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예배와 윤리 – 스탠리 하우워즈

Saturday, October 28th, 2006

미국의 윤리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워즈(Stanley Hauerwas)는 예배와 윤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가를 고르는 일을 두고, 어떤 예전을 따라야 할 지를 두고,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지를 두고 그렇게 논쟁을 많이 하는 이유는 나쁜 예전은 나쁜 윤리를 끌어내고야 만다는 것을 십계명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리 만큼 감상적인 찬송을 부르는 걸로 시작해서, 별로 내용없는 내내 비슷한 기도를 드리고, 그런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은 이미 가장 좋은 친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 사이의 함축이 너무 커서 쉽지 않을 글이겠으나, 그의 신학적 태로로 비추어 보건데 예배가 한 개인적인 정신적, 감정적인 관심사에서 그치면서, 우리 삶의 현실을 둘러싼 일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한 예배로 만족하게 될 때, 결국 예배 밖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의 공범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이겠다.

이는 “기도의 법이 곧 신앙의 법” (Lex Orandi, Lex Credendi)이라는 오래된 경구를 신앙의 모토로 삼고 예전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성공회 전통을 되새기게 한다. 성공회는 이를 통해서 교리적 확실성보다는 공동체의 예배가 형성하는 “우리인 하나”(한몸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우워즈의 언급은 좀더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곧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 그에 책임있는 삶을 삶아가고 있느냐는 질문과 도전이다. 또 그의 말을 거꾸로 하여 요즘 교회 예배의 현상에 비추어 보면, “나쁜 윤리”를 만들어 내는 “나쁜 예배”에 대한 도전이다. 기독교 우파들의 신학과 윤리는 어떤 예배에 기반하고 있는가? (한기총이든지 뉴라이트를 지향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예배를 돌이켜 보는 것도 그 예가 되겠다.)

스탠리 하우워즈가 공동 편집해서 낸 최근의 “그리스도교 윤리” (The Blackwell Companion to Christian Ethics, 2004)는 이런 그의 생각이 짙게 반영되어 “예배를 통한 그리스도교 윤리의 구성과 실천”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새롭게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성공회 윤리학자 가운데 하나로 버지니아 성공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티모시 세지윅 신부(Timothy Sedgwick)가 일찍이 말한 바가 아닌가? 게다가 전례학계에서도 요즘 들어 새롭게 언급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Don E. Saliers, Bruce Morrill). 흥미로운 것은 평생 감리교 신자였던 하우워즈가 최근부터 스스로를 성공회 신자로 이해하고, 성공회에 출석한다는 것이다.

전례는 하느님의 일

Monday, October 16th, 2006

미국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예전) 관련 저널이라면 단연 “워십”(Worship)을 꼽겠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전례 운동이 미국에 와서 버질 미셸 신부(Fr. Virgil Michel:1890-1938)를 통해서 사회 정의와 전례의 삶을 결합시키게 되었다, 그가 창간한 저널(Orate Fratres)이 이름을 바꾸어 아직까지 “워십”으로 이어진다. 현재 편집장이자 미국 내의 주도적인 전례학자 가운데 한 분인 네이선 미첼(Nathan Mitchell)의 글 한 토막을 옮겨본다. 전례(예전)의 개혁이든 쇄신이든, 혹은 어떤 변형을 추구하든 간에 명심할 단순한 원칙이다.

전례(예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예배할 것인지를 보여 주신다. 전례(예전)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드리는 어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시는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함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요, 우리가 주도하는 것도 아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가 되새겨 주듯이, 전례는 오푸스 데이( Opus Dei), 곧 하느님의 일이다. 우리의 일이란 굶주리는 사람을 먹이는 일이요, 목마른 이를 채워주는 일이요, 헐벗은 이를 옷입혀 주는 일이요, 병든 이들을 보살피는 일이요, 집 없는 이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하는 일이요,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일이요, 금새 상처받는 작은 이들과 궁핍한 이들에게 우리의 손과 마음을 여는 일이다. 이런 일을 우리가 잘 감당할 때, 전례(예전)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제대로 설 것이다.

캘리포니아 교구장 주교 취임식

Friday, July 21st, 2006

몇달 전에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관할하는 캘리포니아 교구의 교구장 주교의 선출을 소개했다. 마크 앤드러스 주교의 교구장 주교 취임식이 내일 (7월 22일) 그레이스 대성당에서 열린다. 통상 주교 축성식 (consecration)과 착좌식(enthronment)으로 열릴 것이나, 이미 주교인 분이 오시는 터에다, 승좌식과 같은 권위적인 용어를 피하자는 것인지, 단순히 취임식(investiture)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례에 관한 경험에서 보자면, 미국에서는 이번이 첫번째 주교 관련 전례의 경험이 될 것이거니와, 축성식을 함께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있다. 이웃인 북캘리포니아 교구나 엘 카미노 레알 교구에서 올해나 내년 안에 살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내내 짐작이 안가는 “주교 취임식”도 새로운 경험이 되겠다. 취임식이 열리는 그레이스 대성당의 공간 제한때문에, 철저히 사전에 신청 배포된 입장권에 의해서만 참석할 수 있게 되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인터넷 방송(웹캐스팅)을 한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을 인터넷 상에서나마 살펴 볼 수 있다. 참석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특기할 만한 내용이 있다면 후에 나누도록 해야겠다. (혹시 웹캐스트 상에 제 모습이 잡히거든 반가운 댓글을 던져 주시지요. ^^;)

주교직에 대한 이해를 이 취임식은 어떻게 표현할까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원래 주교를 뜻하는 “폰티프”가 “다리놓는 사람”을 말한다면, 이 원 뜻에 비추어 우리가 경험하는 주교직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대가 이어받은 유산은 신앙의 선조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신앙이며, 또한 희망 속에서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모든 세대들의 신앙입니다.

그대가 누리는 기쁨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으며,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분을 따르는 일이어야 합니다.

(미국 성공회 기도서, 주교 성품 예식 “시험” 부분 중에서)

주[님]께서는 일찍이 사도들에게 내리셨던 은혜와 권능을 이 종에게 베푸시어 성서의 진리와 믿음을 지키며, 하느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섬기도록 사도 직분을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제 새 주교의 사목 아래 하느님의 교회가 새로워지며, 모든 신자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기쁨을 내려 주소서.

또한 새 주교를 참된 목자로 세우시어, 이 세상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키며, 모든 죄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진리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한국 성공히 주교 서품 예식, “안수”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