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Saturday, January 29th, 2011

번역자의 발뺌

영 가디언 지에 난 테오 홉슨(Theo Hobson)이라는 젊은 신학자의 글을 올린다. 그의 경력에서 보이듯, 조직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하고(교회의 권위 문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 특히 그의 성사적 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저작을 펴낸 바 있다. 제도적 교회의 문제, 특히 영국 성공회의 국교회 지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제도 교회를 나와 가족과 함께 거리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짧은 글 하나는 우리 말로도 소개된 적이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기괴하게도 <신을 옹호하다>) 서평.

그의 칼럼을 내 식대로 읽는다면, 그의 중요한 지적 하나는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된 제도적 교회의 어둠 뒤로 새롭게 발견하는 제도적 교회의 경험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례'(ritual)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연결된다. 이는 내가 언젠가 말한 바 있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위계(hierarchy)는 늘 오용 자체, 혹은 오용의 근원인가? 권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저항의 대상만 되는가? 이 의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위계와 어떤 권력과 맞서고 있으며, 어떤 위계/질서와 어떤 권력/힘을 만들어 내려 하는가로 고민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지배하는 권력(power-over)이 아닌, 보호하며 섬기는 권력(power-within)으로 위계와 권력을 재규정할 때라야, 정치 혹은 권력에 대한 만연한 혐오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와중에 ‘의례’는 이러한 새로운 위계와 권력의 삶을 실험하고 훈련하는 새로운 시공간이다. 이는 전례(liturgy)의 목적이기도 하다.

번역은 맥락과 맥락을 연결한다. 번역어는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아랫글에서 가장 휘청거리는 번역어는 ‘리버럴'(liberal)과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리버럴’과 ‘자유주의’는 그 번역어 이전과 이후에도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좁은 이해로 공격받아 고생해 온 서러운 개념이다. 그 서러움을 여기서 다 풀 수는 없겠고, 번역자의 발뺌을 일러두기로 삼는다.

원문의 “liberal”은 대체로 ‘리버럴’ 혹은 ‘자유로운’으로 번역했다. (즐겨찾는 맞춤법 검사 사이트는 이를 ‘혁신적’ 혹은 ‘진보적’으로 고치라고 조언하지만, 무시했다.)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냄새가 나는 표현으로 제한하기에는 그 경계가 넓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에 일관되지 않게 “liberalism”을 통상 번역하는 대로, “자유주의”라고 했다. 이 비일관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자유주의’ 개념을 인식하는 우리 안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원래 글에서 말하는 ‘리버럴’과 ‘자유주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례는 고종석에게서 본다, 고만 적는다. ‘Post’는 ‘이후’ 또는 ‘탈'(脫)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그 의미의 이중성때문에 ‘포스트’로 남겨 두었다.

“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테오 홉슨

단골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동안 나는 이 난(가디언지 Comment is Free: 역자 주)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논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다.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국교 유지를 맹렬히 비난한 것으로 시작하여, 교회 모든 주요 형식들이 자유와 동떨어진 사고방식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로 리버럴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아나키적이며, 포스트-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조직을 갖춘 종교가 그렇게 나쁜 방식은 아니겠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적 형식들은 피할 수도 있거니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고쳐 먹은 데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몇 년 동안 살핀 끝에, 새로우면서도 포스트-제도 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실체를 찾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둘째, 내 생각에 반대되지 않는 교회의 한 형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10년 전, 9.11 사태 직후에 일어난 논쟁을 통해서 나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내 헌신을 재고하게 되었다. 나는 영국 성공회가 그 국교회의 위치를 박차고 나오면서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혁이 있었나? 전혀 아니었다. 영국 성공회 내부에는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보수적인 목소리들이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보수적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의 자유주의가 암울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들 떠들었다. 나의 환멸은 교육 분야에서 영국 성공회가 하는 역할을 보면서 끝을 봤다. 영국 성공회는 이류 학교 운영에 점차 관여하면서, 실속 없는 교회 참석률 올리기에 급급했다.

다른 교회들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든 제도 종교들은 구제 불능의 꼴통들 같았다. 비국교 교회들도 오야붕스런 교리주의로 끌려가는 것 같이 보였고, 그리스도교와 자유주의 사이의 친화성을 선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새롭고, 좀 더 급진적이며,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교는 세속의 진보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제도적인 정통주의를 경계한다. 전통적인 교회 대신에, 나는 자유로운 형식과 축제적이며 예술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어떤 느슨한 문화를 제안했다. 새롭고 자유로운 종교 문화 말이다.

그러나 참여할 만한 이런 문화를 찾지 못했다. 나도 경험해 본 대안 예배 운동(alternative worship)의 몇몇 시도들은 영국 성공회가 소심하게 진행하는 것들이었다. 교회를 멀리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너무 냉담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은, 제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의례의 중요성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들만이 고대의 어느 팔레스틴 사나이에 대한 예배의 의례에 깊이 참여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없다.

