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정치, 고문과 국가, 그리고 현실주의

Monday, April 20th, 2009

미국 언론은 지난 부시 정권 하에서 테러 용의자를 대상으로 고문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려던 법률 자문 메모 공개를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 이웃에 있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의 법과대 교수로 있는 한국계 미국인 John Yoo 는 그 메모의 첫 집필자로 진작에 드러났고, 이에 그의 교수직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더 파헤쳐서 부시를 반인륜 범죄 재판정에 세워야 할 참이다.

“고문”이라길래 당장 떠오른 책과 글이 있어서 다시 들춰 보고선, 기왕 번역까지 해본다. [고문과 성찬례](Torture and Eucharist)라는 책으로, 칠레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자행된 폭압과 고문, 그리고 이에 대한 칠레 가톨릭 교회의 대응과 저항을 신-정치학(theopolitics)과 전례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폈던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윌리암 카버너(William Cavanaugh)의 인터뷰이다. 인터뷰 제목은 [정치적 행동인 전례](Liturgy as Politics)라고 했지만, 전례와 정치적 참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국가의 폭력 문제, 대학의 정체성 문제, 그리고 현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들에 대한 짧지만 매우 탁월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정치적 행동인 전례: 윌리암 카버너 인터뷰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전례적 행동에 참여할 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얼마 전에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내 첫마디는 이랬다. “한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미사를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전례는 의미로 축소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거라면, 그 의미를 알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이유가 무엇인가? 의미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라면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주일마다 교회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게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전례와 사회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그저 전례의 상징과 의미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런 다음 그 의미를 뽑아내서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려 한다. 봉헌은 우리의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둥, 평화의 인사는 국제 관계 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둥, 이런 식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전례가 어떤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내는 행동이라는 점을 말하지는 않는다.

앙리 드 뤼박(Herny de Lubac)은 말한다.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무슨 별장 같은 게 아니다. 교회는 그 원래 의미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행동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교회가 어떤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정당의 정치적 행동을 전례 안에 끼워 맞추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교회가 – 비그리스도인과 협력해서라도 – 평화와 자비의 공간, 정의로운 경제 교환의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광야의 목소리”(Voices in the Wilderness)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의 경제 공동체 등은 예수 정치학의 좋은 사례들이라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회피하려는 종교 분파나 정적주의와는 달리, 이러한 운동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이다. 어떤 점에서 평화와 정의를 국가에 요청하는 운동들보다도 낫다.

근대 세속 정치학의 가정 가운데 하나는 국가는 세속적이며 종교는 사적(privat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16세기 유럽을 망쳐놓은 종교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다시 획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강제적인 권력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속 국가를 평화 유지자로 보는 신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종교 전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싸움,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전쟁은 서로 다른 신적 정치 질서들(theopolitical orders) 간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봐야 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자를 죽였는지 설명할 수 있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는 합스부르그와 부르봉 간의 싸움이었다. 두 가톨릭 왕조끼리 싸운 것이다.

교회는 이런 피투성이 전쟁에 책임이 없지 않다. 교회는 폭압적인 권력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 역시 죄없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국가의 전체 기구들은 군주들이 전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적은 대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근대 민족-국가는 폭력에 기반하여 세워졌다. 교회가 폭력에 저항한다면, 교회는 그 사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다시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 참된 말을 발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교회가 연루되었던 폭력의 죄과를 현재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을 거절함으로써 속죄받을 수 있다.

교회가 국가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종종 탈리반 형태의 정권을 예를 들며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합당한 염려인가?

