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한반도 평화 기원 성찬례

Thursday, May 4th, 2006

오늘 저녁에는 이곳 성공회 신학교 CDSP의 목요일 저녁 공동체 성찬례를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기원 미사로 드렸다. 여기에 온 이후로 신학교에서 한국어 미사를 드린 것이 다섯 번 정도가 된다. 하지만 매일 미사 한차례를 빼고는, 외국에서 공부하러 온 다른 나라 성공회 신부들과 인터내셔널 미사를 드렸기에, 성찬기도를 우리 말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미사 의향을 특정 지역으로 정하기 어려웠던 것에 비해서, 오늘 미사 의향은 한반도의 평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곳 성공회 신학교 CDSP는 성공회의 예전 생활의 전통에 따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그리고 오전 11시 반에 있는 매일 성찬례로 이루어져있다. 하루 세 번의 예전은 신학교의 교육이 예전을 통한 신앙 형성과 훈련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모두가 기숙사에서 살아가는 처지도 아니고 강의와 겹치는 일이 많아서 참석을 강제하지 않지만 많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다만 매주 목요일 오후에는 오전 미사 대신에 교수, 신학생,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공동체의 밤 미사를 드리고 함께 식사한다.)

오늘 미사의 대강은 이랬다.

미사의 시작은 전형적인 순행의 형태를 깨뜨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촛대와 다른 봉사자들이 짝을 지어 입당하는 것과는 달리, 분단의 상징으로 각기 두 패로 나뉘어 다른 문으로 입장했고, 그 동안 분단의 슬픔을 표현하는 피아노 음악이 입당성가를 대신하였다. 우리 아들과 딸이 남남북녀가 되어 각각 태극기과 인공기를 들고 두 패를 인도했으며, 그들이 침묵 속에 제대에 이르러 머무는 동안, 부활초와 한반도기(아리랑기)가 집전자와 함께 제대에 이르러 모두가 제대에 예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곧바로 부활초 옆에서 부활 선언과 세례 물을 다시 뿌리는 의식으로 이어져, 부활의 새로운 생명이 우리 한반도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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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전례 공간의 형성

Friday, April 21st, 2006

아침에 반가운 전화가 한국에서 걸려왔다. 이곳 한인교회에서 함께 하다 돌아간 프란시스 전화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현재 출석하는 분당교회 교회 이전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갔다. 생각이 한국성공회 내의 교회 건축과 공간 배치 등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졌다. 짤막하게 공부한 것들과 경험한 것들이 상념과 겹치길래 아침 나절에 메모를 하고는 프란시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다른 이들도 관심이 있을까? 부활절 아침에 통화한 이선우 신부님의 일갈이 떠올라 여기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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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구성이라는 말보다는형성이라고 쓰는데는 기본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조성이나 구성은 누군가의 의해서 의도를 부과하여 만들어내는 같은 느낌이 묻어오는데, “형성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어떤 것이 자라서 태어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사전적 정의로 구별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래에 주절거리는 것들이 내내 어떤 분야의 전문적 식견이라기 보다는, 전례를 공부하는 사목자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공간의 형성 관련된 아주 느슨하고 두서 없는 생각을 실제 제가 한국에서 경험한 실내 리모델링 교회, 개척 교회들에 대한 인상 속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아주 추상적인 접근에서 소심한 접근까지 격의 없이 춤출게 당연합니다.

1: 공간의 형성

1. “형성이라는 속에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공간은 공간에 모이는 이들이 안에서 경험하는 어떤만남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수직적으로 그것은 절대자 혹은 하느님과의 만남이고, 수평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과의 만남이다.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예배 공간에서 의미가 태어나는 것이고, 의미가 예배의 공간을 형성한다.

2. 만남의 경험들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할 터이니, 당연히 예배의 공간이 형성되는 방법도 다양하겠다. 예배 공간의 어떤 실체적 모델이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다.

