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투명한 성찰” 잡감 – 민노씨에 기대어

Friday, December 17th, 2010

며칠 전 민노씨는 “악(惡)의 숙주: 달콤한 망각, 뒤틀리는 대학”이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며칠 고쳐 읽으면서, 그 글에 쓴 댓글을 옮겨 놓는다. 옮기면서 그전에 날을 달리해서 올린 벗된 어느 신부님께 드리는 편지의 내용과 상충하면서도 서로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늘 처지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 이렇게 적었다.

눈물 나도록 아프고 고마운 글입니다.

우리는 종종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허물을 짚어내고 손가락질하지만, 그 비판의 대상에 자신을 포함하기를 주저하는 듯합니다. 아니, 자신에게 편만한 욕심을 감추기 위해, 그 비판이 더 거세지고 목청만 높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찰이 없으니 그런 비판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희망은 희망대로, 우리의 너절한 욕심과 욕망은 그것대로 드러내고 비추어 스스로 반성하는 일은 투명해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며칠을 두고 다시 읽은 이 글에서 그런 자신에게 투명하고 정직하려는 민노씨의 몸부림과 호소를 듣습니다. 그 자리가 비판적인 성찰과 비판의 행동, 나아가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첫 출발인 것을 봅니다. 민노씨의 부끄러움은 누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읽은 이들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 안에서 자신만의 부끄러움으로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그 처지에 따라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도 보여줍니다. 그러니 민노씨는 찌르지 않는데, 나는 찔려서 아프고, 그러다가 나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니 고마운 일입니다.

미안했습니다. 예의 상지대 사건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몸만 대주지 말고 민노씨도 좀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위해서 좀 살아보라’고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노씨의 처지를 염려한다며 내 허튼 조언에 핑계를 붙였지만, 그 조언에 감사한다고 말한 뒤 상황을 설명하는 민노씨의 마음을 알아듣고 부끄러웠습니다. 돕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멀리서 편하게 말만 해서 미안했습니다.

나이들 수록, 경륜을 쌓을수록, 혹은 책 한 권 더 읽을수록, 종종 나는 내 무관심과 방관을 ‘세련된 것’으로 치장했고, 너무도 ‘익숙하여’ 변화될 수 없는 세상이라 변명했습니다.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이 이런 세련된 치장과 익숙한 변명 속에서, 선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편만한 ‘악의 정체’입니다. 실은 “우리가 그 악의 공범들”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그 악”입니다. 우리 자신이 ‘악의 숙주’라고 말하는 것은 자학이 아닙니다. 더는 악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는 가장 첫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상지대 사건과 더불어 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당사자주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점에서 더욱 얼굴이 달아올라 화끈거렸습니다. 세련된 ‘방관자의 알리바이’에 익숙한 처지가 되어서, 짐짓 혀를 차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사이 내 안의 감수성이 메말라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냉철한 체’하며, 내 안의 열정을 억누르고, 공중 부양한 양, 도통한 훈계 질이나 하려 했습니다. 그 유혹들이 너무나 ‘달콤’하여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이 변화를 위한 실천의 상상력은 간데없이, 온갖 도사인 척하는 허황한 판타지에 취해 스멀스멀 내 감수성이 좀 스는 것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래서 민노씨를 이렇게도 읽습니다. 모두가 한 생각일 필요는 없다고, 모두가 하나 된 투쟁의 대오에 줄 세우자는 게 아니라고. 다만, 누구나 자기 처지에서 그 투명하고 정직한 성찰을 시작할 수 있고, 그 성찰이 지시하는 비판과 실천을 잇대어야 한다고. 작은 고백과 성찰과 실천이라도, 그것이 우선은 내 안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선의 상상력을 지켜나가는 길이라고.

그리고 민노씨와 상지대의 여러 친구, 그리고 “The나은”양과 함께 하는 모든 일은 고통과 패배인 듯한 현실 속에서도, 고통으로만 남지 않고, 여전히 감당할 만큼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감사의 합장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Friday, December 17th, 2010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Archbishop’s Ecumenical Christmas Letter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벗들에게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다” (마태 2:12).

우리 주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세상이 가하는 공포와 폭력에 휩싸입니다. 동방에서 온 현인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어느 독재자가 끔찍한 잔학 행동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하느님이 성육신하신 말씀의 삶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무고한 어린이들에 대한 학살(서방 교회의 12월 28일)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행동과 현존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고통과 죽음에 방치된 사람들 곁에서 드러난다는 우리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지난 10월 우리 성공회에 소속된 인도의 교회들을 방문하는 동안, 오리사 출신의 어느 그리스도인 여인에게서 자신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1월 초 이라크에서 벌어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잔혹 행위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매일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그 작고 용기있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콩고와 수단,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어린이들을 향한 잔학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이 연일 보도됩니다. 이러한 잔혹한 폭력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 누군가 고통받을 때, 그 몸 전체가 고통을 당합니다(1고린 12:26).