분명컨데, 난 탈리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정권은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종교적 폭력에 관한 신화가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염려한다. 바로 이런 방식이다. “저기 있는 놈들은 종교적 광신자들이다. 그들의 폭력은 비합리적이며, 절대주의적이고 분열적이다. 우리는 민주적인 세속 국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폭력은 합리적이며, 온화하고, 화합을 도모한다. 그들은 우리가 배운 교훈을 얻지 못한 놈들이다.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들을 폭격해서 사람들이 한층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사고 방식이 이라크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한 공적인 담론의 근간이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이 신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군사비가 다른 모든 나라가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을 합리화하도록 한다.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은 폭력으로 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합리성과 평화를 확산시키는데 애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군과 그 대리자들에 진행된는 전쟁의 결과는 5만명이 넘는 이라크 시민의 죽음이며, 2백만명의 베트남 사람의 죽음, 그리고 2십만 명의 과테말라 농민들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종교적 폭력”을 악귀로 바라보는 한, 이러한 전쟁들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어떤 종류의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칠레의 폭압적인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연구했다. 칠레의 가톨릭 주교들이 했던 것처럼, 교회는 정치 권력 혹은 그러한 현상 이면에 있는 것들에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하나의 가정이다. 칠레에 관한 내 책에서,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사례로 삼으려고 했다. 주교들이 한 일과 풀뿌리 교회들이 한 일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을 때 이를 부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깨닫게 되었다. 국가더러 스스로 정의로울 걸 요구하는 게 쓸모 없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교회는 국가가가 정의를 구현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를 심각하게 어떤 공적인 몸,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몸이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조한다. 이는 종종 국가에 대한 저항을 수반한다. 칠레에서 몇몇 주교들은 고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풀뿌리 교회들은 정권의 희생자들을 돕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변화는 조용하게 오지 않았다. 대체로 그런 일은 없다.

고문은 피노체트 정권 아래 정부에 의해 자행됐다. 미국 정부는 고문을 눈감아 주고 있다. 미국 교회들은 고문을 이용했던 칠레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부시(Bush)는 존 매케인 의원이 미국 요원들에 의한 고문 방지를 목적으로 한 수정안을 대상으로 부결권 행사로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점에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칠레는 예외적이라고들 생각했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군사 정권은 단기간으로 끝날 것이며, 그리 폭압적이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다. 미국 역시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자유를 위한 하나의 신호라고 여긴다.

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을 예외적이라 여기기 때문에, 미국은 법 위에 있고 예외적인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국가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말한 대로 미국은 “없어서는 안될 국가”이다 – 국가는 그 생존을 위한 이익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여긴다.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하나 – 교회는 국가가 스스로 정의를 행하리라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억류자들에 대한 불의한 처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대통령에게 미뤄둬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떤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미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 정당한 전쟁 이론이 한치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라도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국가에 미룰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연예 산업, 특히 디즈니 기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여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분야에 관해서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 같다. 대중 연예 사업 속에서 복음의 신호를 찾든지, 아니면 그 부도덕성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 말이다. 당신 생각은?

전체 대중 연예 사업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디즈니를 비판하는 것은 그 영화나 다른 미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내용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다. 디즈니에 관하여 내가 관심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다. 자유 시장이라고는 하나, 디즈니는 소수의 거대한 사업체가 소비 패턴에 영향을 주고 문화를 획일화하는 권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백만의 부모들은 디즈니가 뱉어내는 것을 구입하느라 안달이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라이온 킹이나 다른 상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강박감을 갖게 되는가? 이론적으로,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으로 좋다는 감각이 없는 문화 속에서, 남는 것은 힘이다. 의지는 좋은 것(선한 것)으로 이끌리지 않고, 마케팅의 권력이 의지를 움직인다. 거대 초국가 산업은 그 자라나는 권력으로 자유의 절단된 단편 만을 양산하고 있다.

당신은 또 교회와 관련된 대학들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기관들이 그 신학적인 근거를 굳건히 지키면서, 고등 교육 시장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 고등 교육의 큰 아이러니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면서, 대학들과 대학교들이 대동소이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들 안에서 인종적, 성적, 계급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에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명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학교는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 믿지 않게 된다. 진정한 다양성은 대학 내부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대학들 간의 다양성이다. 어떤 대학이 침례교이든, 천주교이든, 감리교이든, 대학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정체성을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곳이 독특하게 침례교적이고, 천주교적이고, 감리교적인 것에 따라서 모두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교회 관련 학교들은 그들이 독특한 선교 이념을 가질 때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정체성이 싫다면 그런 학교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기반한 학교들인 어떤 정통 교리에 입각한 엄격한 기준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실무자들, 교수진, 학생들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 일관된 대화가 지속될 수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우리가 바로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적인 방법들과 입장들, 그리고 세계관들을 뒤섞은 샐러드를 제공하고,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현대 대학들은 지성적으로 일관되지 못해서, 지성적인 활력이 아니라 냉소주의만 낳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가?