3. 수직적인 하느님의 만남이나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의 만남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가하나의 이뤄서 하느님을 만나기때문에 이것은 교차된다. , 우리 앞에 중요한 상징이 있다. 십자가

4. 한국교회의 경우 너무 수직적인 만남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강해서, 이것은 대체로 개인주의적인 신심으로 협소해지고, 성직자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위주의를 강화한다.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의 사귐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이게 생일 잔치인지, 끼리끼리 모임인지 구별이 안될 수도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분리할 없는데, 나는 공동체가 모여서우리라는 개인 만들어내는 경험이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우리인 하나 바로 하느님과 만난다.

5. 이런 점에서 예배 공간의 형성은 공동체의 경험에 기반을 두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주교의 교회도 아니요, 사제의 교회도 아니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만들어가는그리스도의 이기 때문이다.

6. 그러니 공간은 몸으로 자라나고 형성된다. 똑같아도 똑같지 않은 우리 몸처럼속살처럼 나와서 자라나기도 하고, 늙어 죽기도 하겠지만그러나 우리는 다시 부활한 몸이 것이다. 그래서 이는 우리의 삶과 닮았지만, 시간에 따라 자연사하는 공간은 아니다. 부활하는 공간이요 영원한 삶의 공간이겠다.

7. 이런 허튼 소리를 머리에 떠올려보는 것은, 교회 예배 공간의 리모델링에서 최소한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경험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를 확인해보기 위해서다. 교회 리모델링은 사제와 몇몇 건축위원회 지도자가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작가 개인의 작품도 아니며, 인테리어 시공업자의 작품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공동체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 공간 안에서 내내 손님이 것이다. 하기야 요즘은 손님으로만 받아주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8.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교인들의 신앙 경험물론 이건 개개인의 신앙 경험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진 우리의 신앙 경험이다 기반하도록 해야겠다. 사제는 교회의 선교 사명과 이것을 대화하게 하고 조화시킬 책임이 있다. 하기야 그게 어려워서 문제인게지그리고 이런 점들에서 건축/리모델링을 교인들의 신앙을 경청하고, 신앙을 공동체 안에서 다시 생각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새롭게형성되는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이 없어예배 공간의 형성 책임질 있겠는가?

9. 예배 공간은 못박힌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님의 몸이다. 벽을 뚫고 여기 저기를 통하는 몸이다. 우리도 예배 공간을 통해서 그런우리인 하나 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 예배 공간이 상황에 따라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용 가능할 있도록 고려해서 융통성있게 배치해야 한다. 절기마다 조금씩 예배 공간의 배치를 바꾸는 것도 좋다. 우리는 살아움직이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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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성찰과 학자의 비평

Tuesday, March 21st, 2006

“간학문성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새로운 대상을 창조할 때 형성된다.” (롤랑 바르트, 1984)

“그 생성의 순간에 얻은 모든 지식은 논쟁적인 지식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1950)

“그러니까 나르시스의 비극은 그가 충분히 나르시스적이지 않거나, 오히려 그가 변화를 줄 만큼 충분히 길게 비추어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비추어 볼 줄 안다(reflective). 그러나 자기 내부로 되돌아가는 성찰(reflexive)을 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타자로서 의식하지만, 타자로서 자의식을 가진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외 경험을 시작하는 순간에 자신을 이 타자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었고, 이해하지도, 살아 버틸 수도, 심지어 웃을 수마저 없다.” (바바라 밥콕, 1980)

의례 연구(Ritual Studies) 학자인 로널드 그라임스가 의례 비평과 관련하여 학자의 컨텍스트를 논하기에 앞서 인용한 짧은 글들이다. 그라임스는 학자로서 의례와 같은 어떤 사건이나 행동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자기 회귀의 성찰성(reflexivity)은 그 기술을 충분히 하되, 역시 기술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하는 학자의 비평 행위의 다른 말이다. 학자는 상황과 기술 및 분석 대상의 안팎을 지속적으로 드나드는 성찰적 비평가이다.

“현장 연구는 내부와 외부의 관점들 사이의 긴장을 최대화하여 거리두기와 강조하기의 변증법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