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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Thursday, June 2nd,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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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세기 신비주의 영성 연구의 대가요, 현대 성공회 영성의 이정표인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의 70주기가 되는 해이자, 그의 책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이자, 현재는 미국 성공회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 쇼 신부가 영국 처치 타임스 지에 언더힐에 대한 짧은 글을 실었다. 짧은 글에 언더힐의 핵심적 면모를 뽑아 명료하게 정리했다. 그 글을 번역하여 아래에 싣는다.

옮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사실과 이글에서 눈여겨봤으면 하는 부분을 되새기려 한다. 언더힐은 그 당시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강연했던 ‘여성 평신도’였다. 그의 책 <<신비주의>>는 출간 후 3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다. 천주교에 관심을 뒀지만, 성공회를 몸담을 교회로 선택했고, 신학과 신앙에서 “성공회-가톨릭주의자”로 자처했다. 옮긴 글에서 지적했듯이, 초기 개인주의적 영성에서 공동체적인 영성과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고, 이로써 교회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겪었다. 또, 영성과 전례의 삶을 일상의 생활로 이으려 노력했다. 이런 각성의 변화 추이는 오늘 우리 교회에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성공회 전통과 그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언더힐의 궤적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제인 쇼

올해는 이블린 언더힐의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6월 15일은 그의 별세 70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재판을 거듭했다. 언더힐은 이 책에서 영성과 기도를 다룬 위대한 저자들의 작품을 검토한 뒤, 신비주의는 “살아 있는 절대자와 누리는 의식적인 연합”의 길이라고 했다. 이 책은 위대한 성과였다. 폭넓고 깊은 독서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더힐이 정리한 신비주의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언더힐은 머리만큼이나 가슴을 강조했다. 그것은 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열정’이다. 둘째, 그는 신비주의를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자신의 이웃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셋째, 그는 신비주의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이 신비주의의 길을 붙잡고 걸을 수 있다.

1914년, 언더힐은 길이가 훨씬 짧은 책을 냈다. <<실천적 신비주의: 보통사람을 위한 작은 안내서>>이다. 여기서 그는 신비주의란 과거의 도통한 비결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이나 경영을 배우듯이 신비주의도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독자는 ‘학습 과정 속에서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연습 과정에는 내적 고요와 감각의 정화를 위한 다섯 단계가 있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거룩한 존재와 만남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언더힐이 정의한 신비주의의 길은 매우 개인적인 노력으로 한정됐다. 당시 그는 이 연습 내용에 교회 생활을 넣지 않았다. 의아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언더힐은 신실한 성공회 신자로서 영적 지도자요, 탁월한 피정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쓸 때, 그는 어떤 교회에도 몸담지 않았었다.

언더힐의 영적 깨달음은 서른 살 때인 1904-05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후로도 17년 동안 어느 교회도 공식적으로 몸담지 않았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그는 천주교 전통에 눈을 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언더힐의 남편이 주저했고, 당시 모더니즘의 폭풍이 일면서 자신도 머뭇거렸다. 영국의 조오지 티렐을 비롯한 천주교의 여러 성직자가 비판적 성서 연구와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했던 것이다. 1911년 언더힐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여러 면에서 나는 ‘모더니스트’야. 천주교인이 된다면 여러 압력이 있을 테고, 그로부터 도피하거나 변명하며 살아야 할 거야. 그런 곳에 나 자신을 맡길 수는 없어.” 그는 미사에 참여했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신비주의>>를 출간한 지 10년이 지난 1921년, 언더힐은 마침내 성공회 신자가 됐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점차로 공동체적인 영성에 투신하게 되었다.

언더힐이 쓴 마지막 대작은 1936년의 <<예배>>이다. 여기서 그는 영적 발전에서 성사와 공동체적 의례가 지닌 힘을 강조했다. 그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인정했다. “나는 교회 문제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었다. 오랫동안 교회를 반대하는 편에 섰다. 내 큰 잘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란다.”