교수진 임용이 가장 관건이다. 많은 교회 관련 학교들은 현재 많은 수의 교수진과 실무자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그 학교를 설립한 교단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의혹을 갖고 있다. 물론 모든 학교는 아웃사이더가 필요하다. 만일 내가 1950년대의 가톨릭 대학에서 가르친다면, 소수의 좋은 맑스주의자가 교수진에 있어서 여러 문제들을 헤집어 놓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시계추는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각각 학부 안에 가톨릭 관점으로 심리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몇 명 씩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큰 문제이다.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받는 교육이 학제를 넘어서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물학 시간에 창세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수업을 방해하는 이들처럼 취급한다. 교회 관련 학교들이 창조론자 만을 임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서 배운 것들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동감하거나 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와 같은 다원적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는 구절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 구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의 말이다. “하늘로 가는 모든 문이 하늘이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성인은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 사이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다리라 생각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다리는 이미 하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좋아하는 건, 이 말이 수단과 목적이라는 이분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을 지금 이 땅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실천 속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떤 멀리 있는 종말의 시점에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길이다.

이번 주일에 설교를 하게 된다면, 어떤 본문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

대림절이 가까오고 있으니, 아마 절기 독서에 있는 대로 이사야에 있는 위대한 본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 같다. 전체 전례력을 통틀어서 좋아하는 독서 본문들이다.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사야 11:1-9 를 선택할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어울릴는지 몰라도, 어린 양은 쉽게 잠들지 못할 걸?” 이사야에서 말하는 어린 양과 늑대가 함께 어울린다는 본문을 선택하면서도, 우디 알렌의 지적은 이른바 현실주의(realism)의 사례라 생각한다. 이 현실주의는 말한다. “순진하면 안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어린 양은 늑대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꾸실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큰 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이사야서 해석으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셨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이미 햇순이 돋아났다. 대림(Advent)은 성탄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 나라의 “아직 아님”(not yet)을 하느님의 행동 지연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도 지연시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인 아들을 주셨다. “아직 아닌” 것은 우리가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 살아가고 있다. 이사야의 전망을 하느님께서 이뤄주시겠지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미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 분 안에서 이사야가 바라보던 새롭게 변화된 현실은 완성되었다.

The Christian Century. Dec. 13, 2005:28-32. Copyright 2005 CHRISTIAN CENTURY. Translated and reproduced by Nak-Hyon Joo in Korean with permission.

신학교와 교회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Tuesday, March 24th, 2009

우리 교회 안에서 지속되는 논란 거리 가운데 하나는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이다. 서로에게 불평들이 많다. 요즘 일반화된 평가 기준으로 볼 때, 교수진이나 학교 시설이 형편없던 옛날이나, 그 수준과 질의 변화가 뚜렷하다는 지금이나, 이 불평과 투정에서 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옛날이 좋았노라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어서, 나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훨씬 애쓰는 현직 신학 교수진들을 분노케 한다는 소식도 듣는다.

그런데도 신학교와 교회는 멀어지고, 그 결과, 교회는 교회 안에, 신학교는 대학 안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서로에게 손가락질한다. 한쪽은 ‘신학’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반지성주의 교회로, 다른 한쪽은 어디 하나 써먹을 데 없는 언어 유희나 즐기는 학문주의 집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들 맞고소한다. 그 어느 편이든 그 진단이 틀린 것 만은 아니다. 다만 그 와중에 어느 쪽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

나 같은 먹물들은 그럴듯한 용어과 개념으로 입바른 소리는 잘 하는데, 그 개념과 논리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는데는 쑥맥이다. 쑥맥인 탓이 아니라면 학문 장사를 위한 위선이겠다. 사목자들은 거친 생존 현장의 살벌함을 호위삼아, 방향이 뒤틀린 부지런함으로 사유와 성찰의 게으름을 덮으려고 신학 무용론 같은 반지성주의를 부추긴다. 그러면서 신학 입문 1강이면 늘 등장하는, 닳고 닳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들먹이며 서로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신학교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외면하고, 교회는 자기 성찰의 자리를 거절한다. 신학교의 삶의 자리는 큰 의미의 “교회”인데도 스스로를 대학이 짐짓 이상하는 학문 세계에 가두고, 교회는 자기 실천과 행동이 끊임없는 기준과 도전이 될 “신학”에 자리잡기를 멸시한다.

이를 넘어설 대안적 신학 교육은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뭐가 뒤틀려 있을까?

