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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와 정치, 고문과 국가, 그리고 현실주의

Monday, April 20th, 2009

미국 언론은 지난 부시 정권 하에서 테러 용의자를 대상으로 고문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려던 법률 자문 메모 공개를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 이웃에 있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의 법과대 교수로 있는 한국계 미국인 John Yoo 는 그 메모의 첫 집필자로 진작에 드러났고, 이에 그의 교수직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더 파헤쳐서 부시를 반인륜 범죄 재판정에 세워야 할 참이다.

“고문”이라길래 당장 떠오른 책과 글이 있어서 다시 들춰 보고선, 기왕 번역까지 해본다. [고문과 성찬례](Torture and Eucharist)라는 책으로, 칠레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자행된 폭압과 고문, 그리고 이에 대한 칠레 가톨릭 교회의 대응과 저항을 신-정치학(theopolitics)과 전례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폈던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윌리암 카버너(William Cavanaugh)의 인터뷰이다. 인터뷰 제목은 [정치적 행동인 전례](Liturgy as Politics)라고 했지만, 전례와 정치적 참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국가의 폭력 문제, 대학의 정체성 문제, 그리고 현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들에 대한 짧지만 매우 탁월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정치적 행동인 전례: 윌리암 카버너 인터뷰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전례적 행동에 참여할 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얼마 전에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내 첫마디는 이랬다. “한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미사를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전례는 의미로 축소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거라면, 그 의미를 알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이유가 무엇인가? 의미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라면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주일마다 교회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게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전례와 사회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그저 전례의 상징과 의미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런 다음 그 의미를 뽑아내서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려 한다. 봉헌은 우리의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둥, 평화의 인사는 국제 관계 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둥, 이런 식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전례가 어떤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내는 행동이라는 점을 말하지는 않는다.

앙리 드 뤼박(Herny de Lubac)은 말한다.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무슨 별장 같은 게 아니다. 교회는 그 원래 의미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행동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교회가 어떤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정당의 정치적 행동을 전례 안에 끼워 맞추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교회가 – 비그리스도인과 협력해서라도 – 평화와 자비의 공간, 정의로운 경제 교환의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광야의 목소리”(Voices in the Wilderness)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의 경제 공동체 등은 예수 정치학의 좋은 사례들이라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회피하려는 종교 분파나 정적주의와는 달리, 이러한 운동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이다. 어떤 점에서 평화와 정의를 국가에 요청하는 운동들보다도 낫다.

근대 세속 정치학의 가정 가운데 하나는 국가는 세속적이며 종교는 사적(privat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16세기 유럽을 망쳐놓은 종교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다시 획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강제적인 권력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속 국가를 평화 유지자로 보는 신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종교 전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싸움,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전쟁은 서로 다른 신적 정치 질서들(theopolitical orders) 간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봐야 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자를 죽였는지 설명할 수 있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는 합스부르그와 부르봉 간의 싸움이었다. 두 가톨릭 왕조끼리 싸운 것이다.

교회는 이런 피투성이 전쟁에 책임이 없지 않다. 교회는 폭압적인 권력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 역시 죄없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국가의 전체 기구들은 군주들이 전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적은 대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근대 민족-국가는 폭력에 기반하여 세워졌다. 교회가 폭력에 저항한다면, 교회는 그 사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다시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 참된 말을 발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교회가 연루되었던 폭력의 죄과를 현재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을 거절함으로써 속죄받을 수 있다.

교회가 국가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종종 탈리반 형태의 정권을 예를 들며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합당한 염려인가?

분명컨데, 난 탈리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정권은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종교적 폭력에 관한 신화가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염려한다. 바로 이런 방식이다. “저기 있는 놈들은 종교적 광신자들이다. 그들의 폭력은 비합리적이며, 절대주의적이고 분열적이다. 우리는 민주적인 세속 국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폭력은 합리적이며, 온화하고, 화합을 도모한다. 그들은 우리가 배운 교훈을 얻지 못한 놈들이다.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들을 폭격해서 사람들이 한층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사고 방식이 이라크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한 공적인 담론의 근간이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이 신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군사비가 다른 모든 나라가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을 합리화하도록 한다.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은 폭력으로 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합리성과 평화를 확산시키는데 애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군과 그 대리자들에 진행된는 전쟁의 결과는 5만명이 넘는 이라크 시민의 죽음이며, 2백만명의 베트남 사람의 죽음, 그리고 2십만 명의 과테말라 농민들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종교적 폭력”을 악귀로 바라보는 한, 이러한 전쟁들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어떤 종류의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칠레의 폭압적인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연구했다. 칠레의 가톨릭 주교들이 했던 것처럼, 교회는 정치 권력 혹은 그러한 현상 이면에 있는 것들에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하나의 가정이다. 칠레에 관한 내 책에서,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사례로 삼으려고 했다. 주교들이 한 일과 풀뿌리 교회들이 한 일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을 때 이를 부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깨닫게 되었다. 국가더러 스스로 정의로울 걸 요구하는 게 쓸모 없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교회는 국가가가 정의를 구현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를 심각하게 어떤 공적인 몸,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몸이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조한다. 이는 종종 국가에 대한 저항을 수반한다. 칠레에서 몇몇 주교들은 고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풀뿌리 교회들은 정권의 희생자들을 돕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변화는 조용하게 오지 않았다. 대체로 그런 일은 없다.

