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삶 –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

Sunday, June 7th, 2015

성령의 삶 –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 (마르 3:20~25)1

종교는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다룬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통념과 거리가 멉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우리 신앙의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를 ‘죄’이자 ‘타락’이라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로 보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창세 3:8~15).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하느님의 추궁에 아담은 여태껏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내 뼈에서 나온 뼈’라고 기뻐하던 사람을 비난하고,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영을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는 ‘성령을 모독하며 큰 죄’를 짓습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의 악령이 아닌,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치유하는 일에서 연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며 초대하시는 이 사귐과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요, 어머니’가 이루는 성령의 삶, 성령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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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7일 연중10주일 주보 []

대성당 – 치유와 환대의 성소

Sunday, May 3rd, 2015

대성당 – 치유와 환대의 성소(聖所) (마태 21:12~16)1

교회는 하느님께서 펼치신 구원에 감사하고 찬양하러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하고 실천하려고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모여서 감사하는 공동체가 정처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사귀고 변화와 기쁨을 누리는 곳이 성당입니다. 흩어져서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말씀이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서 힘을 얻고 주는 장소가 성당입니다. 이렇게 교회와 성당은 전례의 공동체이며 선교의 공동체로 하나가 됩니다.

오늘 읽는 성서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솔로몬은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바치며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저 하늘도 주님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열왕상 8:27). 그런데 사도 바울로 성인은 하늘도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살며 우리와 함께 거닌다고 선언합니다(2고린 6:16). 베드로서는 신앙인이 ‘살아 있는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건축하고, 그 안에서 아예 ‘거룩한 사제’로 예배를 드리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1베드 2:5).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로 부르십니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를 ‘거룩한 사제’라 부르신 뜻이 명백합니다. 어둠 아래서 고통받은 이들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던 세상에 사랑과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는 성소(聖所)가 되라는 초대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개혁하신 이야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와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악의와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죽이는 돌’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의 구원이 펼쳐지는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군데군데 무너지는 곳을 지탱할 ‘산 돌’로 지은 ‘기도하는 집’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일어난 일은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의 치유와 회복이었습니다. 기도는 정신과 마음 내면의 일에 머물지 않고 몸과 행동으로 펼쳐지는 사랑 자체입니다. 낯선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행동이 기도입니다. 이 활동을 보고 사람들이 외치는 ‘호산나’ 함성에 우리 교회의 성장과 희망이 있습니다.

축성 89주년을 맞은 서울 주교좌 성당은 콘크리트 도심에서 꽃과 나무의 생명을 보존하며 겸손하고 너른 품으로 지친 사람을 초대하는 쉼터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그리운 사람들이 모여 찬미하며 더 많은 생명이 깃들도록 품는 보금자리, 주님의 몸과 피로 힘을 얻어 세상을 향해 사랑과 치유의 손길을 펼치는 순례를 시작하는 성소(聖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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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3일치 주보 []

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Sunday, April 26th, 2015

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사도 4:5~12, 요한 10:11~18)1

부활 이전과 이후가 베드로의 삶을 가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무서워서’ 다른 동료와 문을 닫아걸고 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인 대사제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로 삶의 질서가 역전됩니다. 부활 이전에 예루살렘은 정치와 종교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곳 대사제들의 힘에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은 힘없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천한 갈릴래아 어부 출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루살렘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 ‘가문’과 갈릴래아의 어부 ‘제자들’이 대결합니다. 신앙은 족보나 가문이 아니라 제자됨에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옥죄고 통제하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숨을 불어넣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선 속에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바칩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남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자들과 대비가 뚜렷합니다. 착한 목자는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인입니다. 현실의 ‘세상’이 만든 온갖 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 기운과 힘을 누립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이 부서지고 못난 돌을 버릴 때, 선하신 하느님, 착하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돌을 삶과 우주를 받치는 머릿돌로 회복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참 좋다’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표현하는 ‘착하고 선하다’는 말은 원래 같습니다. 그러니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를 되살려내는 일입니다. 부서진 것들이 회복되어 제자리에 놓여 서로 아름다운 관계, ‘샬롬’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확신이나 교리에서 나오지 않고,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들이 있는 그대로 모여 서로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려고 겸손하게 자신을 바치는 길에서 나옵니다.

부활의 신앙은 창조의 질서와 관계를 깨뜨리는 권력에 맞서고 강압의 틀에 도전합니다. 온전한 회복과 평화의 샬롬을 세우려고 ‘성령을 받아’ 용기 있게 나서는 자유입니다. 모든 부서진 상처들을 마음 아프게 모아서 아름다운 샬롬의 모자이크를 만드는 손길입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 할 ‘보기 좋은’ 신앙의 길, ‘선한’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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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26일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