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 역사의 눈물과 상처를 입고

Saturday, March 2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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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눈물과 상처를 입고1

‘“이제 기뻐하라, 하늘의 모든 천군 천사들이여, 이 세상의 만물들이여,
이제 즐거워하라, 이 신비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 감싸인 모든 이들이여.” (부활 찬송)

이 부활밤을 찾으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사십 일 사순절 여정을 걸어오신 여러분 참 애쓰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화해의 시간에 도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정의와 자유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사랑의 시간에 당도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었던 사순절 여정은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과 해방의 탈출을 감행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때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일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절제와 기도로 지켰던 사십일 여정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아가 추위와 싸우고 사방에서 덤비는 날짐승의 위협을 이겨내고, 홀로된 외로움의 고통을 이겨낸 사십일을 가리킵니다.

성서의 전통과 더불어 지난 사순절 여정은 오늘 밤 여기에 모인 우리 자신의 인생과 우리 가족의 역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역사를 비추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십일 전 성당에 모여 이마에 재를 받으며, 우리 자신의 운명을 되새겼습니다.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례는 어쩌면 얄밉게도 다른 종교들처럼 축복과 기복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합니다. 우리가 종내에 맞닥뜨려야 할 역사와 운명을 분명히 직시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 신앙은 비로소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의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청소년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며 깨달아갈 때이지만, 공부의 압박과 피로가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성숙과 성장을 저해할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청소년은 몸과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청년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동안 갈고 닦는 배움과 기능, 패기와 꿈이 펼쳐지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때가 많은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청년은 두려움 없이 세상을 어깨에 짊어질 꿈을 키워나갑니다.

중년의 세대는 자라나는 자녀들을 키우느라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퇴근하는 밤과 출근하는 새벽을 혼동할 정도로 일하면서도 다가오는 퇴직과 정년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서로 남편과 아내가 되어 토닥이며 격려하는 손길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곤히 자는 모습을 슬며시 들여다보며 피로를 잊습니다.

장년과 노년의 삶도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걱정과 손주들을 향한 기도의 땀방울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들은 그 인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삶의 마지막 장을 적어나갑니다.

이 모든 일은 질곡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도 겹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그 증인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우리는 광복과 해방을 맞았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리는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흘린 눈물과 땀방울은 흙과 먼지와 뒤섞여 건물을 올리는 벽돌이 되어 이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우리는 피와 땀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에서 흘린 피와 외국 땅의 사막과 탄광에서 흘린 땀으로 사회의 혈관을 마련했습니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려고 우리는 불의한 정치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만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스스로 대견해 합니다.

우리 사회는 광야를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듬뿍 받았노라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회를 세워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동행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부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목격하고 경험하는 삶은 우리가 광야 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오히려 더 모진 광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광야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의 시험에 걸려들어 지옥에 빠져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여 년간 타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좋지 않은 변화의 방향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돌아와서 이곳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나눈 2년 전 첫 설교의 시작은 생활고에 찌들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송파 세 모녀 이야기였습니다. 몇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304명의 꽃 같은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이라는 허망하고도 절망스러운 사건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눈물처럼 젖은 어린 딸과 아들의 시신을 퍼렇게 멍든 가슴에 품고 절규해야 했습니다. 그 절규의 눈물이 아직도 우리 거리와 가슴에 흥건합니다.

이때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헬’(hell)과 계급과 억압의 왕조 사회를 뜻하는 ‘조선’이라는 말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굳이 따져보면, ‘헬’은 종교적인 용어고, ‘조선’은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용어의 결합은 어제 성금요일에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과 겹칩니다. 이 사건은 종교 권력이었던 바리사이파와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정치권력자들인 헤로데와 빌라도는 모함과 불의를 알면서도 예수님의 처형을 인가했습니다. 정치권력자들은 군중의 소요 사태를 두려워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며 진실에 눈을 감았습니다. 불의한 지시를 내린 정치권력은 협잡하였습니다.

