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Sunday, July 5th, 2015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마르 6:1~13)1

얕은 지식이 더 깊은 배움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좁은 신앙체험이 더욱 너그럽고 풍요로운 신앙을 종종 방해합니다. 개인의 ‘고집 센’ 믿음이 공동체의 지혜롭고 넉넉한 삶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기 성숙과 공동체 성장에 큰 걸림돌인 태도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과 복음 이야기는 ‘고집’을 털고 경청하며 자기 체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로지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과 도전에 마음과 귀와 눈을 열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불러 아집으로 귀를 막은 이들 속으로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새 기운’은 예언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숨결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변화는 자기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자신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인 성령에 기댈 때라야 겨우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똑똑하고 체험 깊은 사도 바울로의 이상한 고백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운명이요, 중요한 교리일 수 있는 문제에 관하여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게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자랑하고, 자신의 깊은 지식과 강렬한 체험이 행여 ‘교만’으로 이어질까 봐 스스로 삼갑니다.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저주’로 보일 법한 자신의 고질병을 내세워, 이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역설과 신비가 펼쳐집니다. 약하고 모자란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이 역설의 절정입니다. 오래 알고 가까운 경험이 오히려 눈을 가립니다. 예수님의 진가를 못 보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마음마저 완고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알량한 지식과 체험과 전통이 본의 아니게 치유와 구원의 훼방꾼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 사태를 바로 식별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의 행색과 활동이 큰 대비를 이룹니다. 어떤 기득권도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에 기대어 악령을 내쫓는 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서라면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분명한 선교 이념과 자긍심이 있으면, 더 좋은 대접 받으려 이집 저집 기웃거릴 일이 없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경고는 냉혹합니다.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낯두껍고 고집 센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배움에 귀를 열고 낯선 이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치유와 구원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더 깊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공간이 되어 생명의 치유와 구원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경청하는 공동체가 치유의 기적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로 대화하며 도전하는 공동체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이룹니다. 환대와 치유가 구원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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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Vivian Maier, 1926~2009)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5일 연중14주일 주보 []

교회 – 먹이고 품는 생명 나무

Sunday, June 14th, 2015

교회 – 먹이고 품는 생명 나무 (마르 4:26~34)1

세상을 뒤덮은 푸른 생명의 색깔과 기운은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한껏 드러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그리스도교 신앙은 거룩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거룩한 생명을 온 창조세계가 만끽하고 즐기는 일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한결같이 열매를 맺어 생명을 먹이는 나무, 지친 생명이 깃들어 쉬는 넉넉한 그늘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비추며, 이 생명 나무의 열매와 그늘을 마련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전례력의 지혜에 따르면, 녹색절기를 ‘연중절기’라는 밋밋한 표현이 아니라 ‘성삼후’ 주간으로 표시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친교와 협력의 관계를 따라 우리는 녹색을 입고 생명을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친교와 협력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손수 심으신 푸른 나무와 같습니다. 신앙인은 우람한 송백나무로 자라나 세상의 온갖 생명이 깃들도록 너그럽게 품어 함께 사귀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뿌려져 아무도 모르게 자라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인간의 잣대로 헤아리는 계산 너머에 있으며, 누가 아무리 하느님 나라를 방해하더라도 열매는 맺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그 열매는 일꾼들의 땀과 수고로 낟알이 되어 사람을 먹이는 양식이 됩니다.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 살리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보일락말락 한 겨자씨가 자라나 새가 깃드는 큰 나무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 나라의 실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잘것없이 작은 씨앗과 커다란 나무의 대비가 돋보입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작다는 현실에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할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작아지셔서 작은 이들과 깊은 연민을 나누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작고 힘없는 이들이 오히려 세상 속 다른 작은 이들의 상처와 아픔, 번민과 희망을 더 잘 압니다. 세상에는 작은 이들이 훨씬 더 많으니, 이들과 더불어 커다란 나무를 키워나갈 수 있다는 꿈과 힘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작은 씨앗에서 솟아난 생명 나무 열매로 사람을 먹이고, 세상에서 지친 영혼을 쉬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제공하는 일꾼이며, 성당은 지친 아픈 세상을 품는 너른 공간입니다. ‘세속적인 표준’에 따라 계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힘에 기대어 먹이고 환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여”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기에, 세상의 낡은 잣대와 태도를 버리고 새롭고 거룩한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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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14일 연중11주일 주보 []

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Sunday, May 31st, 2015

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요한 3:1~17)1

“우리는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구원 잔치인 전례 때에 드리는 이 신앙고백과 찬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르나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삼위일체 신앙을 선언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정통 그리스도교와 빗나간 종파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성공회는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에 우뚝 서서 삼위일체를 본떠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성부 하느님은 창조의 땀방울과 숨으로 우리에게 녹아계십니다. 하느님은 여느 종교와 신화에 나타나는 신과는 달리, 손수 더러운 흙을 손에 묻히는 수고와 땀으로 인간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나뉘지 않고, 하느님의 형상을 따르고 거룩한 숨결(영)이 스며들어 우리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창조는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과 거룩한 숨결이 태초부터 한데 어우러진 세계입니다. 하느님이 깃든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정의로운 관계라 말합니다.

삼위일체 성자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창조 때 마련된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가 끊어지고 관계가 부서져서 인간은 저 멀리 떨어졌습니다. 하느님은 그 낮은 데로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 삶의 고난을 나누며 우리 손을 붙잡아 끌어올리십니다. 몸이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우리 몸에 새로 넣어주셔서 먹여 주셔서 창조 때의 새 생명이 우리 핏줄에 돌게 하십니다. 성자는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성령 하느님은 우리가 부활의 자유로운 생명을 살도록 거룩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서로 떨어져 서로 억압하고 싸우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새로운 몸과 생활로 거듭납니다. 성서가 전하듯이, 절대자 하느님과 인간의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서서히 줄어듭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의 관계로 가까워지고, 자녀의 관계로 친밀해지고 서로 벗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자유와 일치의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정의와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하나 되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부족한 대로 서로 환대하며 자리를 내어줍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한 친교에 참여하며 기뻐하고, 그 친교를 우리 몸으로 익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세상 안에서 살되, 이 세상이 꿈 꾸지 못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새로운 관계를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배우며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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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31일 성령강림대축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