고문은 피노체트 정권 아래 정부에 의해 자행됐다. 미국 정부는 고문을 눈감아 주고 있다. 미국 교회들은 고문을 이용했던 칠레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부시(Bush)는 존 매케인 의원이 미국 요원들에 의한 고문 방지를 목적으로 한 수정안을 대상으로 부결권 행사로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점에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칠레는 예외적이라고들 생각했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군사 정권은 단기간으로 끝날 것이며, 그리 폭압적이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다. 미국 역시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자유를 위한 하나의 신호라고 여긴다.

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을 예외적이라 여기기 때문에, 미국은 법 위에 있고 예외적인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국가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말한 대로 미국은 “없어서는 안될 국가”이다 – 국가는 그 생존을 위한 이익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여긴다.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하나 – 교회는 국가가 스스로 정의를 행하리라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억류자들에 대한 불의한 처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대통령에게 미뤄둬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떤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미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 정당한 전쟁 이론이 한치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라도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국가에 미룰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연예 산업, 특히 디즈니 기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여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분야에 관해서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 같다. 대중 연예 사업 속에서 복음의 신호를 찾든지, 아니면 그 부도덕성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 말이다. 당신 생각은?

전체 대중 연예 사업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디즈니를 비판하는 것은 그 영화나 다른 미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내용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다. 디즈니에 관하여 내가 관심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다. 자유 시장이라고는 하나, 디즈니는 소수의 거대한 사업체가 소비 패턴에 영향을 주고 문화를 획일화하는 권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백만의 부모들은 디즈니가 뱉어내는 것을 구입하느라 안달이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라이온 킹이나 다른 상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강박감을 갖게 되는가? 이론적으로,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으로 좋다는 감각이 없는 문화 속에서, 남는 것은 힘이다. 의지는 좋은 것(선한 것)으로 이끌리지 않고, 마케팅의 권력이 의지를 움직인다. 거대 초국가 산업은 그 자라나는 권력으로 자유의 절단된 단편 만을 양산하고 있다.

당신은 또 교회와 관련된 대학들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기관들이 그 신학적인 근거를 굳건히 지키면서, 고등 교육 시장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 고등 교육의 큰 아이러니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면서, 대학들과 대학교들이 대동소이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들 안에서 인종적, 성적, 계급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에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명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학교는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 믿지 않게 된다. 진정한 다양성은 대학 내부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대학들 간의 다양성이다. 어떤 대학이 침례교이든, 천주교이든, 감리교이든, 대학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정체성을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곳이 독특하게 침례교적이고, 천주교적이고, 감리교적인 것에 따라서 모두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교회 관련 학교들은 그들이 독특한 선교 이념을 가질 때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정체성이 싫다면 그런 학교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기반한 학교들인 어떤 정통 교리에 입각한 엄격한 기준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실무자들, 교수진, 학생들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 일관된 대화가 지속될 수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우리가 바로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적인 방법들과 입장들, 그리고 세계관들을 뒤섞은 샐러드를 제공하고,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현대 대학들은 지성적으로 일관되지 못해서, 지성적인 활력이 아니라 냉소주의만 낳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가?