정치의 원론은 말합니다. 개인의 삶을 보호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살피는 기술이 정치입니다. 이 가치를 지키고 실행한다 하여 ‘보수’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보호와 보살핌의 ‘보수’는 날로 희미해지고, 헤로데와 빌라도가 ‘서로 다정하게’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불의가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제 눈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는 데 빠져들기 쉽습니다. 주위를 다 헤아려 보살피지 못합니다. 이때 종교는 우리 눈이 다른 이들을 살펴보도록, ‘나’ 자신보다 더 큰 세상과 가치를 바라보도록 새로운 창을 제공합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눈으로 찾아서 마음에 품으라고 말합니다. 눈앞에 있는 일만, 자기 몫의 떡만 바라보지 않고, 더 멀고 깊은 하느님의 시선을 우리 눈으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비판하고 수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은 사순절 내내, 눈을 달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치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멀쩡한 다리와 손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을 물리치시고, 절름발이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어 다른 이들을 보살피는 손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건강한 신체를 지니고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바쁜 사람을 외면하시고, 열두 해를 앓던 여인을 치유하시고 열두 살 밖에 안되어 죽은 소녀를 일으키셔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순절 여정은 이처럼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건이 우리 인간의 삶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삶의 처지를 잘 헤아리시는 주님은 우리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십니다.

성 목요일 저녁, 예수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2 이미 우리는 모두 세례의 은총 안에서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거룩한 신앙인도 여전히 세상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발을 더럽히고 상처 입습니다. 그 발은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 현실의 발을 어루만지며 씻어주는 일이 성목요일의 세족례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발이 더럽다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발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씻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주님의 명령대로 이제 우리가 다른 이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 그 상처를 싸매줘야 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이 세상을 이겨내는 힘을 얻도록 서로 용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 되는 몸이 교회이며, 이 일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계급사회 ‘조선’이 아니라, 새롭고 평등한 관계의 사회, 서로 섬기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라는 사명입니다.

성 금요일에 예수님은 자신을 모두 내어 주셨습니다. ‘나’ 혼자 잘 나서 이룬 성에 갇혀 지내지 말고, 그 성과와 지위마저 내려놓아 자유롭게 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치욕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내가 이룬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못 박으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를 거절하며, 완력과 폭력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서 손떼라는 처절한 당부였습니다. 그 당부마저 거절한 우리를 예수님은 비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침묵의 어둠과 부재의 슬픔에 휩싸여 우리가 웅크리고 있던 성 토요일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지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둡고 슬픈 곳으로 몸소 내려가셨습니다. 그 삶의 밑바닥에서, 그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지긋지긋한 지옥처럼 보이는 ‘헬’ 사회의 바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절망을 딛고 일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헬-조선’을 이겨내며, 부활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이 부활밤을 밝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여성들은 어떻게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을까요?

그들이 흘렸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그동안 세상 가치의 오물로 가려진 눈을 씻어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흥건하여 그들의 눈에 오목렌즈가 되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삶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이 휑 뚫린 상처를 지닌 탓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라도 품어 만지고 싶도록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의 상처가 예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뚫은 상처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상처에만 갇혀있지 않고, 예수님의 상처와 겹쳐진 자신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예수님의 상처를 포개어 세상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한 몸에 여전히 남아있던 상처 안에서 다른 이들의 상처를 발견하였고, 그 상처를 창으로 삼아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눈물과 상처를 통해서 여인들은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눈물보다는 두려움이, 상처보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남성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로 이 어둠을 뚫고 무덤을 찾았던 여성들이 부활의 증인과 새로운 사도로 일어섰습니다. 여성들이 전한 부활의 증언을 남성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두려움과 실패를 인정하고,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이가 신앙입니다.

오늘 이렇게 어둠과 두려움의 물속으로 뛰어들어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인의 눈물과 상처를 지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 환영합니다. 우리 자신도 세례 언약을 갱신하며 다시금 우리 삶에 있는 눈물과 절망과 상처를 되새깁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과 피로 마련한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여 변화하게 해달라고 청원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 몸속에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바쳐서 봉헌하시며, 우리의 삶을 봉헌하도록 이끄신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어 세상을 이기는 공동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어선 부활 생명입니다. 이 밤에 여러분은 이 부활 생명의 증인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 안에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모여 오늘밤 우리처럼 이렇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알리토스 아네스티”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26일 부활밤 전례 강론 []
  2. 성목요일 성유축복예식 직후 임종호 신부님과 대화에서 정리한 성찰 []

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Sunday, March 13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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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요한 12:1~8)1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이 향기로운 이야기는 다채로운 대비와 역전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권력과 재력의 셈이 빠른 ‘남성성’과 겸손하고 넉넉한 ‘여성성’이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차갑고 인색한 돈과 방안을 부드럽게 휘감는 향유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위에서 힘을 부리는 이들을 내려 앉히고,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을 올려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선명합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희랍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구약성서에서는 특별한 사람을 뽑아 왕과 예언자, 사제들을 세우며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정치적인 업적이 분명한 지도자를 ‘메시아’로 호칭하기도 합니다. 기름을 붓는 사람도 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입니다.

