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천사처럼 –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

Monday, September 29th, 2014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

1.
오늘은 대천사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여러 성인 축일을 없앤 종교개혁자들도 이 축일만은 남겨서 기념했습니다. 이 축일의 연대는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한 미카엘 천사의 이름을 딴 성당을 봉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의 성당에서 이 축일을 기념한 것이 9월 29일입니다. 이때 드린 본기도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는 약간 수정하여 성공회 기도서에 옮겨 놓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천사와 인간의 직분을 아름다운 질서로 세우셨습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의 자비를 베푸시어, 천사들이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듯이, 주님의 명에 따라, 이 세상에 사는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분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1

성서 희랍어에서는 천사를 ‘앙겔로스’라고 합니다. 영어 ‘angel’ 의 어원입니다. 사신(使臣: messenger)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느님의 메신저, 혹은 사신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천사는 인간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천사에게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경계를 넘나들며 신속하게 움직이는 활동, 무엇인가를 이뤄내는 강력한 힘, 그리고 모든 것을 밝혀 보여주는 빛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예술 작품을 보면, 천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등 뒤에는 날개를 달고, 손에는 칼을 들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날개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움직이는 것을 상징하고요, 칼은 그들이 지닌 엄청난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빛나는 모습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깨달음의 빛을 의미합니다.

성서에는 여러 천사가 나옵니다만, 네 분의 천사만 그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카엘, 가브리엘, 우리엘, 그리고 라파엘입니다. 오늘 축일 이름으로 맨 먼저 나오는 미카엘 천사는 하느님의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천사장입니다. 미카엘 천사는 하느님 백성을 위협하는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는 분입니다. 특별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죽음을 이기고 새 생명을 얻도록 힘을 주는 천사입니다.2

천사는 하늘에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 그 직분입니다. 땅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 그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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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미카엘, 13세기, 성 카타리나 수도원)

2.
우리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성서에서 자주 만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왔던 세 사람의 나그네는 알고 보니 하느님의 사신들, 하느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 떠도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천사들은 큰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불임이었던 사라가 자식을 낳으리라는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했고, 하느님의 축복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어 평생 장애인이 되었지만,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라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천사를 통해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시골 아가씨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려준 것도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분입니다.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무덤가에 찾아와서 슬피 울던 세 여인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준 이들도 바로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기쁜 소식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부활의 새 생명을 전해주는 분들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상에 인간으로 왔지만, 천사로 그려지는 한 분이 있습니다. 세례자 성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길을 준비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다가 세상의 권력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세례자 요한을 천사로 그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여러 이콘을 보면, 그는 날개를 단 천사입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을 전하는 메신저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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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성 요한, 16세기)
3.
올해는 우리 대한 성공회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지 124주년, 그리고 관구로 독립한 지 22주년 되는 해이며, 오늘은 그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대천사 미카엘은 우리 한국 성공회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모든 천사 이야기의 결론은 한결같습니다. 천사의 사명을 환대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자신이 천사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천사로 활동하는 선교 사명을 지녔다는 소명입니다.

교회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잇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질서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늘의 뜻을 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늘의 엄중한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와 정의의 칼을 가지고 세상의 잘못된 것을 베어내는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환부를 도려내는 칼을 지니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그늘을 환하게 비춰야 합니다. 그늘에서 억눌려 숨죽이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따스한 볕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깨달음을 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들로서 우리 모든 신앙인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천사의 선교 사명입니다.

  1. BCP 1549, cf. 성공회기도서 2004 []
  2. cf. TEC, Holy Women, Holy Men, Celebrating the Saints []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

Thursday, June 26th, 2014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0-42).

