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성찬례와 교회 공동체

Tuesday, February 20th, 2007

성찬례에서 실제로 봉헌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이 봉헌을 드리는가? 중세 말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예배자들이 봉헌한다 – 첫째로 찬양을 드리고, 그 다음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다. 봉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전체를 위해 단 한번 스스로를 봉헌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의 봉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일치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부조화를 넘어서서 완벽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이처럼 말한다.

“구원된 공동체 전체, 즉 교회와 성도(성인)들의 공동체가 대사제이시며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봉헌하신 분을 통하여,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이로써 우리는 위대한 머리이신 분의 몸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제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대의 성사를 축하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봉헌된 교회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De Civ. Dei, X. vi)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전체(the whole Christ), 즉 머리와 그 구성원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례의 의미이며, 이것이 성찬례를 개정할 때 구체화도록 해야 할 내용이다.

E.L. Mascall, The Recovery of Unity (London: Longmans, 1958) 140-141.

R.H. 풀러 신부와 전례적 설교

Tuesday, February 6th, 2007

성서정과(Lectionary)에 따라 주일 설교를 하는 것이 모두 전례적 설교(Liturgical Preaching)는 아니다. 말 그대로, 전례라는 전체 맥락에 위치하여 성서가 전하는 선포와 성찬례가 요구하는 우리 삶의 봉헌과 변화를 매개하는 것이 전례적 설교의 간단한 정의겠다. 최소한, 성공회에서는 대부분의 설교가 전례의 맥락 속에 위치하기 때문에, 되도록 이러한 전례적 설교의 정의를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의 예배가 아니라, 설교와 예배가 혼동스러운 예식과 외적인 형식에 초점을 둔 성찬식이라는 두가지 예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문제는 여러 교회들에서 자주 보인다. (참조: 예배-전례 공간의 형성)

영국 성공회 출신의 신약성서학자로 미국의 여러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레지널드 풀러(Reginald H. Fuller) 신부는 성서정과에 대한 성서학적 설교자용 주석인 “성서정과 설교”(Preaching the Lectionary: The Word of God for the Church Today)로 성공회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그의 책은 198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이후 쇄를 거듭하고 개정을 거듭해 2006년에는 제 3 개정판까지 갖게 되었다. 선교교육원을 통해서 3년 주기 설교자용 성서정과 해설(캐나다 성공회의 Herbert O’Driscoll 신부의 책이 주 대본이었다)을 번역한 바 있던 내게도 풀러 신부의 이 책은 매우 낯익은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아마도 당시 신학교에서 사용되었던 책인지 여기저기서 많이 띄었던 기억도 난다.

올해는 이 분이 “전례적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지 50년이 된다고 한다. 지난 반 세기 동안에 전례와 설교, 그리고 그 적용에 대한 연구는 엄청난 것이어서 오늘에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원칙과 중요한 지적들은 여전히 우리 교회의 설교 행태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최근 받아본 미국성공회의 주간지인 “리빙 처치”(Feb. 4,2007)가 90살이 넘은 이 노학자를 인터뷰하고 이 책에 대해 실은 바를 간추려 소개하면서, 우리의 전례적 설교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설교 준비와 설교 자체를 다시 돌아보도록 한다.

풀러 신부는 전례라는 맥락을 상실한 혹은 전례없는 설교가 쉽사리 주지주의나 도덕주의, 혹은 감정주의에 빠지는 것을 우려한다. 이러한 세가지 설교의 흐름은 이를 듣는 교인들을 하나의 교회로 세우지 못하고, 사람들을 파편화시켜 서로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여기서 풀러 신부는 설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말씀의 선포에 대해서 교회(하느님의 백성)이 반응해야 하는데 그렇게 구성되지 못한 교회 예식에 대해서 지적한다. 이는 또한 설교가 없는 전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전례적 설교의 목적은 어려운 성서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청중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미 교인들의 마음에 잠재해 있는 어떤 신앙적-종교적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목적은 전례의 다른 여러 요소들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다리의 역할에 있다. 설교는 함께 읽은 성서의 말씀과 그 뒤에 따르는 성찬례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정과에 따른 설교는 정해진 구절에 따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성사를 연결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물론 풀러 신부는 이러한 전례적 설교가 설교의 전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신약성서에는 최소한 3가지 유형의 말씀의 사목이 있다고 한다.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케리그마(kerygma); 세례 후보자나 세례받은 이들을 위한 윤리적, 교리적 가르침을 담은 디다케(didache); 그리고 신앙인들을 안에서 복음의 뜻을 쇄신하고 강화하려는 파라클레시스(paraklesis)가 그것들이다.

