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 – 전례의 뒷 이야기

Friday, March 21st, 2008

세월은 망각때문에, 혹은 피할 수 없는 접촉과 영향때문에, 때로 반목했던 역사를 화해시키기도 한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새 역사가 열린다면 이를 마땅히 즐길 만하다. 시간 속에서 창조와 모방과 변화가 늘 일어나 뒤 섞이는 탓에 누구에게 진본을 구하려는 것도 부질 없은 일이다.

성 금요일 전례 행사에서 도드라지는 두 예식은 십자가 경배와 성찬례 없는 영성체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실제로 달렸던 십자 형틀을 기어이 찾아내어 이를 유물로 삼아 십자 경배를 했다고 한다(그래서 십자 경배에서는 십자고상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만 쓴다. “보라, 십자 나무. 거기 세상의 구원이 걸려 있네.”) 이 예식은 4세기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게리아(Egeria)의 기록물에 등장하는데 아마 이를 전후로 서방에 유입되어 성 금요일 전례의 전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반면 동방 교회는 대체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묻는 것을 재현하며 이를 기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13세기 서방 교회에서 마리아 신심이 높아졌을 때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Stabat Mater)가 자식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했다면, 동방 교회는 이미 죽어 내려진 예수의 시신과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 주변에 남았던 여인들(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요한복음은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의 슬픔이 성 금요일(“위대한 금요일”) 전례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관계는 우연일까?

성 금요일은 성찬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경우에 따라 전날 축성한 성체를 영하거나, 아예 이 마저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예식이 있는데, 십자가 상에서 했다는 예수의 마지막 일곱 말씀을 복음서에서 뽑아 만든 묵상 예식이다. 최근에 성주간, 최소한 성금요일을 지키려는 개신교의 일각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실상 이 예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미 페루에서 시작했던 예식이었다. 이게 이후 서방에 다시 역수입되고, 작곡가 하이든은 이 마지막 일곱 말씀에 따른 음악을 만들도록 주문을 받기도 했다.

국경과 문화와 시간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 때문이었을까? 가상칠언 예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더 쉽게 받아들여져 널리 퍼졌다. 아마도 성주간이나 성 금요일에 특별한 예식이 없는데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 전통에서 아주 적절한 성 금요일 예식의 대안이 되었을 법하다. 각각의 말씀에 대한 설교나 혹은 묵상 안내로 저마다 훌륭한 예식이 되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격변 속에서 서로 상극으로 등장한 예수회 전통과 개신교 전통이 성 금요일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인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다. 하기야 요즘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예수회 영성에 닻을 대려는 개신교 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역사적인 상극성과 영성적인 상동성은 또다른 문제이겠고, 어쨌든 서로 배우며 풍요로운 유산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곱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 19:26-27)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5-46)

5. 목마르다. (요한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46)

성주간: 테네브레 Tenebrae

Tuesday, March 18th, 2008

 

Tenebrae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테네브레 Tenebrae는 “어둠” 혹은 “그늘”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이름을 딴 촛불 예배를
성주간 마지막 3일 동안에 드렸습니다.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개의 촛불들이 마련되어 있는 둘레에 혹은 그 앞에 모여,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꺼나가며 드리는 기도 예식입니다.

마침내, 하나의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들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 가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 어둠 속에서 울려나는 굉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고,
어둠이 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흩어질 뿐입니다.

정말 이렇게 속절없이 끝나고 마는 걸까요?
(200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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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 풀러 신부와 전례적 설교

Tuesday, February 6th, 2007

성서정과(Lectionary)에 따라 주일 설교를 하는 것이 모두 전례적 설교(Liturgical Preaching)는 아니다. 말 그대로, 전례라는 전체 맥락에 위치하여 성서가 전하는 선포와 성찬례가 요구하는 우리 삶의 봉헌과 변화를 매개하는 것이 전례적 설교의 간단한 정의겠다. 최소한, 성공회에서는 대부분의 설교가 전례의 맥락 속에 위치하기 때문에, 되도록 이러한 전례적 설교의 정의를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의 예배가 아니라, 설교와 예배가 혼동스러운 예식과 외적인 형식에 초점을 둔 성찬식이라는 두가지 예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문제는 여러 교회들에서 자주 보인다. (참조: 예배-전례 공간의 형성)

