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벗 되어 서로 머무는 일

Sunday, May 10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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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벗 되어 서로 머무는 일 (요한 15:9~17)1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7). 그리스도교 신앙과 실천의 핵심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되새기며 실천하려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면, 여느 종교나 도덕의 가르침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뜻과 실체를 깊이 새기지 않으면, 세상에 흘러넘치는 빈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정한 테두리와 가치에 도전하고 초월할 때라야 새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특권과 차별의 벽을 넘어섭니다. 벽을 넘는 힘은 성령에게서 옵니다. 오늘 사도행전(10:44~48)이 전하는 성령의 내림 사건이 전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활동이 유대인의 제한과 벽을 훌쩍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성령의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이 일을 선민의식과 자기 신앙의 특권을 주장하여 막는다면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는 중죄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를 가르는 빈부, 세대, 지역의 분열과 특권을 성령과 함께 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을 입에 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환대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함께 머물러 달라’는 초대가 예수님의 삶에 되풀이하여 등장합니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낯선 나그네에게 머물러 달라서 청한 제자들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도 베드로에게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협조자 성령의 내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영’으로 더욱 깊고 친밀하게 머무시려는 까닭입니다. 요한 신학의 핵심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는’ 관계입니다. 서로 초대하여 함께 머무는 관계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서로 벗 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세상이 만든 질서는 ‘주인과 종’의 질서입니다. 한쪽은 힘을 부리고, 다른 한쪽은 굽신거려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롭게 펼친 질서는 ‘서로 벗 된 관계’입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벗’입니다. 예수님마저 우리를 ‘벗’이라 부르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종’ 부리듯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이를 ‘동등 제자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문에 어느 교부는 ‘우정’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극진한 표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성령은 온갖 차별의 벽을 넘어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머물라는 용기를 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서로 함께 ‘벗’으로 존중하는 삶을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초월과 환대와 우정이라는 새로운 삶의 관계를 몸에 익히는 일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를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 사랑은 서로 벗이 되어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10일치 주보 []

기름과 눈물의 환시 –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

Wednesday, May 6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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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1:5~10 / 시편 92 / 마태 20:20~23
2015년 5월 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오늘을 생소한 설명이 붙은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로 지킵니다. 이 축일 이름만으로는 오늘 축일을 오해하거나 혼동하기 쉽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사도 요한 성인은 12월 27일에 기념하는 복음사가 사도 요한 성인과 같은 분입니다. 교회력에는 한 성인의 축일이 여럿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물론이려니와 세례자 요한 성인이나 바울로 성인이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특별한 신앙의 사건이 있을 때, 그에 얽힌 성인의 신앙을 기념하려는 뜻입니다.

“라틴 문 앞”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는 로마 제국의 관문인 로마 입구 “라틴 문”(Porta Latina)이라 부르던 성문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름이 끓는 가마가 있었고, 거기에 요한 성인을 넣어 죽이려는 참이었습니다. 결국, 군인들은 성 요한을 기름이 끓는 가마에 집어 넣고, 끓는 기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어 성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성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은 전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려고, 오늘 성인의 축일이 한 번 더 마련됐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라틴 문 앞에서 고난받은 사도 요한 축일’이라고 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앙인들은 그가 유배지인 파트모스 섬에 갇혔고, 거기서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요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도 요한은 성서에 등장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과 전설이 혼합하여 생겼습니다.

요한은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첫 제자단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어떤 교부는 요한복음서를 쓴 사람이 바로 이 요한 사도라고 했고,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바로 이 요한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분이 요한 복음서를 썼고, 내친김에 요한 1서와 2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도 합니다.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입니다만, 이런 주장의 객관적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이름을 통해서 여러 사건과 의미를 손쉽게 하나로 엮어 보려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뜻이 중요합니다.

후대의 교부들이나 신앙인들이 요한 성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성서에 나온 이야기와 교부들이 전해준 전설을 통해서 요한 사도의 삶을 우리 신앙의 태도에 비추어 볼 뿐입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부름 받은 요한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며, 2천 년 후 똑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을 되새겨 봅니다.

첫 단계 –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던 어부였습니다. 못 배우고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던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제자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일으켜 세우실 때, 요한은 다른 두 명의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빛을 내며 변화한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게쎄마네 동산에서 괴로운 기도를 하실 때 함께 기도해 달라고 초대받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핵심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매일 아침 성찬례와 나오시는 여러분이나, 우리 교회를 이끄는 여러 지도자처럼 중요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단계 – 요한은 이처럼 제자단의 핵심적인 위치를 지니고 권력과 자리를 바라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보듯이, 어머니까지 나서서 요한에게 한 몫을 떼어달라고, 한자리 얻게 해달라고 부탁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나 이런 청탁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신앙의 내력과 친분이 있으니 이렇게 요구할 법합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핵심 제자였고, 이 교회를 오래 지켰고, 가문과 신앙의 내력이 길고 하니, 당연히 한자리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엿보입니다. 사람은 종종 이처럼 자기 신앙의 열심과 내력을 내세워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주장하고는 합니다.

