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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 데이빗 브라운

Wednesday, March 30th, 2011

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데이빗 브라운

이 책은 전통의 역할에 관한 두 권의 책 가운데 둘째 권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주제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주제는 ‘제자도’이다. 첫째 권인 <<전통과 상상력>>에서는 좀 더 너른 캔버스에서 작업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타 종교의 중요성, 고전 세계에서 신화의 역할, 그리고 계시에 대한 변화된 생각을 두고 진행되는 현재의 논점을 통해서, 성서와 이후 교회 역사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제안했다. 이를 서로 대립시키기보다는, 계속 전개되는 전통을 성서와 역사라는 엔진을 돌리는 동력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교회를 변화하는 사회의 조건들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가능태로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계시의 통찰은 절대로 정경의 체계에 제한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이후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동등하게 말씀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진보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후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교회가 때로는 똑같이 오류를 드러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 나온 것들에 대한 좀 더 효과적인 비판을 성서 시대의 통찰에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여기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다른 수많은 신학자의 작업이 이미 능숙하게 다룬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함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계속 전개되는 전통이야말로 그 성서적인 기원을 보완하고, 심지어는 ‘교정’하기도 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역사적 계시를 주장하는 까닭에, 어느 역사적 과거에 확고하게 근거한 것만을 바르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할 유혹에 빠진다. 그 역사적 계시는 원래의 관점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책과 이전의 책에서는 열려 있는 궤적들을 논점으로 삼는다. 그 궤적들은 전통에서 나왔으며, 전통의 함의를 새롭게 읽도록 하며 그 전통에 기대어 다시 돌아오는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전통과 상상력>>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사례를 들어 제공했다. 그 사례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앙의 조상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이야기, 또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자기 이해 안에서 변화를 겪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우리의 초점은 약간 다를 것이다. 교리 문제도 종종 다루겠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은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실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의 첫 장은 문제에 집중하려는 방편으로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변화된 태도들을 살핀다. 그리스도를 인간이자 주님으로 연결하는 것이 오직 신약성서를 통해서만 매개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한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주장의 확증을 찾는다. 성인 숭배의 등장을 설명하고 최근 소설이 제공한 사례를 들 것이다. 3장에서는 이러한 발견이 제자도의 사회적 차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이루는 성인과의 상통을 그저 부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개념 틀, 즉 좀 더 정확히 의미로, 인간의 제자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1부에서 제자도가 한 공동체 안에서 모방과 관계로서 구성된다는 전반적 구조를 다룬다면, 2부는 몇 세기를 걸쳐서 일어났던 고통과 가족과 성에 관한 태도의 변화를 다룬다. 그 변화의 두 가지 형태는 각각 욥기와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통해서 매개되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나는 교회가 그 (역사적) 전개의 다양한 마디에서 일어난 것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러므로 내 주장은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늘 처음이라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똑같이 주장한다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판단은 물론 권위와 진리에 관한 중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후자 문제의 적합성이 이 책을 전반에서 논의되지만, 이 두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3부에 있다. 3장은 천상에 있는 공동체의 일치에 대해서 다룬다. 6장은 교회의 지금 현실을 다룬다.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그 갈등은 공동체의 자기 이해 성숙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정통의 성장에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된 인식이 여전히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 하더라도, 어떤 문제를 완전히 해결되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모든 신앙적 진리를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겠고, 어떤 점에서 분명히 그러하기도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혹은 역사적 진실이 밝히는 내용보다 더 그럴 수 있겠는가. 진리의 방식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는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특별히 진리가 비역사적이고 허구적인 것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처음에는 허구적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성인들의 삶은 계속되는 상상력이 관여하여 다시 쓰이고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혹이 있다. 이후에 나온 판본은 그 어떤 실제 사실과 일대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들은 열등한 형태로만 그 진리를 매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때로 허구적 이야기가 더욱 심대하고 의미 있는 진리를 체화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전통은 거룩한 실재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전유를 우리 자신의 제자도 안에서 붙잡게 하며, 그 지속되는 전통을 가장 잘 보전하는 힘은 상상력이다.