조직된 종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조직된 종교만이 그리스도교 의례를 조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례가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모호한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나는 의례(ritual)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을 몇 년 동안 살폈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에 나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좀 더 강력한 포스트-제도적 그리스도교 문화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인 “이머징 처치” 운동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궁금했다. 미국 성공회는 국교회가 아닌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세계 성공회 여러 교회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의 원리주의와도 단절했다. 그러면 여기서 자유주의의 어떤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제도 종교의 다양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성공회 예배의 맛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거 아냐?”

세계 성공회의 위기를 뒤돌아 보면서, 미국 성공회의 담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진 로빈슨 주교의 성품을 유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 하나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원리주의에 반대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의 프로젝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로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도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위기는 바울로의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리버럴한 성공회 신앙을 (모호하게) 믿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 신화였다는 것을 점차 알게됐다. 영국 성공회는 항상 자유주의에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문제에 과감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점잔빼며 무시했다. 정말 영국 성공회에도 지적이며 리버럴한 목소리가 있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들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무시하는 실용적 방법을 택했다.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그 늙은 반(反)리버럴의 저주를 말이다.

이곳의 공기는 더 상쾌하다. 미국 성공회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리버럴한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선구자로 등장했다. 이 점이 내가 아직 교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설득하고 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英 가디언 誌 2011년 1월 28일 치 http://goo.gl/PgnPx

성공회의 한 전통 – 그리샴 커크비 신부

Monday, October 11th, 2010

성공회는 서방 교회 내에서 어쩌면 가장 복잡한 역사의 경험과 내력, 그에 따라 가장 넓은 신학적 실험과 실천의 폭을 가진 그리스도교 전통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따라가면, 특히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어느 몇몇 특정 교단 전통이 보수든 진보든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처지에서, 이런 느슨하면서도 넓은 폭에 깃든 경험의 결들을 섬세하게 살펴서 우리 맥락의 신학과 실천에 잇대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자신의 풍요로운 전통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서 나눠야 할 일은 놔두고, 남의 우물이나 기웃거리다가 자기 우물 메말라 결국 메워버리는 우를 범하기 일쑤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이야기에서 적었듯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영국 성공회, 이후 세계 성공회 신앙 전통에서 큰 지하수를 이뤄서, 곳곳에 우물을 공급했다. 게다가 그것이 성육신 신학에 뿌리를 둔 성사적 세계관을 고민하던 성사주의자들과 만나서는, 매우 독특한 우물 맛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와 세계에 대한 투신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혹은 ‘그리스도교 성사적 사회주의’는, 이른바 ‘사회과학적’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 면에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와 그 맥을 나누는 점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성공회의 이 성사적 사회주의는 여러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대체로 기구 운동이나 조직 운동보다는, 자기가 터 잡은 공간과 지역의 삶에 깊이 투신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다른 조직이나 기구 운동은 그런 사고와 실천의 확대와 협력을 위해 벌인 이차적인 것이었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명멸하듯, 이들도 명멸한다. 적어도 지난 20세기의 성사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아마 그 마지막 성사적 사회주의자였는지 모른다. 아니, 그의 부고를 적고 있는 케네스 리치 신부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다. 이제 이 전통의 경험과 신학, 그 실천과 한계를 21세기에 어떻게 되살려 볼 것인가? 면면히 흘렀으나 이제 잊혀 물줄기를 찾기 어렵게 된 지하수에 잇대어 다시 퍼 올릴 우물물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고민을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에 이어 그리샴 커크비 신부의 부고를 통해서 다시 시작해 본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 (Father Gresham Kirkby)1
성공회 사제, 전례 개혁의 선구자, 아나키스트
(1916년 8월 11일 ~ 2006년 8월 10일)

Fr_Gresham_Kirkby.jpg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자신의 90번째 생일을 몇 시간을 앞두고 별세했다. 최근까지 런던 동부 한 교회의 주임 사제로 가장 오랫동안 섬겼던 분이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초창기 핵무기 철폐 운동가요, 반전 운동 조직인 백인위원회(the Committee of 100)의 일원이었으며, 영국 성공회 내의 전례 개혁 선구자이자,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콘월에서 태어난 그는 감리교 찬송의 신학(그의 어머니와 이모는 감리교 신자였다)에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나, 일찍이 세인트 힐러리 교회의 사제였던 사회주의자 버나드 워크 신부의 영향으로 성공회-가톨릭주의로 신앙의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다른 사제가 제대에서 전례를 집전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손수 오르간을 연주했다.

1940년대 초 리즈 대학교 졸업 후, 커크비 신부는 요크셔 머필드에 있는 부활 대학(부활 공동체 수도회가 설립한 신학대학: 역자주)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대주교가 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가 수도회 지원자로 있던 때였다. 당시 커크비는 허들스턴을 오히려 보수적이라 여길 정도였다. 1942년에 부제로, 1943년에 사제로 서품된 커크비 신부는 맨체스터 고튼의 성모와 성 토마스 교회의 보좌 사제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런던 보우 커먼의 세인트 폴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커크비 신부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교회 건축이었다. 1960년에 축성된 이 성당을 당시 영국의 ‘건축 비평'(Architectural Reviews)지는 20세기에 지어진 가장 중요한 교회 건물이라고 평했다. 커크비 신부는 건축가로 로버트 매과이어(Robert Maguire)와 키스 머레이(Keith Murray)를 선택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 “2000년이 되는 때에 그리스도교 예배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반영한 교회는 어떻게 지을 것인가?”