언더힐은 길을 찾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어느 교회에도 몸담지 않던 시절, 자신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더힐은 자신이 고민하고, 식별하며, 배우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탐구 과정을 다른 이들과 완전히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을 계속했다. 그는 쉽사리 “오직 하느님께로만” 치우치는 자신의 기질을 인정했다. 그래서 바론 폰 휘겔(언더힐의 영적 지도자)을 통해서 신앙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육신적 차원을 배웠다.

언더힐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실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또 정당한 전쟁론을 찬성했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1930년대에 들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언더힐은 탁월한 서신 교환자였다. 그의 편지에는 영적인 지혜와 더불어 상식적 감각과 재치로 넘쳤다. 수덕주의에 기울던 어떤 이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 자신의 사순절을 생각해 봅시다.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육체적인 고생을 사서 하지는 마세요… 잠을 줄이려고 하지 마세요. 추운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친절하도록 하세요.”

언더힐은 자라나던 피정 운동의 지도자로서 성공회에 또 다른 공헌을 했다. 그가 적은 대로, 1913년에 영국 성공회에는 피정집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는 교구 소속으로 22개의 피정집이, 수도회 소속으로 30개 피정집이 운영되고 있었다. 언더힐은 이 운동의 성장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피정집은 에식스의 플레시 피정집이었다.

그의 글은 재치가 넘쳤다. 성직자 부인 100여 명을 피정 인도한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아무도 성당에서 미사가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미사를 시작하는 종이 울렸을 때 나는 욕실에 있었다. 머리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성당에 다다랐을 때는 복음 독서가 끝난 뒤였다. 그날은 침묵 기간이었는데도 누구도 지키지 않았다… 뭐, 그래서 열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그 곰팡내 나는 교회에서 같이 머물렀지. 그리고 점심으로는 햄 샌드위치를 먹었다. 금요일이었지만.”

실천적이고 신비적이었으며, 열심히 탐구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블린 언더힐. 그는 영적 여정에 있는 모든 구도자들과 신실한 성공회 신자들에게 멘토로 남아 있다.

원문: Jane Shaw, http://goo.gl/3J4h3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유상신 신부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역주: 글쓴이에 대해서 몇 자 적는다. 1965년생인 제인 쇼 신부(The Very Rev. Dr. Jane Shaw)는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요, 역사신학자이다. 현재는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의 주임 사제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직 과정과 신학 공부를 하고, 미국 UC 버클리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29세 나이에 Ph.D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중세 교회사 안에서 잊힌 여성 역사의 재건.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뉴칼리지 신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지금까지 영국 성공회 주교원 신학 자문위원이다. 2010년 11월부터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 주임 사제로 일하고 있다.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Wednesday, May 18th, 2011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그 종교인들도 역시 종교가 허약한 진통제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임을 알았다. 적어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시작했던 모리스 신부(F.D. Maurice)와 킹슬리 신부(Charles Kingsley)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인 실체가 현실을 비추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고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가르침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은 잘 알려진 적대적 관계만큼이나, 그 친연성이 늘 큰 관심 주제였다. 지성사적인 근원과 근친 관계는 제쳐 놓더라도, 이 둘이 맺은 역사적 관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근대 서방 교회의 여러 개혁은 대체로 세를 넓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시작되곤 했지만, 실천 속에서 그 관심과 결과는 두 운동이 비슷했다. 천주교의 소위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교회의 변화와 대응의 촉구였다. 그 사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던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분인 안병무는 새로운 신학적 임무의 하나로 ‘반-공산주의’를 삼았다. 그러나 이후에 민중신학은 늘 ‘용공’ 신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당시 맥락화한 마르크시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학에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운동이요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마르크시즘에 관심했던 데 비해, 현실과 이념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대적이었다. 그 주창자와 이후 큼직한 추종자들이 만든 ‘아편’ 규정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모른다. 이런 처지에 요즘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를 제공하는 것은 격세지감이겠다. 학계의 마르크스 연구와 실천 현장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많고, 이른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이론을 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 논의와 관심의 방향에서 본다면, ‘진보적’ 신학 담론의 방향은 이제 교회 전통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른바 80년대 이후로 짓눌러온 ‘과학적 방법론’에 눌린 무의식의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테리 이글턴이 낸 최근작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의 발췌를 번역해서 올렸거니와, 이 책에 대해서 한 ‘리버럴’ 그리스도인이 쓴 서평을 소개하여 짝을 맞추려 한다. 서평자인 테오 홉슨은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 제목은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서평도 이미 쓴 바 있다. 이 글들과 아울러 몇 년 전 고종석이 쓴 글도 읽어보면 좋겠다. 아래에 그 목록과 링크, 그리고 새 서평을 아래에 남긴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 학자들의 아편? – 자신의 신앙과 씨름하는 테리 이글턴