여기서 전례적 설교는 “파라클레시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선택된 성서 본문에서 복음의 진수와 내용을 뽑아내는 것이며, 그 날 본문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중심적 행동을 꿰뚫어 내어 그 하느님의 행동이 감사기도 (성찬례) 안에서 다시한번 구체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풀러 신부는 어떤 성서의 본문이든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책 “성서정과 설교”는 이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이 설교자용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성서 주석과 교회력, 그리고 주석에서 설교로 진행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성서 주석이 신자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요구되는 사목적 상황에 연결되는 점까지만 다룬다. 그렇다면 그 다음 과정, 즉 그의 “전례적 설교”의 정의에 따른 성찬례와의 연결은 결국 설교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전례적 설교는 성서에 대한 성실한 주석을 통한 준비와 교회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인식, 그리고 성서의 선포를 성찬례의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마련된다고 하겠다. 매번의 설교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균형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실제적 원칙으로 마련된 전례(설교와 성찬례)를 통하여 성서와 성사와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움직이실 것이다.

전례의 개념과 전례학 입문하기

Monday, February 5th, 2007

전례 (Liturgy)

“백성들의 행동”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성서 칠십인역에서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전례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성원들이 이루는 신비한 몸으로 드리는 하느님에 대한 공식적인 예식이다 (비오 12세의 전례에 관한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 Mediator Dei, 1947; “기도의 법, 신앙의 법” lex orandi, lex credendi 참조).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레이투르고스”이다 (물론 이 말은 거룩한 전례의 의미에 따른 것은 아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장엄한 예식을 통해서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경배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신약성서 서신서들은 예식에서 불렸으리라 추정되는 찬양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이 예식을 위한 지침은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 첫 세기 동안에 종교적 예식들과 그 안에서 사용되던 기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식사, 성서 독서와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신앙 고백이라는 기본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의 전통적인 예식문들은 다만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 몇몇 본보기일 뿐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식들이 600년경 로마에서 의무적인 것으로 고착되었다. 신학적인 성찰의 진행에 따라이 공식적인 예문들이 고정된 형식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잊어서는 않된다: 즉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 극적인 상징주의 (예수의 삶에 대한 그리고 천상의 전례에 대한), 주님의 죽음에 대한 기억(아남네시스 anamnesis),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성인들에 대한 추모 축일 등이다. 이러한 진행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지극히 교회적인 언어 (즉 “죽은” 언어들)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이라는 기간 문서를 통하여 교회는 매우 넓은 원칙을 내놓게 되었다. 그 원칙의 사목적 적용은 우리 세대의 중요한 임무가 되어야 하며, 그 원칙이 가톨릭 신앙 생활의 회복, 즉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생각을 회복하는 일에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Karl Rahner and Herbert Vorgrimler ed. Dictionary of Theology, New Revised Version (New York: 1985, Original in German 1961). 280.

칼 라너(Karl Rahner)와 헤브베르트 포그림러(Hebert Vorgrimler)는 로마 가톨릭 교회 자체의 개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계 전체에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단 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재진행형인 시점에서 작은 신학 사전을 편집해서 출간했다. 편집자는 이 짧은 사전 표제어에서 전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낱말의 유래, 성서적 근거, 전례를 둘러싸고 진행된 역사, 그 내용, 그리고 현대의 흐름과 그 가치 등이 매우 함축적으로 담겨있으므로, 이에 따라 글을 풀어가는 나가면 전례학의 입문서가 되겠고, 여기에 살을 붙여나가며 그 내용들을 추적하는 것이 전례의 연구가 되겠다. 사전 표제어들의 작업은 이런 것이리라. 아쉬운 대로 한국어로 된 좀더 확장된 표제 설명은 주비언 피터 랑, [전례 사전] 박영식 역(서울:가톨릭출판사, 2005) 386-388과 그 위에 이어지는 전례에 관한 다른 표제어를 참조할 수 있겠다. (원제: Jovian P. Lang OFM, Dictionary of the Liturgy, New York: Catholic Book Publishing Co., 1989).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영어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몇권의 전례 사전을 추천하라면, 영어권 에큐메니칼 전례학의 산물이라 할 Paul F. Bradshaw ed.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and Worship (Lousville;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과 미국 가톨릭 전례학계에서 나온 Peter E. Fink, The New Dictionary of Sacramental Worship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0). 전례 혹은 전례학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려면 우선 이런 사전들로 개념을 분명히 하고, 역사와 논점들을 익힌 후에, 뒤에 따르는 참고도서 사항을 통해서 독서를 확장시키는 일이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