교수진 임용이 가장 관건이다. 많은 교회 관련 학교들은 현재 많은 수의 교수진과 실무자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그 학교를 설립한 교단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의혹을 갖고 있다. 물론 모든 학교는 아웃사이더가 필요하다. 만일 내가 1950년대의 가톨릭 대학에서 가르친다면, 소수의 좋은 맑스주의자가 교수진에 있어서 여러 문제들을 헤집어 놓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시계추는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각각 학부 안에 가톨릭 관점으로 심리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몇 명 씩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큰 문제이다.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받는 교육이 학제를 넘어서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물학 시간에 창세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수업을 방해하는 이들처럼 취급한다. 교회 관련 학교들이 창조론자 만을 임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서 배운 것들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동감하거나 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와 같은 다원적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는 구절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 구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의 말이다. “하늘로 가는 모든 문이 하늘이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성인은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 사이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다리라 생각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다리는 이미 하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좋아하는 건, 이 말이 수단과 목적이라는 이분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을 지금 이 땅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실천 속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떤 멀리 있는 종말의 시점에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길이다.

이번 주일에 설교를 하게 된다면, 어떤 본문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

대림절이 가까오고 있으니, 아마 절기 독서에 있는 대로 이사야에 있는 위대한 본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 같다. 전체 전례력을 통틀어서 좋아하는 독서 본문들이다.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사야 11:1-9 를 선택할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어울릴는지 몰라도, 어린 양은 쉽게 잠들지 못할 걸?” 이사야에서 말하는 어린 양과 늑대가 함께 어울린다는 본문을 선택하면서도, 우디 알렌의 지적은 이른바 현실주의(realism)의 사례라 생각한다. 이 현실주의는 말한다. “순진하면 안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어린 양은 늑대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꾸실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큰 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이사야서 해석으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셨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이미 햇순이 돋아났다. 대림(Advent)은 성탄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 나라의 “아직 아님”(not yet)을 하느님의 행동 지연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도 지연시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인 아들을 주셨다. “아직 아닌” 것은 우리가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 살아가고 있다. 이사야의 전망을 하느님께서 이뤄주시겠지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미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 분 안에서 이사야가 바라보던 새롭게 변화된 현실은 완성되었다.

The Christian Century. Dec. 13, 2005:28-32. Copyright 2005 CHRISTIAN CENTURY. Translated and reproduced by Nak-Hyon Joo in Korean with permission.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

Monday, March 30th, 2009

1.
여러 죽음의 소식들이 지난 몇 주간 내 자신과 주위를 우울하게 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야만을 고발하며 한국의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저혈당 쇼크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이웃 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전에, 이제 지성에 경륜과 너그러움을 더하여 새로운 목회를 꽃피우던 지인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셨다. 그동안에 이웃 도시에서는 네명의 경관이 총격에 쓰러졌다. 죽음은 그 자체로 삶 전체를 압도하며 넘실 거리기에, 옆에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할 말을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앞에 침묵과 눈물만을 보탤 뿐이다.

2.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침묵과 눈물 속에서 죽음은 숭고하다. 죽음은 이후에 내내 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쓰러진 이가 젊을 수록, 혹은 더 많은 기대를 받던 이일 수록, 무너지는 억장과 슬픔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 의미는 비루한 언어로 담기에 벅차다.

그 슬픔의 눈물 안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같은 직종이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아, 나도 준비해야지, 생각한다. 이 순간, 그 죽음의 사건은 타인의 것이 되고, 금새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런데 이게 연민에 의한 감정의 중첩 지점인지, 아니면 타인의 죽음과 내 삶을 거리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인지 잘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어려운 걸 보면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삶의 자리가 달랐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응시보다, 이내 그와 연관된 이야기거리로 관심이 옮아간다. 때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딱히 서른 생애를 이 땅에서 몸부림쳤던 삶 자체의 숭고함에 맞춰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에둘러 실체를 가리고, 귀 막고, 덮어두더라도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진실은 감춰지고, 뒤마려운 이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죽음과 삶 자체보다는 이야기거리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가십거리가 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게 된다. 우리가 늘 그들 삶의 한부분씩을 훔치며 소비했던 것처럼.

3.
밥 한숟가락을 물어 목구멍에 넘기려는 찰라, 한웅큼 치밀어 오르는 울컥증과 그만큼의 눈물이 섞이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빈자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긴다. 생의 욕구가 더 큰 탓일까?

4.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이다(적어도 우리 전통의 장례와 그에 대한 내 경험의 해석으로는). 죽은 이를 보내려는 일정이 가져온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훔친 눈물은 금새 지인들끼리 나누는 반가운 히히덕거림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반가움의 결이 어떤 불폄함 없이 겹쳐진다. 우리 삶은 이렇게 겹쳐진 것들도 가득차 있다.

5.
우리에게는 죽음을 설명할 말과 논리가 많지 않다. 때로 종교를 통해서, 혹은 경전의 몇 구절과 그 해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하는 바, 혹은 희망하는 바를 선포할 뿐이다. 엄밀히 그건 설명도, 논리도, 설득도, 심지어는 위로도 아니다. 다만 이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화두일 뿐.

