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Sunday, October 25th, 2015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마르 10:46~52)1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변을 얻으려면 먼저 성서가 전하는 구원에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구원의 핵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일어나 새 힘을 얻는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구원은 신앙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나누는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사는 일이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정의로운 신앙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나 권력자들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고 절망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희망과 구원을 세우십니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안에 갇혀 절망과 눈물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불러내시어, 서로 섞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세상이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동체에서 구원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고통은 이제 구원을 꽃피우는 거름이 됩니다. 더 아프고 슬펐던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더 고생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더 큰 찬양을 바칩니다. 성서가 굳이 여러모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와 경험을 교회의 밑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사제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에 바빴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작은 이들과 함께 스스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더는 되풀이되지 않는 “단 한 번”으로 희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움켜잡을 때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뚫고 낯선 이처럼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때, 상처로 불구가 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자기 안위와 보호의 마지막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새로운 삶의 시선이 열립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과 기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사업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작은 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처럼, 낯설고 작은 사람들의 울음과 아픔을 둘러보며 바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슬픔을 건너고 낯선 이를 환대하며, 함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어 구원을 누리며 축하하는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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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25일 연중30주일 주보 []

환대의 신앙

Sunday, September 20th, 2015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환대의 신앙 (마르 9:30~37)1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원수를 갚아달라”고 애원했을까요? 삶이 이처럼 억울한 고통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도 같은 절규를 내지릅니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종교와 신을 찾는 일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울 때만 다급히 도움을 찾고, 좋은 것만 골라서 축복을 구하는 종교와 신을 ‘도구적 종교와 해결사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구와 해결사는 사람이 부려 쓰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힘주시고 고난 속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통념과 말재간으로 우리 신앙을 풀이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지혜와 지식을 굳이 구별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지혜는 연륜이요, 지식은 정보일 뿐이라며 차별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구분은 부질없습니다. 새로운 배움으로 연륜을 늘 새롭게 물갈이하지 않으면, 지혜도 고인 물처럼 썩습니다. 부질없는 구분보다는 지혜의 이중적인 성격,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살피는 것이 낫습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지혜이지만, 멋대로 가진 지혜는 ‘시기심과 야심으로 분란과 더러운 행실을 낳습니다.’ 그러나 ‘위와 밖에서 오는 지혜’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한결같은 순결함과 평화와 자비행으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즉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자신과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원수 갚는’ 방법은 끊임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도전과 씨름하고 대화할 때 나옵니다.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며 가까이 지낸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은 옛 질서와 고정관념, 과거의 유산과 지위가 끝낸다는 뜻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인 부활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과거에 묶여 자리다툼만 합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바깥에서 ‘어린이’를 불러들여 와 세우십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무력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지위는커녕, 특별한 보호와 배려가 없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낱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37절)에서 우리는 지극한 ‘환대의 신앙’을 발견합니다. 환대의 신앙은 하느님을 도구 삼아 자기만 좋은 축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멋대로 신앙과 지혜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환대의 신앙은 ‘위에서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열고, ‘밖에 있는 이웃’에게 귀를 열어, 하느님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껴안아 동행합니다. 힘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를 밖에서 초대하여 보살펴 키우며 동행할 때라야, 우리의 신앙, 우리 교회의 미래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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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주보 []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Sunday, August 30th, 2015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마르 7:1~8, 14~15, 21~23)1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라”(신명 4:9). 종교의 계율이든, 사회의 법률이든, 이 표현만큼 법의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 관계에 관한 통찰과 태도, 개인의 영성 생활에 두루 적용할 지침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모두 자기 뜻 안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도가 없더라도 이런 자기 중심성은 사람 관계를 왜곡하여 깨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떠나서 외로워지며, 다시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마음에 과하고 무례한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면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 자기 ‘밖에 있는 분’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귀 기울이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기 편의를 따르거나 이익을 바라는 조건으로 찾는 여느 종교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자기 체험에만 기대어 하느님을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익계산과 자기 체험을 내세우면, 늘 함께 계셔주려는 하느님을 쫓아내는 꼴입니다. 신앙의 규율과 율법의 목적은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방법을 세워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목적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인 율법이 사람을 옥죄고 억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삼가며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을 없애고, 사람이 만든 관습과 종교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합니다. ‘사람의 종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며 늘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습’은 배고픈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일에 관하여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넓고 깊게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만 간단하게 판단하려 듭니다. 자신이 걸어온 신앙 체험이나 사회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서 ‘공손함’이 희미해지고 무례함으로 혼탁해집니다.

이런 세태와 달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서서 늘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세우는 훈련이 참된 율법이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 사람을 억누르는 율법, 사회를 더럽히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걸을지, 자신을 위한 기복 종교에 안주할지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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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