Bow_Common_Church.png

보우 커먼 교회의 전례는 로마 전례를 따랐으나,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을 이미 10년 앞서서 실행한 것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성무일도를 그레고리안 챈트에 맞추어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마침내 로마 교회가 우리를 이제야 따라온 것”이라고 말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로서, 커크비 신부는 1956년까지는 자신을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로 부르곤 했다. 그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미국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커크비 신부가 별세하기 이틀 전 그를 방문한 런던 주교는 신부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커크비 신부님은 아나키즘에 대한 불멸의 믿음을 갖고 있노라고 선포하시더라.” 커크비 신부는 핵무기 해체 운동을 벌이며 당시 핵무기 기지인 알더마스턴 행진을 완주한 최초의 사제였으며, 핵무기 반대 운동으로 1961년에는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투옥 동안에 브릭스턴 감옥의 채플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활기 넘치는 예배를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하느님 나라 연대'(the League of the Kingdom of God: 1922년 창립)라는 조직의 마지막 생존 조직원이었으며, 1960년 해체되기까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 연대’의 의장을 지냈다. 그는 개량적 사회주의, 특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정책에는 그 어떤 동정심도 보이질 않았다.

커크비 신부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의 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 보편 교회의 신앙과 천 년의 희망”(Kingdom Come: the Catholic Faith and Millennial Hopes, in Essays Catholic and Radical, edited by Rowan Williams and Ken Leech, 1983)은 그의 사고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런던 동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상가로 남았으며, 자신의 생각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쉬지 않고 자신과 싸우며 멈추지 않는 사유자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세상의 문제점들과 영국 성공회의 상태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표현하곤 했다. 그는 뼛속 깊이 풀뿌리 지역에 기반을 둔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커다란 사랑을 베풀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과 영향을 준 신부였다.

— 케네스 리치 신부 Fr. Kenneth Leech, 2006년 8월 22일 영 가디언지

  1. http://www.guardian.co.uk/news/2006/aug/22/guardianobituaries.religion/print []

교회와 사제직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Monday, June 28th, 2010

지난달부터 성직 서품이 곳곳에서 있다. 새로운 사제들이 나오고, 부제들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서품 전례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겼을 테다. 예년과는 달리 몸이 참석할 수 없으니, 멀리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합하여 축복한다.

어떤 이는 성직자들 안에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해온다. 한 개인의 지향과 영성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신자요, 사목자이겠으나, 특정한 전통의 공동체(성공회) 안에 녹아들어 그 책임을 지는 ‘사제’인지는 모르겠다는 고민 어린 비평이다. 어느 틈엔가 어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빌미로, 사제 개인들은 공동체의 전통 안에서 받은 사제직의 실천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곤 한다는 불만이다. 시쳇말로, ‘몸은 이 교단에 두어 옷까지 걸쳐 입었는데, 사고와 행동은 전혀 딴 동네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본다. 사제직 ‘본연’에 대한 끝없는 반성은 필수적이다. 규정된 기능과 행동만을 요구하는 교회 조직의 권위주의가 세를 부릴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런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 저항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만연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특정 전통의 공동체 안으로 서품받은 일을 잊거나, 애써 모른 체하려는 게 보인다는 걱정이 일기도 한다. 대체로 ‘본질주의’는 핑계의 한 방법이다. 사정이 걱정하는 그대로라면, ‘평신도’ 사목자로 남되, 그 특정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로는 자처하지는 말 일이다. 어쨌든, 그 의미의 ‘본연’과 그 특정한 공동체 전통의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매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사제직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평신도로 식별하여 살았던, 스트링펠로우에게서 몇 마디를 인용하여 되새긴다. 이는 교회와 사제직에 대한 ‘본연’의 고민일 테니, 다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이를 씨줄 삼아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성직자와 교회는 각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드러내야 하는 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는 교회 전통 안에서 경험하고 논의하며 정리한 내용들과, 서로 다른 맥락과 현장의 경험과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화를 부추겨 계속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서가 기술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교류와 격동, 갈등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대신해서 살아간다.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낯선 이요, 이방인이다. 사회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세상의 사람들과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져서 그 사회에 거스르는 행동을 피하는 도피주의의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은 성사적 예배로 모여서,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몸의 구성원들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사제직에 서품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그 사제직과 사목 활동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을 세상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임(congregation)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그 몸의 구성원에게 펼치는 사목 활동이다. 그 관계의 양상은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교회,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교회의 극도로 복잡한 생명 활동을 향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여, 그들이 세상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게 쓰도록 돕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고해 성사의 활동이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임무와 증언을 듣고, 그 몸의 구성원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뤄가야 할 다른 모든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사목 활동은 교회의 전통, 즉 성령 강림 사건 이래 펼쳐진 선교 사명과 그 일관성을 보살피며 지켜나가는 활동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과 거룩함에 투신하는 것이다.

William Stringfellow. A Private and Public Faith,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