책 마지막에 참고문헌은 달지 않았다. 대신에 각 장에서 특정한 저술이 처음 언급될 때 그에 대한 세부 서지 사항을 찾을 수 있다.

* David Brown, Discipleship and Imagination (OUP, 2000)

전통과 상상력: 서장 – 데이빗 브라운

Wednesday, March 30th, 2011

전통과 상상력: 서장

데이빗 브라운

두 권 가운데 이 첫 권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전통의 역할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두 권 모두 서로 따로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 물론 두 권 모두를 볼 때라야 계획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전통이 성서와 그 너머에 있는 계시를 지켜내는 동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은 그저 이차적인 것이나 반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적 계시와 그 이후의 전통을 대립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에 이 둘을 포괄하여 계속되는 과정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봐야 한다. 이 주장을 세우려면 뒤따를 내용에서 성서적 통찰에 대한 제한을 많이 두어야 한다. 이 말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밝히건대, 그 작업은 성서를 얕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성서가 감당할 수 없는 짐에서 성서를 구해내자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느님께서 그 최대치의 진정성으로 특수한 문화적 맥락이라는 제한을 받아들이셨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서에 항상 그 계시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현대 교회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관점들을 가정한다면, 이야말로 계시를 냉대하는 것이 된다. 대신 우리는 어떻게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역사에 끊임없이 관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 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다. 뒤따를 내용에서 이후의 전개를 정당화하는 수많은 논쟁을 제공하겠고, 성서적 관점들에 대한 ‘교정’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이는 앞선 성서적 전통과, 이후에 등장한 것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는 그 힘을 부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라도 지적하는 까닭은 책의 내용에서 그런 점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별로 익숙하지 않은 논점, 즉 지속적인 전개의 필요라는 진리에 대하여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말은 이 책과 그 자매편인 <<제자도와 상상력>>(Discipleship and Imagination)에도 등장한다. 이는 내가 교리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교리적 문제들은 종교적 믿음에 그 형태와 활력을 제공한 이야기와 표상들에 대해 이차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표상들의 형태는 변한다. 이는 현존하는 의사소통의 가정들, 새로운 문화적 맥락들, 그리고 하느님의 계속되는 활동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아주 잘못되어 갈 것이다. 성서 본문의 의미에 대한 현재의 이해를 만든 역사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고, 매개 없이 성서 본문과 대화하겠다고 시도한다면 말이다. 둘째 권은 두 가지 문제에 천착하다. 첫째, 관여한 독자 – 제자 – 가 어떤 차이들을 만들어 내는가? 둘째, 이러한 제자도가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권위에 관한 문제들과 제자도에 대한 좀 더 개인적인 물음을 생각하는 독자라면 둘째 권을 살펴야 한다.

한편, 이 책에서는 논쟁의 일반 구도를 세우는 데 관심을 둔다. 뒤따를 토론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현대 세계의 세 가지 주요 양상들과 관련하여 내 논점의 맥락을 설명한다. 그 양상은 이렇다.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현재 논쟁, 2) 그 결과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와 종교 간 대화에 관한 경쟁적 주장들, 3) 그리스도교의 역설, 즉 많은 곳에서 특히 지극히 매력적인 부분(성탄절 축하 행사)에서 신학자와 설교자가 가장 당황스러워하며 발견하는 풍부한 상상의 세부 결과로 드러나는 역설. 그다음 2부에서는 고대 세계에서 종교 전통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핀다. “움직이는 텍스트”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 발생한 변화를 드러내 준다. 어떤 이들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아우르는 신앙 조상의 이야기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리스 종교 전통과 나란히 놓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한 독자에게는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이 비교는 양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는 것이지, 성서 이야기의 가치를 손상하려는 것이 아니다. 3부는 특별히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 개인에 대한 전유가 그 앞 장에서 보여준 유형에 어떻게 정확히 대응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성육신 교리를 훼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은 그 교리의 진실성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인간성과의 가장 위대한 그 접촉에서조차,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특정한 문화와 그 문화의 가정들에 제한시키셨으며, 그리스도가 이후의 계속되는 시대를 통하여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도록 지속적인 전개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한 장을 시각 예술에 할애했다. 두 권의 책에 시각적,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자료가 거듭 나올 것이다. 이 상상력은 종교적 믿음이 살아서 발전하는 동력에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다.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신앙이나 신앙이 없는 이들과 같이 다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여기서 제공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즉 그 성서적 뿌리와 그 이후에 나온 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화된 이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배척하고 싶겠지만, 실제로 펼쳐지는 전통의 작동 방식과, 특별히 상상력에 대하여 내가 적용한 핵심적 역할과 관련한 주장들에 대해서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책 마지막에 참고문헌은 달지 않았다. 대신에 각 장에서 특정한 저술이 처음 언급될 때 그에 대한 세부 서지 사항을 찾을 수 있다.