신약의 복음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구약의 왕이나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권력과 행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그런 지위에 있던 이들과 불편하게 대결합니다. 기름 붓는 장면도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사람은 당시에 신분 낮은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것도 일 년의 수고와 땀을 다 모아야 살 수 있는 분량의 기름을 아낌없이 부어드립니다. 한 생명을 어루만지고 감사하며 축하하려는 마음때문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그 향기는 자기 혼자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그 집에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향기의 시간과 공간에 감싸여 다른 이들과 서로 연결되고 함께 삶을 즐깁니다.

현장에 있던 ‘남성’ 제자 가리옷 유다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발에 부어버린 향유 값이면 가난한 사람을 여럿 도울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돈의 효율적인 사용에 관한 고민이 어쩌면 갸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런 즉각적인 해결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문화를 경계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우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제도의 성과에 집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오해와 다툼이 잦아지며 비난과 요구가 더 완고해지고는 합니다. 급기야 서로 멀리하고 피하는 ‘썩는 냄새’를 풍기는 일로도 번집니다.

오늘 향유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과월절을 앞둔 ‘만찬장’입니다. ‘썩는 냄새’가 나도록 부패한 라자로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 그 회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갖 수고와 땀으로 맺은 향기를 아낌없이 봉헌하는 성찬례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을 모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향기를 다른 이들의 머리와 얼굴, 손과 발에 넉넉하도록 듬뿍 부어 축복합니다. 우리 삶의 구원을 축하하는 성찬례에서 신앙인은 서로 섬기며, 이 세상의 메시아/그리스도로 일어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서로 기름 붓는 이들로 세워주고, 겸손하게 기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함께 축하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을 주님의 향기로 가득 채워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13일 사순 5주일 주보 []

빛을 비추라 – 봉헌하는 삶

Sunday, January 31s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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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비추라 – 봉헌하는 삶 (루가 2:22~40)1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며 부모 대의 하느님 신앙을 이으려는 뜻입니다. 또한, 빈궁한 살림에 마련한 작은 제물도 바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오염된 자신을 깨끗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첫째가는 봉헌은 우리 삶 자체입니다. 그 삶을 바치기로 다짐했다는 뜻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일부를 재물이나 봉사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세상의 종교는 종종 본래 뜻을 잃고 봉헌을 형식적인 제사로 이해하곤 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전 봉헌은 아기와 같은 새로운 세대와 그 생각, 미래를 향한 희망이 우리의 봉헌이어야 한다고 전합니다. 우리의 헌금과 봉사와 제물은 모두 이러한 생명과 희망에 바쳐져야 합니다.

봉헌의 현장인 성전은 새로운 만남의 공간입니다. 인생의 황혼이 되도록 세상의 구원을 신실하고 겸손하게 기다리던 ‘시므온’을 만납니다. 여성 예언자로 활동하다 홀로 궁핍해졌으나 깊은 신앙의 길을 걷던 ‘안나’를 만납니다. 나이 든 세대의 신앙이 새로운 세대의 신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인생의 어른은 겸손한 기도로 새로운 세대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분들입니다. 자기 시대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신앙이 바로 황혼의 원숙한 신앙이라고 시므온과 안나는 몸소 증언합니다.

시므온의 찬가는 주님 봉헌 사건의 절정입니다. 젊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고 신앙을 물려주는 일이 곧장 구원과 연결됩니다.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옛 종교가 아니라, 만민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신앙이 새롭게 펼쳐집니다. 이방인들과 낯선 사람들도 누리고 기뻐하는 구원이 열립니다. 이것이 신앙의 대를 잇는 방법이며 선교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걷는 사람들과 갓 태어난 아기의 만남이 새로운 역사를 엽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 동안 성전의 제대와 가정의 기도상을 밝히는 양초를 봉헌하고 축복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되어 우리 성전과 제대를 밝히듯이, 축복된 양초로 우리 가정의 기도상을 밝히라는 당부입니다. 여기서 교회와 가정에서 밝힌 불빛이 사회와 세상의 어둠에 번져갑니다.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펼치고 새로운 세대, 낯선 사람들과 손을 맞잡아 세상을 밝히는 봉헌이 신앙인의 도리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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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1월 31일 주의 봉헌 축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