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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한 기도 요청”

Tuesday, March 10th, 2009

일전에 교회에서 내는 최소한의 성명서에 대해 운운했는데, 때마침 이메일로 “기도 요청”을 호소하는 글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 교회가 냈던 여느 성명서들과는 다른 시각과 맛과 호소력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언급하면서도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거니와, 단문들에, 넘치지 않는 은유와 수사가 적절해 보인다.

참으로 다행이라 보는 건, 남북 화해에 대한 응시가 예전의 낭만적인 통일 운동의 시각을 많이 벗어났다는 인상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화해의 문제가 여전히 큰 화두다. 남과 북이 한 혈육이요, 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은 이 통일지상주의의 “뒷구녕”에서 남과 북은 독재를 일삼았다. 압제자는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정치의 거름으로 삼으니, 최근의 남북 대결 양상은 양쪽에 있는 두 사회가 한줌 밖에 안되는 지배 세력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뻔한 책략에서 비롯했다. (이런 점에서 반목과 질시를 에너지로 삼아 분열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의 화해는 더이상 어떤 압제의 핑계를 만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요 출발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이 화해의 문제는 우리 “남한” 사회, 그리고 우리 교계 안에 더 큰 화두로 남아 있다.)

스스로 참회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며, 좀더 너그러운 신앙과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자는 주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생각을 깊이하자는 이 호소는 아직 성글지만, 이 사순절에 참 반가운 격문이다.

그런데, 이 격문을 어디에다 붙였나? 유통의 방법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성직자들에게만 이메일 “한방”으로 던지고는 말았다. 교회 주보에 싣든지, 웹사이트에 싣든지, 아니면 미사 때마다 드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의 형식을 빌도록, 좀 친절했었으면 싶다. 고마운 마음에 던지는 투정이다.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안 좋아서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했는데, 그게 좋아질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맘몬적 경제 논리로만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 보니, 그것과 맞물려 있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 주권 재민의 문제, 생존권, 역사, 교육, 인권, 언론의 문제, 공정성, 국가폭력, 생명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개발독재의 야만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야만의 잔재들을 문신으로 새긴 천박한 폭력적 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개발독재의 망령이 국토 개조란 허망한 이름으로 이 강토와 생명을 향해 폭행을 가하고 있습니다. 맘몬에게 얼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와 생명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는 멀어지고 갈등이 깊어갑니다. 한때 개선되었던 남북관계가 대결 상황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암울했던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일그러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생애 처음 광야에서 맘몬의 손짓을 물리친 서른 살 청년 예수를 생각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교회)는 그 맘몬의 손짓을 현실론과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의 삶의 자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맘몬이 던져놓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현실론의 올가미에 걸려들자마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뒷전으로 밀쳐놓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원죄이며, 우리(교회)가 안고 가야 할 시대의 고통입니다.

맘몬주의가 세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곧바로 평화의 문제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평화가 한없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었던 화해의 분위기가 와해되는 상황을 목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를 위해 부르셨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도의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지금까지의 죄책에 대한 고백과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 자유의 근본적인 가치를 불편해 했던 이기심과 안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에 기초한 맘몬주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먼저 남쪽 내부에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화해 이전에 남쪽 내부에 오래도록 얽힌 증오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남쪽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귀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생각의 차이를 담아 들을 수 있는 신학, 신앙적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편향도 담아내는 큰 그릇(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넷째, 생명의 문제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상에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2009년 3월 10일

TOPIK

대한성공회 평화통일선교특별위원회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Wednesday, February 25th, 2009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V

잃은 말을 잃고, 써버린 말을 써버렸다면,

들려지지 않은, 말해지지 않은

말씀은 말해지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말, 들려지지 않은 말씀은,

한마디 없는 말씀, 그 말씀은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위해 있으니;

그리고 빛은 어둠 안에서 비췄고

말씀에 대역하여 불안한 세계는 여전히 흘렀으니

침묵하는 말씀의 언저리를 돌아.

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느냐.