테오 홉슨

대체로, 주장을 담은 책은 꽤 직설적이다. 저자란 그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에 펴낸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교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다. 최근작,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늘 지지했던 마르크시즘이라는 신조를 변호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열 개의 관습적인 반대 목록에 따라 이뤄져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더는 적절하지 않다, 폭력적이다, 경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불가능한 완결주의다, 정체성의 정치를 무시한다 등등. 인상적인 활력과 G. K. 체스터튼 풍의 익살을 이용하며, 이글턴은 이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전체로 보면, 그는 무비판적인 신봉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펼치는 주장이 좀 더 분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합리적인 마르크시스트인 것을 보여주려고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룬 것은 옳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 하나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즉 공산주의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2장, 즉 마르크시스트 혁명은 늘 불행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장에서 직면하는 문제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우리는 20세기 공산주의는 여러 조건이 완전히 잘못돼서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이렇게도 경고했다, 일국 혁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글턴은 여전히 마르크시즘이 ‘적절한’ 조건들에서 작동할 수 있고, 어떤 형태의 혁명(그가 말하는 대로 유혈 혁명일 필요가 없는)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고, 확실히 나은 정치적인 질서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자유 정치적 제도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까? 혁명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도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글턴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에 모호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텐가. 그건 변명이 안 된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이런 모호성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봤다.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자신의 중심 임무를 슬쩍 피해 가려 한다. 그 혁명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임무 말이다. 왜 그걸까? 그 자신이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혁명의 실제 가능성을 그가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다면, 왜 이글턴은 마르크시즘을 변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글턴이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진정한 비판적 관점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는 말은 너무 약하고, 너무 차갑다. 마르크시즘은 열정 어린 비판적 입장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 말고, 다른 이념들은 불평등이 만드는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 이 관습적인 생각은 근본주의적 자유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을 통제해서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부(富)가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긴박성과 열정이 부족하다. 기존 질서가 점차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두고 죄책감과 낭패감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관습적인 생각은 운명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수반한다. 결국, 운 좋은 계급이 있어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고, 운이 좋지 않은 다수는 불안정과 실업, 하급 문화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제적 처지가 만들어내는 인종 분리를 받아들인다.

오직 마르크시즘만이 이 운명론을 거부할 수 있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이글턴을 마르크시스트로 남게 하는 것이다. 온정주의적 운명론에 대한 이런 반대와 완전히 다른 질서에 대한 요구를 그는 높이 존중한다. 그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집착한다. 물론 여기서 신앙적인 도약이 따르기도 하는데(혁명은 가능하다!),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부정적(negative)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릴 수 있겠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덜한 것 같다. (후자를 믿는다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믿고 있는 바는 급진적으로 다른 질서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는 일이며, 기존 질서에 대해 반대하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이글턴이 손에 든 마르크시즘은 정확히 과학도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정치적 삶에 대한, 끝내 보편화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전망이요, 응시요, 담론이다.

이글턴도 잘 알다시피(그의 지적 뿌리는 해방신학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강한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기는 경계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안에 어떤 영성적인, 혹은 [초월적] ‘타-세계적’인 면이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들(parsons)이 생각하는, 그런 타-세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에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계이다.”