6.
그렇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분노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일 때, 그 죽음이 조건지어져 있을 때다. 그건 사랑때문이다. 아직 사랑할 일이 많은 이가 이내 꽃피울 그 사랑의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도록 내몰린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기회마저 어떤 이에게서 빼앗아 버릴 때, 그 죽음을 대하는 분노가 스러져서는 안된다.

다시, 삶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한 연민의 중첩 과정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게 악다물며 되뇌이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더 많이 기뻐해야지,””사랑의 기억으로 삶을 수 놓아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서는 안될 일이다.

그 사랑을 막는 것들, 훼방하고, 심지어 훼손하는 것들에 향한 분노가 여전히 살아 남아야,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 죽음과 삶이 숭고한 것은 사랑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침묵과 눈물로 말을 잃는 것도 실은 그 사랑때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사랑을 앗아가는 것들과 끈질기게 대결해야 한다.

“화해를 위한 기도 요청”

Tuesday, March 10th, 2009

일전에 교회에서 내는 최소한의 성명서에 대해 운운했는데, 때마침 이메일로 “기도 요청”을 호소하는 글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 교회가 냈던 여느 성명서들과는 다른 시각과 맛과 호소력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언급하면서도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거니와, 단문들에, 넘치지 않는 은유와 수사가 적절해 보인다.

참으로 다행이라 보는 건, 남북 화해에 대한 응시가 예전의 낭만적인 통일 운동의 시각을 많이 벗어났다는 인상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화해의 문제가 여전히 큰 화두다. 남과 북이 한 혈육이요, 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은 이 통일지상주의의 “뒷구녕”에서 남과 북은 독재를 일삼았다. 압제자는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정치의 거름으로 삼으니, 최근의 남북 대결 양상은 양쪽에 있는 두 사회가 한줌 밖에 안되는 지배 세력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뻔한 책략에서 비롯했다. (이런 점에서 반목과 질시를 에너지로 삼아 분열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의 화해는 더이상 어떤 압제의 핑계를 만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요 출발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이 화해의 문제는 우리 “남한” 사회, 그리고 우리 교계 안에 더 큰 화두로 남아 있다.)

스스로 참회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며, 좀더 너그러운 신앙과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자는 주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생각을 깊이하자는 이 호소는 아직 성글지만, 이 사순절에 참 반가운 격문이다.

그런데, 이 격문을 어디에다 붙였나? 유통의 방법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성직자들에게만 이메일 “한방”으로 던지고는 말았다. 교회 주보에 싣든지, 웹사이트에 싣든지, 아니면 미사 때마다 드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의 형식을 빌도록, 좀 친절했었으면 싶다. 고마운 마음에 던지는 투정이다.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안 좋아서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했는데, 그게 좋아질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맘몬적 경제 논리로만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 보니, 그것과 맞물려 있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 주권 재민의 문제, 생존권, 역사, 교육, 인권, 언론의 문제, 공정성, 국가폭력, 생명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개발독재의 야만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야만의 잔재들을 문신으로 새긴 천박한 폭력적 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개발독재의 망령이 국토 개조란 허망한 이름으로 이 강토와 생명을 향해 폭행을 가하고 있습니다. 맘몬에게 얼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와 생명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는 멀어지고 갈등이 깊어갑니다. 한때 개선되었던 남북관계가 대결 상황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암울했던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일그러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생애 처음 광야에서 맘몬의 손짓을 물리친 서른 살 청년 예수를 생각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교회)는 그 맘몬의 손짓을 현실론과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의 삶의 자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맘몬이 던져놓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현실론의 올가미에 걸려들자마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뒷전으로 밀쳐놓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원죄이며, 우리(교회)가 안고 가야 할 시대의 고통입니다.

맘몬주의가 세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곧바로 평화의 문제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평화가 한없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었던 화해의 분위기가 와해되는 상황을 목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를 위해 부르셨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도의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지금까지의 죄책에 대한 고백과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 자유의 근본적인 가치를 불편해 했던 이기심과 안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에 기초한 맘몬주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먼저 남쪽 내부에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화해 이전에 남쪽 내부에 오래도록 얽힌 증오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남쪽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귀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생각의 차이를 담아 들을 수 있는 신학, 신앙적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편향도 담아내는 큰 그릇(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넷째, 생명의 문제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상에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2009년 3월 10일

TOPIK

대한성공회 평화통일선교특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