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의 인간 Homo Eucharisticus

Sunday, May 4th, 2008

일전에 나눔의 집에서 일하시는 박순진 신부님께서 요즘 한국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탄해 하며, 도대체 “우리의 전례(liturgy)가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야 하는지”를 물어오셨다. 당신의 사목 활동이 이미 그 뜻을 몸소 살고 있는 참이니, 똑바로 공부하여 나누라는 일갈로 여겼다.

하릴없이 나는 원칙만 되새기며 함께 가자고 할 뿐, 그리고 오히려 신부님의 나눔의 집 선교 활동을 통해서 몸으로 배워야 하겠노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상황에서 전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매우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선은 이런 편만한 욕심과 욕망의 분출 현상은 최소한 성찬례라는 전례가 갖는 비전과는 전혀 반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이 비전을 우리 전례 안에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인 돔 그레고리 딕스(Dom Gregory Dix)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 혹은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하고, “성찬례의 인간” 혹은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이게 성변화(transubstantiation)의 진정한 의미겠지요.

스리랑카의 예수회 신부인 티사 발라수리야(Tissa Balasuriya) 역시 성찬례가 갖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 G. Lohfink)의 전망을 세상에 대한 비판과 연결하여 천명한 바 있다. 성공회의 성사적 사회주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한다.

현존하는 세상의 질서 혹은 무질서는 성찬례의 가치와 분명히 대조적이다. 성찬례가 사랑과 나눔의 성사라면, 세상은 탐욕적인 착취의 체제이다. 성찬례가 공동체를 건설한다면, 세상의 관계는 인격과 인간을 파괴한다. 성찬례가 보편 지향적이라면, 세상은 인종차별적이다. 성찬례의 힘은 평등 사회를 향하지만, 세상의 권력은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다. 성찬례가 겸허한 섬김을 추동한다면, 세상의 국제 관계 속에서는 오만한 지배가 판을 친다. 성찬례의 빵이 모든 이들을 위한 공동의 식사라면, 세상의 빵은 거래를 위한 상품이다. 성찬례의 이상 안에서 땅은 공동 이용을 위한 것이지만, 현재의 국가 체제 안에서 땅은 성공한 정복자를 위한 것이다. 성찬례는 인격을 우선시하지만, 국제 관계 안에서는 권력과 이익이 지배한다.

Tissa Balasuriya, The Eucharist and Human Liberation. Orbis Books, 1979.

다시 ‘이런 세상에서 전례는 무엇이야 하는가?’ 전례가 다만 세계관이나 전망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것은 대조 사회를 위한 몸의 수련이고,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한 훈련이며, 전례적 질서(ordo)를 통해 새로운 질서(order)를 미리 맛보며, 그 대조 사회의 시-공간을 넓혀 나가는 것이어야겠다. 그런데 이를 막아서는 일들이 교회와 전례 안에서 마저 팽배하다면, 교회와 전례는 또 다른 세상 권력의 표현일 뿐이다.

나쁜 전례는 나쁜 신학을 만들고 / 나쁜 신학은 나쁜 전례를 만들고,
나쁜 전례와 신학은 교회와 세상을 망친다.

전례 쇄신은 이래서도 중요하다.

불혹 (不惑), 혹은 두려움

Tuesday, September 11th, 2007

머뭇거리다가 올리지 못한 작은 생각이 한해 내내 가위누르듯 했다. 올해를 마감하기 전에는 이 생각을 정리해봐야지 했지만 통 생각이 익질 않고 무거움만 늘었다. 삭여보야 곪을 것이 뻔할 경우에는 팔삭동이 생각이랄지라도 밖으로 내놓는 것이 살리는 길이다. 그런 다음에야 가늠하고 보살피는 일이 상책이다.

그저 나이 타령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에 들어섰다는 자각은 늙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이 나이되도록 뭐했나 하는 자괴감에서 비롯했을지 모르겠고, 가당치 않게 공자님의 인생 셈법에 비춘 탓에 불쑥 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불혹(不惑)이라는 말을 맞이하는 심경이 어떠냐?”는 심중의 물음이다.

이미 20대에는 비장함 반 기대감 반으로 “나이 서른에 우리”를 불러댔고, 정작 서른이 지나자 꼬리를 내리고 예수님의 나이를 앞두고 조바심을 갖게 됐다. 조바심이 이뤄줄 수 있는게 없다. 예수님처럼 당신에게 내린 해방의 성령이 부으시는 힘을 얻어 출사표를 내고 현실에 뛰어 들지 않는 한… 예수님은 아니더라도, 그분과 같은 서른 셋 나이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절명한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는 것도 참 무거운 것이었다. 때로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 함께 가는 일의 한계와 그 울타리때문이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짐짓 그 울타리의 보호에서 안주하지 않았노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철들지 않은 생각이 미치는 게 “불혹”이라는 말이다. 온갖 미혹에서 자유롭다는 그 넓은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느나, 당장 서로 연결된 두가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우선 불혹이란 어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으로 풀어지고, 그 욕망의 실체는 기실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만 좁힐 일이 아니다. 개인적 관계의 욕망이 해를 끼치는 일은 제한적이다. (사랑이 욕망인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사랑에 열려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 명예욕, 권력욕, 금전욕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게 종교 인사들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나이들면 욕심 말고는 남는게 없다고들 하는데, 공자님은 이때문에 이런 사회적 욕망의 유혹을 견제하려고 나이 마흔에 선을 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조건 또한 종합진단을 받아야 할 수위라는 뜻이겠다.

나이와 욕망의 비례 법칙은 어디서 비롯될까? 두려움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소극적으로는 이 생애에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조바심이 그 속내라면, 적극적으로는 내 이름 걸고 세상에 마련해 놓은 어떤 실체와 다른 이들이 우러러 볼 어떤 성과를 위해 치닿는 것은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모양새다. 여기에 다시 여지껏 온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덧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번 차지한 명예, 자리, 재산을 내려 놓기 어려운 법이다.

머리를 돌리면 종교 선전에도 이런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은 대체로 두려움을 이용한 자작극이다. 지옥불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금새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가련함으로 바꿔치기하고는 결국 외로운 자신의 두려움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외로움을 덜려는 시도로 밖에 안보인다. 이들 선전의 “천국”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저승의 천당쪽으로만 기우는 것도, 하느님 나라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표식이거니와, 요즘의 교회 모양 같아서는 이승의 기득권을 저승까지도 이어보자는 심산으로도 들린다.

(정치나 종교는 내내 이런 두려움을 이용한다. 테러리즘이나 대(對)테러리즘은 실상 같은 두려움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작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부시는 이 점에서 동족이다. 근본주의 역시 늘 이 두려움에 기반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대체로 종교란 고래로 이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에 기반하여, 이를 제거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럴까?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기대어 죽음을 피해보자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목표인가? 교회는 대체로 그런 쪽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주님이 대면하여 극복하신 두려움에 대해서는 성찰했던가? 부활하신 주님의 사목 활동이 가르치는 두려움에 관한 대면은 사뭇 다르다. 문을 꽁꽁 잠그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 안으로 파고 드셨다. 안개처럼 희미한 인생 해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제자들에게 그분은 “나다,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을 건네셨다. 두려움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두려움과 대면하라는 것이다. 그 길에 그분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불혹은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고 걷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백척간두 진일보”는 더욱 살갗돋는 표현이다. 두려움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걷는 길, 두려움을 피하고 덮으려 할 때 줄곧 솟는 욕망들을 식별하는 길, 그것이 불혹일게다.

마흔인데도, 여전히 생각이 지저분하다. 아직 무언가 두려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