‘파슨스’(성직자들)라는 낡은 용어에는 어떤 기이함이 감춰져 있다. 이글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과 종교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앞으로 쓸 책에서 이 점을 좀 더 공개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원제: Theo Hobson, “Marxism, the Opium of the Professoriate?”
출처: http://goo.gl/k6DkT
번역: 주낙현 신부

역사와 성찬례 – 죽음의 권력과 생명의 힘 사이

Wednesday, May 11th, 2011

종교개혁은 간단히 말해서 두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16세기에는 평화기가 10년이 채 안 됐고, 17세기 중반까지 고작 2-3년이 평화기였다… 종교개혁은 이미 자라나고 있던 국가라는 권력 기계를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의 옷을 입혀 그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개신교 종교개혁과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이어진 전쟁 속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교회사학자 디어메드 맥컬로흐가 그의 저작 <<종교개혁>> 막바지에서 종교개혁기의 사회적 갈등에 관하여 내린 평가 한 부분이다. 거의 두 세기에 걸친 무참한 희생을 겪고 나서야 유럽은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지혜에 다다랐다.

‘교리’를 내세운 진리 소유 여부로 복잡다단한 삶의 결을 잘라내려는 무모함이 늘 문제였다.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의 한 장을 덮으려 할 때, 그 무모함이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함부로 누구를 발길질하고 억누르고 목숨을 빼앗는 소식을 듣는다. 강제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역사를 마주한 여러 시선에서 나온 그림과 사진을 본다. 특히 성찬례는 이 진리를 둘러싼 갈등 한가운데 있기 일쑤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전례인 성찬례가 어찌하여 그 죽음에만 집착해 있었을까?

이단자 화형 Burning of a Heretic – Sassetta (약 1430-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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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제대에서는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다. 축성된 성체 거양의 순간이다. 중세 성찬례 신학의 절정이다. 신앙은 거양된 성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단자’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발밑에서 불이 붙었건만 그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 아래서 얼굴 없는 이는 죽음을 지핀다.

죽음을 끝장내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선사하는 성찬례가 교리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진리 판정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타인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중세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기 내내 지속한 일이다.

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 Caravaggio
(약 159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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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이자 복음서 기자로 알려진 성 마태오의 최후를 그린 그림이다. 그는 성찬례를 집전하는 도중에 에티오피아 왕의 명령으로 살해 당한다. 제대 앞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진 마태오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고, 곁에서 복사를 서던 아이의 입은 그 광경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살인자는 천사를 향한 마태오의 간절한 손은 저지하고, 그 오른손은 이제 마지막 철퇴를 준비하고 있다. 화가는 십 수세기를 넘어 그 사건을 당대의 미사 장면으로 재현했다. 그 안에서 카라바지오 자신은 멀리서 그 참혹한 장면을 무심하게 목격한다.

화가의 목격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그림(Sassetta)에 비추면, 두 제대(altar)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나는 권력자들이 소유한 제대이며 죽임을 행사하는 힘의 제대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사제와 어린 복사가 모인 조촐하고 힘 없는 제대이다. 카라바지오는 이단 화형의 중심이 되었던 제대를,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의 제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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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의 “성 마태오의 순교”는 1980년 봄에 있었던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겹친다. 16/7세기라는 당대의 눈으로 1세기 순교 현장을 돌아봤던 화가는 현대에 살아 카메라 렌즈로 로메로의 죽음을 잡아내는 것일까. 화가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할까?

엠마오 만찬 Supper at Emmaus – Caravaggio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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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대속'(atonement)으로 보면서, 죽음 자체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를 의식이나 한 듯, 카라바지오는 이제 성찬례를 친히 세우신 예수를 그려낸다. 이 성찬례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엠마오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와 나눈 식사이다. 죽음이 아닌, 부활의 생명이 더욱 선연하다. 낯선 나그네를 만나 허물 없이 대화하고, 한사코 묵고 가라고 초대해서 마련된 식사이다. 이 대화와 초대가 마련한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깨달음으로 놀란다. 그 식탁은 기름지고 풍성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손은 캔버스를 튀어나와 우리에게 닿으려 한다.

오늘 성찬례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