뉴욕 할렘의 인권 변호사, 사회개혁가, 칼럼리스트, 그리고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였던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30여 년 전에 이 점을 뼈아프게 지적한 바 있다. 그의 글 단편에서 읽는 것은 신학교의 자리와, 신학교의 임무이다. 그 시절과 지금은 분명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반성이 학문의 기초이니, 나 같은 사이비 먹물이나, 신학교 관계자는 먼저 그의 신학교 비평을 쓰게 들었으면 좋겠다. 나로서는 평소 고민하던 바를 명징한 언어로 후려 맞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

신학교는 대체로 학문적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스스로 대학의 기풍과 위계 안에 자리잡으려 했다. 그러나 신학교는 대학의 기풍과 위계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신학교의 특별한 소명과 동떨어진 것이며 그 소명을 혐오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교는 신앙을 이데올리기적으로 번안한 내용들을 유포하는데 스스로를 굴복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사상을 끊임없이 분류하고 비교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하여, 성서적인 증언에 담긴 역동성을 손상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투신을 머뭇거리게 하고, 신학에 대한 신심어린 공부를 회피하게 만든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지금, 사제 서품이나 목사 안수에 필수적인 조건은 이 직무에 부름받은 사람이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 연구가나 신학적 논쟁가나, 혹은 학자연하는 사람들과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신학교의 임무이며, 임무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교가 자리할 곳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이지, 대학 울타리 안이 아니다. 성직자를 준비시키고 그 능력을 키워주는 일을 위해 신학교가 취해야 할 태도는 교회의 모본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지, 대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학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희하는 신학교는 성직자를 어떤 전문가 집단으로 만들어 버릴 우려가 있으며, 이는 교회 신자들의 성장을 중단시키고, 성직자의 소명이라 할 봉사자의 명분에도 모순된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가? 무엇보다도 신학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것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The University and the Seminary,” A Keeper of the Word: Selected Writings of William Stringfellow (1994)

대안적 신학 교육

Friday, February 8th, 2008

Ched Myers, “Alternative Theological Education Between The Seminary, The Sanctuary and The Streets”
(via http://www.wordandworld.org/articles.shtml)

신학교와 제단과 거리의 세계는 대체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다. 서로 대화하지도 않거니와, 서로에 대해 책임감이 부족하다,

이러한 고립 현상은 모든 측면에서 신학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전문적인 신학자나 성서학자들은 실천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의 연구를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더 이상 지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위 과정을 마쳐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어서 일자리를 찾아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혹은 사회 운동에 참여하리라는 생각은 별로 갖지 않는다. 한편 구제와 정의를 위한 활동에 깊이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에 기반한 활동가 혹은 사회 활동가들은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이나 정치적 성찰을 무시하기로 악명 높다. 너무나 많은 일에 치여서 너무 피곤하다. 게다가 손에 쥐어지는 자료라는 것도 너무나 얄팍하다. 한편 교회의 신자들은 – 그 교단의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 학문적인 통찰이나 사회 활동가들의 도전을 그냥 무시하고 지낸다. 대신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에 푹 빠져 산다. 이러한 고립때문에 이 세 영역(신학교, 교회, 사회 현장)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총체적인 선교는 침체된다.

…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위한 쇄신의 핵심은 이 서로 고립된 세 영역이 원래 지닌 역량을 재통합시키는 작업이다.

교회를 개인적 사회적 변화의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의 대안적 신학 교육의 전통을 네 가지 운동에서 길어 올린다.

1. 흑인 교회의 “자유 학교” 전통, 특별히 시민 인권 운동 시기에 발전된…
2. 1차 세계 대전 시기 반전 운동과 급진적 제자 운동을 통해 나타난 “지하 신학교”와 “예언자들의 학교”의 실험, 이것들이 독일 나찌 치하에서 “고백 교회” 전통을 이끌어냈다.
3. 여성 운동에서 배우는 페미니스트 페다고지와 성적 소수자를 통해서 일어난 포용적 교회 운동
4.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 배우는 기초 공동체 운동과 해방 신학

우리 상황에서는, 최소한 우리 성공회 상황 안에서는 이 문제 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 경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전통을 길어 올려 제시할 것인가? 다산의 시골 학단, 민중 신학, 민중교회와 성공회 나눔의 집, 한국의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들 – 그러나 여전히 이런 전통들의 실행을 눈여겨 보는 처지에서 이 전통들이 바르게 작동할 역동성, 그리고 끊임없이 왜곡되는 구조는 어떻게 반성해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