종종 편안하게 기대어 안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종교 경전에서 멋진 한 두 구절을 만나 마음을 위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거기다가 약속된 상까지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이런 사람 마음에 관하여 몹시도 단호한 선언을 던집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말씀 자체인 예수님의 삶과 그 도전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허투루 듣기 어렵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당부하시며, 그 선교 활동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를 염려하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그 당부와 염려와 격려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예언자와 옳은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그에 따른 보상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 신앙은 예수님을 환대하고,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환대하는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름 아니라, 예언자와 정의로운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환대하는 행동이 신앙이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과 교회가 참된 신앙의 공동체인지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현실의 교회 안에 예언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정의로운 사람이 발을 붙이고 있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환대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예언자로 살아가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작은 사람으로 겸손히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언자는 못 배웠거나 천한 신분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을 가진 사람들, 특히 종교와 정치의 여러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용기 있게 쓴소리를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대하기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교회는 썩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혼자서 이루는 옮음과 정의는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는 늘 공동체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공평한 대접과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를 에둘러서 정의를 말할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건물의 초석이 어긋나면 아무리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도 곧 위태로운 처지에 빠집니다. 교회는 이런 정의와 올바른 절차를 지키고 훈련하며, 교회 밖의 사회를 정의롭게 물들여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때라야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이방인, 재력과 지위가 딸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 대접에 고마워할 정도로 관심과 배려와 환대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찾으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친 신앙의 나그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환대하고 쉼터가 될 때라야, 교회는 참된 희망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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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이콘 – 삼위일체 –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우리 교회 안에서 이들을 환대하고 있나요? 이들은 우리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 괜히 풍파를 일으키는 얼치기라는 핀잔을 받고 있나요? 우리는 이처럼 예언자이고 정의롭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도대체 하느님에게서 어떤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1. 성공회신문 6월 28일치 []

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Thursday, June 6th, 2013

아침 침묵 중에 슬며시 떠오른 회고를 옮긴다. 사제로서 지난 십수 년 동안 다양한 공동체와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성서와 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주된 초점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고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해당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일 터이나, 나이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 초점은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2) “용서, 사랑, 환대의 가치와 실천”, 3) “측은지심의 공동체”로 나뉜다. 그러나 같은 성서와 복음을 읽고 살피며 기도하는 처지인지라, 시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이 초점들은 언제나 겹친다.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전통적인 수도공동체에 초대받아 함께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며 나누던 복음 해석의 렌즈였다. 그 수도회가 갓 서품받은 사제를 불러 채플린으로 삼은 이유라고 믿었기에 젊은 혈기에 상당한 객기를 부렸고, 수도자들답게 늘 너그럽게 들어주셨다. 고정관념을 이겨내자고 말했지만, 수도자들의 너그러움과 공동체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2. 용서/사랑/환대의 가치와 실천: 풍비박산이 난 공동체를 타국 타향에서 만나서 돌보는 일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공동체의 내력을 들춰보니 온갖 비난과 미움의 상처가 엿보였고, 사람이 떠난 텅 빈 쓸쓸함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처지에 복음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환대하는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가진 것 없이 남은 쓸쓸한 이들의 겸손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내 소리 내며 살기고 했고, 종내에 내력이 지닌 하릴없는 쓸쓸함에 나 자신이 짓눌리기도 했다.

3. 측은지심의 공동체: 복음을 들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이 특정한 형태의 정치-이념적 주장의 외피가 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20년 넘게 지켜봤고 성찰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거기서 얻은 배움은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측은지심의 공동체’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흐르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선을 얻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드는 탓일까? 이런 공동체를 ‘리버럴’ 사이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과 초점의 변화는 하느님의 이끄심이리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돌멩이처럼 여기까지 왔다. 다시 차여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내 의지로 하느님의 자유를 종종 거부하지 않았는지 돌아다 본다. 그 기도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얼굴과 표정이다.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다. 지금 스스로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은 이것뿐.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감동을 줬는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어루만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언제 적었듯이, 그림자 짙은 그늘이 많은 내 삶. 다만, 그 안에 수줍은 작은 꽃들이나마 품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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