어디서 말씀을 찾을 것이며, 어디서 말씀이

다시 들려질까? 여기는 아니리, 충분한 침묵이 없으니

바다도 섬도 아니리, 아니리

육지도, 사막도, 습지도,

낮 시간과 밤 시간에 함께 깃든

어둠 속을 걷는 이들에게

여기는 옳은 시간도 옳은 공간도 아니니

은총의 공간은 없으리, 그 얼굴을 피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의 시간은 없으리, 소음 속에서 걸으며 그 목소리를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베일을 쓴 여인은 기도할까,

어둠 속에 걷는 이들을 위하여, 그대를 선택했으나, 그대를 적대하는,

계절과 계절,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며 찢겨진 이들을 위하여,

순간과 순간, 말과 말, 힘과 힘 사이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위하여

어둠 속에서? 베일을 쓴 여인은 기도할까

입구에 서 있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떠나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는:

선택했으나 적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느냐.

베일을 쓴 여인은 연약한

주목(朱木) 사이에서 그녀에게 상처입힌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까

그리고 무서움에 떨며, 항복할 수 없는

그리고 세상 앞에서 우겨대며, 바위 사이에서 부인하며

마지막 사막에서 마지막 푸른 바위 앞에서

말라버린 정원의 사막 사막의 정원

말라버린 사과씨를 입 밖으로 내뱉는 이들을 위하여.

아, 내 백성들아.

(번역: 주낙현 신부)

이미지와 이콘 사이에서 –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3

Monday, February 23rd, 2009

이미지와 이콘에 대한 생각과, 우리 교회의 허명(虛名)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든다.

1.
한동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가? 2mb도 어떤 성공 신화와 삽질하는 이미지때문에 당선됐나 하는 생각이지만,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 삽질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만큼 자기 편한대로 조작가능한게 이미지다. 이게 앞에 언급한 천주교에도, 우리 성공회에도 해당이 되지 않나? 문제는 이미지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요즘 이미지는 위선과 동의어로 들린다.

2.
이미지와 말뜻이 같은 다른 말로 “이콘”(icon)이 있다. 특히 정교회 전통의 신학적 영성적 그림을 말하는데 쓰일 때다. 이때 이콘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성사(sacrament)와 그 정의가 가깝다. 감춰져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의 신비는 감춰져 있는데, 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이미지)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를 감상하려면 색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먼저 기이하고 불편한 상을 깊이 응시하여, 그것이 내게 말걸고 도전하는 것을 음미하는 일이다.

Rublev's_saviour.jpg

진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이콘이 우리 지각을 불편하게 할 것은 당연한다. 반면에 “이미지 정치”는 우리를 낭만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어떤 환상을 비춘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감추인 것은 무엇인가?

5.
남들 탓하자고 일련의 글을 올린 게 아니다.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질문은 대뜸 이렇다. “그럼 우리 (혹은 ‘느네’) 성공회는?”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들 한다. 가난하고 청렴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고,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의 삶을 생각하면 속 상해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그러나 더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작으니, 청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속에 여전히 “중산층 욕망”이 가득한데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에서 비판의 우위에 선 것뿐은 아닐까 하고. 그게 혹 허상은 아닐까? 허명은 아닐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성명서라도 내고 있는데, 그나마 그 입에 발린 말도 성공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우리 성공회의 정의평화사제단(예전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이었다)은 어디에 이름을 팔아 먹었는지, 그 안에서 애쓰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모르겠다. 천주교 주교회의의 성명서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신학적 반성의 언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어떤 신앙적 실천의 면모가 성공회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걸핏하면 87년도 6.10 항쟁의 구심에 성공회가 있었네 하고 짐짓 추억한다. [유월민주항쟁 진원지]라는 돌덩이 하나 구석에 박아두고 ‘왕년에 이랬네’하는 것인가? 왕년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왕년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없다. 그 왕년을 이야기한다 쳐도, 전체로서 교회가, 우리 성공회가 유월 민주화 항쟁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가? 아니, 그때 열심히 참여했던 이들을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 허명을 팔지는 말 일이다. 그 허명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치욕과 굴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울 수 있다. 불편함을 대면할 때라야, 그저 보이는 것 너머로 감춰진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