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Wednesday, May 27th, 20091.
매일 기도하고 있으나, 부끄러움과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어떤 말도 잘 터지지 않았다.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한국에 계신 몇몇 신부님들께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과도 깊은 한숨을 나누었다. 모두들 경악했고 슬퍼했다.
이 공유하는 충격 속에서 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나 역시 그 사람 노무현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몸담고 있는 사목 현장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와 교단에 따라 어떤 분기점들도 보였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경우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든, 한탄하는 것이든, 답답해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제 생각들을 속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이야기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고들 한다. 이미 수구 꼴통들은 교회의 가르침입네 하면서, 자살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말로 정치적인 언변을 설교랍시고 묵상이랍시고 교활한 정치적인 선동을 뿌려 놓는다. 많은 이들이 신자랍시고 그 말들에 부하뇌동한다. 그리고선 이 죽음에 대해 그저 인간적인 애도만 표명해도,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인다느니,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말로 응수하고 공격하기가 일쑤란다. 움추릴 만하다.
2.
그런데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사목하고 목회하는 일은 신앙적인 언어도단이 아닌가? 신앙은 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진댄, 교회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탓에 어떤 반성과 성찰을 위한 도전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더라도, 한참이나 김빠진, 맥없는, 하나마나 한 입발린 말들은 나 같은 사목자들 스스로를 그 심연에서 비참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비참 속에서 우리 교회는 “끼리끼리의 사교 클럽”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등급이 명확하게 매겨진, 강력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런 사교 클럽. 그러니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하다는 말도 다들 헛소리이다. 아직 다양하기라도 하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을 터.
그러니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슬기와 순결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경륜이라고들 한다. 젊은 것들은 거기에 좀 머리 좀 숙이라고 다그친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경륜을 가장한 타협과 기만과 위선과 노회함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도, 격려도, 조언도 아니다. 또 다른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순결”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고, 공동번역에서 “양순하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뜻대로라면 ‘순결’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라면 “단순/단호하라”는 말이겠다. 때묻지 않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면서 어찌 모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고민 속에서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우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숨기며 짐짓 뻐기고 있는 태도에 허를 찌르라는 말로 들어야겠다. 내 폐부를 찌르고 가르는 그 날카로운 도전이 이 슬기로운 우회의 과정에서 무디어지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3.
나 같은 신앙인들에게 돌아오는 수술용 칼날은 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위선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가없은 욕망을 치장한 이 위선으로, 우리는 몇년 전 대단한 위선의 흉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우상은 한때 권좌에 있던 이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런 그 탐욕의 우상이 보통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감추려는 위선은 우리의 눈도 가린다. 눈먼 우상은 살아 있는 이가 이미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다. 우리의 뒤틀리고 벌거벗은 욕망이 이 무소불위의 눈먼 권력을 낳았고, 지금 우리가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물이 나의 위선을 씻어내리는 회개와 세례가 되지 않고서는, 이 슬픔에 찬 분노도 이미 거만하게 우뚝 서버린 흉물스런 우상 앞에서 맥을 쓸 수 없다.
4.
이런 거친 심정때문이었다. 마음 깊으신 한 신부님의 “말-씀”에 토를 달며 투정을 했다. 그것 말고는 침울하게 산란한 내 마음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침묵해야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공이 얕고, 도에서 먼 지라, 털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투정을 고쳐 옮겨 놓는다.
이 참담한 사건에 직면한 마음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도 잘 안나오고, 한편으로는 참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사목자이신 신부님의 처지를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슬픔에 기대어 투정을 좀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부분인 오늘의 본문(요한 17:6-19)을 요약하는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 주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우회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좀더 분명한 표현은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만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속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의식 속에서, 훨씬 예언자적인 표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많은 경우에는 세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들을 제가 명민하고 사려깊으신 신부님의 글에서 – 글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걸 알지만 – 쥐어 잡을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너머’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즉 우리의 위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별사가 예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어떤 위대한 구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편만한 위선의 폭로였습니다. 그 폭로인 그의 죽음에 우리를 비춰보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위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죽음은, 그래도 그나마 인간적이어서 정직하려고 몸부림쳤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신앙인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고라도 신앙인들은 이 점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의 성찬례에서 신앙인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고, 그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이 용기와 기쁨을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그동안 우리의 위선을 포장하거나 치장하는 메이크업 가게가 되었고, 우리의 음란한 욕망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흉물이 바로 2mb와 그 졸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종교인, 게다가 대형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어떤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한, 어떤 “우회”가 빈말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이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면서, 성직에 든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리고 그 기념일에, 제 자신에게, 제 동료 성직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교인들과 바닷가에 나와 거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입에 들쳐오는 모래를 씹으며 거듭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