그러나 이 현실은 우리가 그 몸의 긍정적인 현실을 보도록 하고, 그 몸의 일원이 된 우리에게 던져진 하느님의 소명과 선물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례받은 신자들이 이루는 그 몸의 삶을 통하여 매 순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러한 친교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먹고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기도와 행동 속에서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연대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억압과 위험에 처한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하며 지지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한 연대는 신앙을 불문하고 그들의 이웃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폭력과 독재의 악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며, 이로써 야기되는 고통은 그들의 다른 이웃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대를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증언하는 용기와 관용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겸손해지며 기뻐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위해 그들이 보여주는 분명하고 용기있는 섬김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자라게 하고 더욱 확고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인간의 몸을 얻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항상 이 땅 위의 한 육체가 되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그 육체인 몸이야말로 신비한 몸의 지속적인 삶의 시작입니다. 그 신비한 몸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형제자매의 삶 속에서 살아있도록 하는 법을 배웁니다. 베들레헴은 우리가 누리는 서로 사랑과 서로 줌의 근간이요,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책임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사건은 그저 사랑에 대한 암시로 그치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이 행동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매일 생명과 사랑으로 자라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사건을 축하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이 절기에 말씀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태어나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 탄생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하느님의 삶과 끝없는 친교로 연합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친교의 삶을 예수의 삶을 그토록 위협했던 독재의 그늘 안에서 오늘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연대와 그들을 위한 행동을 통하여 살아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과 그 모든 사람에게, 이 거룩한 절기의 복락과 기쁨이 함께하길 빕니다.

캔테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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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3093

부끄러움이 깊은, 벗된 어느 신부님에게

Thursday, December 16th, 2010

(주: 사적인 편지를 올리는 일은 낯설고 위험하다. 게다가 무슨 ‘훈계 질’일 성 싶으면 더 난처한 일이다. 이를 무릅쓰고 사적인 답장을 공개한다. 모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므로.)

+ 주님의 평화

사랑하는 신부님. 늘 고민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대화 상대가 되고, 또 이런 편지의 수신인이 된다는 것은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트위터 같은 사적인 듯하면서도 여전히 공적인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글들과는 달리, 내밀한 자기 시선이 담긴 글을 받는 것은 즐겁고도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사사로운 경험의 공유, 특히 삶의 여러 위기라 여길 시공간 속에서 만나서 생활하고 나눈 경험은 그 이후에도 소통과 대화, 의지와 격려의 큰 자양분이 됩니다. 저 역시 지금보다 젊은 날의 어떤 통과의례 기간에 신부님과 함께 나눈 비탈길의 대화, 그 생활의 첫 겨울, 터서 갈라져 피나던 신부님의 손등을 눈물처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을 저 먼저 청산하는 날을 기억하셔서 지방에서 뜻밖에 찾아와 주신 수고스럽고 따뜻한 마음도 잘 알고 있고요.

나 자신도 식별하고 있는 처지에 던진 여러 잡념을 허투루 듣지 않으시고, 신학의 길과 성직의 길에 오셔서 더욱 가까운 길벗이 되어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두 제게 큰 격려와 힘이었어요. 제 말에 귀 기울이는 이의 모습을 봐서라도 저도 허투루 살 수 없었으니까요 – 물론 지금은 엉터리로 살지만. 죄송.. 어쨌든 그 원초적인 경험의 공유가 이어져 좀 더 확대되고 풍요로워졌으면 합니다.

최근에 수화기 너머로 나눈 하찮은 몇 마디를 깊이 받아들여서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강요하다시피한 사실을 슬쩍 모면해보려는 속셈 – 그 고민을 발전시켜주시니 또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말씀 속에서 신부님이 예전부터 품었던 희망과 꿈,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느끼면서’ 식별했던 고민이 다시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무참하게 짓눌리는 일이 사람살이에는 많지요. 누구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워야 할 새싹과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가꾸며 맺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여전히 신부님은 신부님 자신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선한 이들의 가장 못된(?!) 습관은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거나,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가면서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는 선한 이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심성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종종 자기변명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또 힘 있는 이들은 이 선한 이들의 이 약한 고리를 알고, 그 틈을 이용해서 자기의 힘을 여전히 유지합니다. 위선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해서 위악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여전히 모든 것을 자기 내면으로 환원하는 것은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자기반성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부님도 아시지요. 무엇보다도 신부님 자신이 자신을 잘 대해주시기를 바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비하된 자아는 언젠가는 복수를 하는데, 종종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여 나와서, 자신의 처지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자기존중감을 지키셔야 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탁에 따라 꽃피워야 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값 없는 은총 안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서라야,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속한 이들로 평등하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신학이 던지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이요 요구입니다.

바로 이에 기반을 두고 우리는 외부를 향한 좀 더 분명하고 근거 있는 변화의 요구와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소명과 고민, 반성은 신부님 자신을 키워나가도록 일조해야 합니다. 신부님을 압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편지 나누니 저도 너무 좋아요. 실은 어제오늘 성탄 카드를 손수 적고 있는데 여러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짧은 글이라도 옛날 식으로 자주 주고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굴러다니는 만년필을 손질해서 이제는 손으로 쓰는 편지에 다시 습관을 드려야겠습니다. 키보드로 쓰면 이 편지처럼 딱딱해진단 말이에요. 😉 되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지요.

마음 깊이에서 평화와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