 지쳤던 낯선 손님 엘리야에게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를 포기하고 바쳤던 환대의 여인입니다. 그 환대에 내린 축복으로 여인과 아들은 배고픔을 면했지만, 아들은 이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에게 아들은 함께 죽을지언정 먼저 보낼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죽음에 책임을 지겠다는 엘리야의 태도가 결연합니다. 어머니의 슬픔을 자신의 온몸에 담아 싸늘한 아들의 몸에 겹칩니다. 자신을 죽음의 현실에 내어놓은 행동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에 담긴 뜨거운 생명을 아들의 몸에 전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슬픔이 서로 닿아 이어졌을 때 생명은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은 두 겹으로 겹쳐진 슬픔을 또렷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남은 자식마저 보내는 무참한 현실입니다. 두 겹의 상실은 한 여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합니다. 상여를 따르는 그의 발걸음은 자기 존재의 무덤을 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절망의 행진을 멈출 힘은 오직 연민입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연민의 손을 뻗어 감히 오염과 부정과 죽음의 현실에 ‘손을 댑니다.’ 죽음을 멈추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당신 손을 더럽히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에 닿은 손은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며 여인의 존재도 지켜냅니다.

우리 사회에 상실의 슬픔과 죽음의 절망이 편만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의 목격자이면서도 종종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비난과 책임을 면하려는 변명에 분노하면서도, 어쩌면 이런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거나 손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는 어머니에게 숙명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잃은 사람의 불행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슬픔의 깊이에 손을 내밀고 몸을 겹쳐서 어머니의 눈물과 온기를 다른 모든 생명을 품어 전하려 합니다. 죽음의 행렬을 가로막는 이 용기야말로 세상의 젊은 생명을 더 잃지 않고 세우는 신앙의 몸부림입니다. 타인의 슬픔이 우리 몸에 닿아 우리가 그 슬픔을 부축할 때 구원의 틈이 열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민이 낳는 구원이요,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 펼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