영국 성공회 출신의 신약성서학자로 미국의 여러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레지널드 풀러(Reginald H. Fuller) 신부는 성서정과에 대한 성서학적 설교자용 주석인 “성서정과 설교”(Preaching the Lectionary: The Word of God for the Church Today)로 성공회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그의 책은 198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이후 쇄를 거듭하고 개정을 거듭해 2006년에는 제 3 개정판까지 갖게 되었다. 선교교육원을 통해서 3년 주기 설교자용 성서정과 해설(캐나다 성공회의 Herbert O’Driscoll 신부의 책이 주 대본이었다)을 번역한 바 있던 내게도 풀러 신부의 이 책은 매우 낯익은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아마도 당시 신학교에서 사용되었던 책인지 여기저기서 많이 띄었던 기억도 난다.

올해는 이 분이 “전례적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지 50년이 된다고 한다. 지난 반 세기 동안에 전례와 설교, 그리고 그 적용에 대한 연구는 엄청난 것이어서 오늘에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원칙과 중요한 지적들은 여전히 우리 교회의 설교 행태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최근 받아본 미국성공회의 주간지인 “리빙 처치”(Feb. 4,2007)가 90살이 넘은 이 노학자를 인터뷰하고 이 책에 대해 실은 바를 간추려 소개하면서, 우리의 전례적 설교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설교 준비와 설교 자체를 다시 돌아보도록 한다.

풀러 신부는 전례라는 맥락을 상실한 혹은 전례없는 설교가 쉽사리 주지주의나 도덕주의, 혹은 감정주의에 빠지는 것을 우려한다. 이러한 세가지 설교의 흐름은 이를 듣는 교인들을 하나의 교회로 세우지 못하고, 사람들을 파편화시켜 서로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여기서 풀러 신부는 설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말씀의 선포에 대해서 교회(하느님의 백성)이 반응해야 하는데 그렇게 구성되지 못한 교회 예식에 대해서 지적한다. 이는 또한 설교가 없는 전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전례적 설교의 목적은 어려운 성서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청중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미 교인들의 마음에 잠재해 있는 어떤 신앙적-종교적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목적은 전례의 다른 여러 요소들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다리의 역할에 있다. 설교는 함께 읽은 성서의 말씀과 그 뒤에 따르는 성찬례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정과에 따른 설교는 정해진 구절에 따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성사를 연결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물론 풀러 신부는 이러한 전례적 설교가 설교의 전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신약성서에는 최소한 3가지 유형의 말씀의 사목이 있다고 한다.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케리그마(kerygma); 세례 후보자나 세례받은 이들을 위한 윤리적, 교리적 가르침을 담은 디다케(didache); 그리고 신앙인들을 안에서 복음의 뜻을 쇄신하고 강화하려는 파라클레시스(paraklesis)가 그것들이다.

여기서 전례적 설교는 “파라클레시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선택된 성서 본문에서 복음의 진수와 내용을 뽑아내는 것이며, 그 날 본문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중심적 행동을 꿰뚫어 내어 그 하느님의 행동이 감사기도 (성찬례) 안에서 다시한번 구체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풀러 신부는 어떤 성서의 본문이든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책 “성서정과 설교”는 이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이 설교자용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성서 주석과 교회력, 그리고 주석에서 설교로 진행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성서 주석이 신자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요구되는 사목적 상황에 연결되는 점까지만 다룬다. 그렇다면 그 다음 과정, 즉 그의 “전례적 설교”의 정의에 따른 성찬례와의 연결은 결국 설교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전례적 설교는 성서에 대한 성실한 주석을 통한 준비와 교회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인식, 그리고 성서의 선포를 성찬례의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마련된다고 하겠다. 매번의 설교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균형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실제적 원칙으로 마련된 전례(설교와 성찬례)를 통하여 성서와 성사와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움직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