* David Brown, Tradition and Imagination (OUP, 1999)

전통의 의미 – 이브 콩가르 O.P.

Monday, March 28th, 2011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종교개혁이라는 사고 틀 안에서만 ‘전통’을 본다. 이때 전통은 16세기 당시 서방교회가 물려받은 중세의 관습과 동일시되기 일쑤다. 그로부터 5백 년이 흘렀지만 이런 틀거리는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아마도 스스로 종교개혁의 적자라고 생각했던 청교도의 열광이 미국을 거치며 더욱 배타적으로 강화되고 한국의 식민지적 선교 환경과 그 유산 안에서 더욱 말라비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보수파는 그렇다 치고라도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5백 년 동안 서방교회의 유산 아래서 천주교와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몇몇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만 되뇌고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이른바 교회 일치 대화가 무르익으며 서방교회 내의 유산은 물론, 그동안 살피지도 않았던 동방교회의 여러 전통에서도 배우며 신학과 신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게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의 혁명적 사건을 인정하더라도, 당연히 그 한계도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교개혁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20세기의 여러 신학적 반성과 운동은 ‘16세기 서구 맥락과 틀’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가운데 다시 떠오르는 주제는 ‘전통’에 대한 이해였다.

전통에 대한 이해는 역사와 삶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신앙의 연속과 단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역동성이 상실되는 순간 전통과 전통주의가 나뉜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야로슬로프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예고 없던 트윗 대화 (@prayandwork & @viamedia) 끝에 이 전통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폴 틸리히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공교회)는 서기 300년경에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교회의) 첫 몇 세기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톨릭적(이중적 의미) 양상들은 아주 초기에 이미 강력했다. 이는 성공회의 ‘중도’(via media)라는 것도 교회들의 분열에는 이상적인 해결책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작동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이른바 첫 5세기에 마련된 합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의 원칙들과 합의와는 다르다… 첫 5세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한 교리, 권위의 체계, 성사에 대한 이론 등이다. (영역본에서 재번역. 괄호는 옮긴이)

이 부분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온 (가톨릭) 전통을 무시한 채로, (프로테스탄트) 원칙만으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이 설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반대도 말이 된다. 그 참에 20세기 천주교 내의 신학적 개혁, 특히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프랑스 신학자요 도미니칸 사제인 이브 콩가르(1904-1995)의 글을 되새긴다. 그에 대한 우리말 번역 작업은 인색하다.

그의 역작 [전통과 전통들]의 요약판이요 대중판으로 불리는 [전통의 의미](영역본)의 서문을 옮겨 놓는다.

이브 콩가르 O.P. [전통의 의미] 서문

성공회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1956년 성공회와 정교회의 신학 대화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전통과 전통이 성서와 맺는 관계에 관한 토론이 있었는데, 러시아어 통역자는 이 전통이라는 교회 전문 용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통을 그냥 “옛날 관습”이라고 번역하더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 아마도 이 짧은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러시아어 통역자와 비슷하게 전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전통이 별 비판 없이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존중받고 받아들여진 관습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늘 그대로인 것일 뿐만 아니라 “늘 그렇게 행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전통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 사회에서 전통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위험해 보이는 새로운 시도를 막는 장치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제안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전통은 변화를 막기 위해 쓰이는 낱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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