이런 점에서라면 교회도 세속의 정치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자리싸움과 권력 싸움으로 진흙탕이 된 한국 교회의 추태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성공회는 여기서 자유로울까요? 신앙의 부르심은 순식간에 권력 추구와 다툼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첫 소명과 부르심을 늘 되새기면서 이러한 권력의 유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권력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낯두껍고 뻔뻔한 사람일 뿐입니다. “너희는 이 고통의 잔을 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실 때, 그 고통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 들 수 있습니다” 하며 대답했던 제자들의 뻔뻔함을 우리는 늘 되새겨야 합니다. 이처럼 권력을 바라고 자리를 얻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 우리 교회의 현실에 던지는 뜻은 무엇일까요?

세번 째 단계 – 어떤 변화의 사건을 통하여 요한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 성인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요한만은 성모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참혹한 현장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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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부활한 빈 무덤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렸습니다. 첫 부르심으로 핵심 제자단이 되어 으스대던 모습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 잘 되면 자리하나 주세요’ 하는 마음을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드러내던 그 뻔뻔함이 무엇인지 다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힘을 드러내는 기적의 현장에 등장해서 으스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실 고난의 깊이를 함께 느껴달라는 초대는 잊고, 잠에 빠져들어 자신이 권력을 갖는 꿈만 꾸었던 제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이가 힘을 보고 들떠서 몰려다닐 때가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도망쳤을 때, 그 고통을 목격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남몰래 홀로 감당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바로 여기서 ‘라틴 문’ 앞 끓는 기름 솥에서도 살아난 기적 이야기의 뜻이 풀립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요한을 죽이려고 끓는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그 기름은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성령의 기름, 작은 그리스도로 새롭게 부음 받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를 죽이는 기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해 진리를 들고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를 갖게 하는 기름이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요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핵심 제자단이라는 서열의식과 대대로 신앙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때, 두려워서 모두 도망친 십자가 밑에서 가녀리게 떨며 우는 여인들을 내 어머니, 내 형제자매로 삼아 보살필 때, 요한 성인은 다시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져 빈 무덤만 남았을 때 요한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자신 안에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있듯이, 예수님 안에 제자 요한이, 요한 안에 예수님이 이미 자리하여 살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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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몸에 모셨던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혔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환시(幻視)마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갇혀 있었기에 요한이 지닌 상상력은 사람을 옭아매는 현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억압의 현실을 넘어서는 신앙의 희망을 더욱 깊이 갈망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은 환시 속에서 현실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무서운 힘과 권력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요한은 새로운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괴롭히고 짓밟은 힘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과 계획 안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깊은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의 자리나 힘도, 작은 사람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눈물과 함께하며 이 슬픔을 보살피는 일에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나누시려는 잔은 바로 이러한 슬픔과 눈물의 잔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의 권위와 자리를 포기하고서 그 눈물의 잔을 진실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겠지요?

대성당 – 치유와 환대의 성소

Sunday, May 3rd, 2015

대성당 – 치유와 환대의 성소(聖所) (마태 21:12~16)1

교회는 하느님께서 펼치신 구원에 감사하고 찬양하러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하고 실천하려고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모여서 감사하는 공동체가 정처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사귀고 변화와 기쁨을 누리는 곳이 성당입니다. 흩어져서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말씀이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서 힘을 얻고 주는 장소가 성당입니다. 이렇게 교회와 성당은 전례의 공동체이며 선교의 공동체로 하나가 됩니다.

오늘 읽는 성서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솔로몬은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바치며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저 하늘도 주님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열왕상 8:27). 그런데 사도 바울로 성인은 하늘도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살며 우리와 함께 거닌다고 선언합니다(2고린 6:16). 베드로서는 신앙인이 ‘살아 있는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건축하고, 그 안에서 아예 ‘거룩한 사제’로 예배를 드리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1베드 2:5).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로 부르십니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를 ‘거룩한 사제’라 부르신 뜻이 명백합니다. 어둠 아래서 고통받은 이들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던 세상에 사랑과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는 성소(聖所)가 되라는 초대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개혁하신 이야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와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악의와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죽이는 돌’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의 구원이 펼쳐지는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군데군데 무너지는 곳을 지탱할 ‘산 돌’로 지은 ‘기도하는 집’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일어난 일은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의 치유와 회복이었습니다. 기도는 정신과 마음 내면의 일에 머물지 않고 몸과 행동으로 펼쳐지는 사랑 자체입니다. 낯선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행동이 기도입니다. 이 활동을 보고 사람들이 외치는 ‘호산나’ 함성에 우리 교회의 성장과 희망이 있습니다.

축성 89주년을 맞은 서울 주교좌 성당은 콘크리트 도심에서 꽃과 나무의 생명을 보존하며 겸손하고 너른 품으로 지친 사람을 초대하는 쉼터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그리운 사람들이 모여 찬미하며 더 많은 생명이 깃들도록 품는 보금자리, 주님의 몸과 피로 힘을 얻어 세상을 향해 사랑과 치유의 손길을 펼치는 순례를 시작하는 성소(聖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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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3일치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