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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회복: 오직 성서, 교도권을 넘어서

Wednesday, March 30th, 2011

전통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어쩌면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주장과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주장의 대결이 드리운 서구 신학의 그늘을 벗기려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앞서 옮긴 이브 콩가르의 1960년대 저작은 ‘전통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전기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전통주의에 대한 비판의 한 방식이었다.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근대 전례 운동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 그리고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은 그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차원과 방향과 심도는 그 다양한 정치-사회적 맥락만큼 각각 다르다.

21세기는 좀 더 다양하게 그 전통의 내용물을 찾아내고,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며, 아예 그 자체로 좀 더 풍요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 각인된 ‘오직 성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이어서, 특히 신앙인의 좁은 이해를 부추긴다. 그 반대편에서는 전통주의로 회귀가 돋보인다. 포스트모던의 혼란에 대한 반대급부로 확실한 답변을 제공하는 근본주의가 더욱 세를 떨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전통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며 콩가르의 이해를 잇는 ‘전통’의 재발견 기획은 어디서 찾아볼 것인가?

20세기 신학의 마지막 거장인 존 매쿼리(John Macquarrie)가 “(영국) 성공회 신학의 미래”라고 평가한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의 기획을 엿본다.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문화) 전통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기획이라고 하겠다. 그 기획은 역시 고전적인 성공회의 기풍(교의신학보다는 전례와 문학적 언어에 기댄 ‘신학하기’)에 잇닿아 있거니와, ‘성서와 교리’에 집착한 서구 신학의 오랜 그늘을 넘기 위한 조심스럽고도 원대한 신학적 기획으로 읽힌다. 이런 ‘서구’의 대안적 기획은 한국이라는 맥락에 어떤 자극을 주며, 또 한계를 드러낼까?

아래에 데이빗 브라운이 쓴 주요 저작 두 권의 서장을 각각 옮겨 올렸다.

번역 후기: 짧은 경험이나마 여러 영국(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번역했다. 그런데 대부분 읽기 어렵고 짜증 나도록 복잡한 구문을 구사한다. ‘너희는 이 경지를 모르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장치를 여기저기 들여다 놓아 독서를 방해하는 일이 잦다. 한마디로, 글 품새가 어지럽다. 이러면 번역은 특히 괴로운 일이 된다. 오역은 분명히 내 탓이지만, 그 책임의 일부를 저자와 나눠야 덜 억울하겠다.

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 데이빗 브라운

Wednesday, March 30th, 2011

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데이빗 브라운

이 책은 전통의 역할에 관한 두 권의 책 가운데 둘째 권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주제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주제는 ‘제자도’이다. 첫째 권인 <<전통과 상상력>>에서는 좀 더 너른 캔버스에서 작업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타 종교의 중요성, 고전 세계에서 신화의 역할, 그리고 계시에 대한 변화된 생각을 두고 진행되는 현재의 논점을 통해서, 성서와 이후 교회 역사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제안했다. 이를 서로 대립시키기보다는, 계속 전개되는 전통을 성서와 역사라는 엔진을 돌리는 동력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교회를 변화하는 사회의 조건들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가능태로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계시의 통찰은 절대로 정경의 체계에 제한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이후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동등하게 말씀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진보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후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교회가 때로는 똑같이 오류를 드러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 나온 것들에 대한 좀 더 효과적인 비판을 성서 시대의 통찰에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여기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다른 수많은 신학자의 작업이 이미 능숙하게 다룬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함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계속 전개되는 전통이야말로 그 성서적인 기원을 보완하고, 심지어는 ‘교정’하기도 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역사적 계시를 주장하는 까닭에, 어느 역사적 과거에 확고하게 근거한 것만을 바르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할 유혹에 빠진다. 그 역사적 계시는 원래의 관점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책과 이전의 책에서는 열려 있는 궤적들을 논점으로 삼는다. 그 궤적들은 전통에서 나왔으며, 전통의 함의를 새롭게 읽도록 하며 그 전통에 기대어 다시 돌아오는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전통과 상상력>>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사례를 들어 제공했다. 그 사례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앙의 조상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이야기, 또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자기 이해 안에서 변화를 겪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우리의 초점은 약간 다를 것이다. 교리 문제도 종종 다루겠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은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실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의 첫 장은 문제에 집중하려는 방편으로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변화된 태도들을 살핀다. 그리스도를 인간이자 주님으로 연결하는 것이 오직 신약성서를 통해서만 매개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한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주장의 확증을 찾는다. 성인 숭배의 등장을 설명하고 최근 소설이 제공한 사례를 들 것이다. 3장에서는 이러한 발견이 제자도의 사회적 차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이루는 성인과의 상통을 그저 부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개념 틀, 즉 좀 더 정확히 의미로, 인간의 제자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1부에서 제자도가 한 공동체 안에서 모방과 관계로서 구성된다는 전반적 구조를 다룬다면, 2부는 몇 세기를 걸쳐서 일어났던 고통과 가족과 성에 관한 태도의 변화를 다룬다. 그 변화의 두 가지 형태는 각각 욥기와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통해서 매개되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나는 교회가 그 (역사적) 전개의 다양한 마디에서 일어난 것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러므로 내 주장은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늘 처음이라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똑같이 주장한다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판단은 물론 권위와 진리에 관한 중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후자 문제의 적합성이 이 책을 전반에서 논의되지만, 이 두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3부에 있다. 3장은 천상에 있는 공동체의 일치에 대해서 다룬다. 6장은 교회의 지금 현실을 다룬다.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그 갈등은 공동체의 자기 이해 성숙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정통의 성장에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된 인식이 여전히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 하더라도, 어떤 문제를 완전히 해결되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모든 신앙적 진리를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겠고, 어떤 점에서 분명히 그러하기도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혹은 역사적 진실이 밝히는 내용보다 더 그럴 수 있겠는가. 진리의 방식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는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특별히 진리가 비역사적이고 허구적인 것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처음에는 허구적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성인들의 삶은 계속되는 상상력이 관여하여 다시 쓰이고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혹이 있다. 이후에 나온 판본은 그 어떤 실제 사실과 일대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들은 열등한 형태로만 그 진리를 매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때로 허구적 이야기가 더욱 심대하고 의미 있는 진리를 체화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전통은 거룩한 실재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전유를 우리 자신의 제자도 안에서 붙잡게 하며, 그 지속되는 전통을 가장 잘 보전하는 힘은 상상력이다.

책 마지막에 참고문헌은 달지 않았다. 대신에 각 장에서 특정한 저술이 처음 언급될 때 그에 대한 세부 서지 사항을 찾을 수 있다.

* David Brown, Discipleship and Imagination (OUP, 2000)

전통과 상상력: 서장 – 데이빗 브라운

Wednesday, March 30th, 2011

전통과 상상력: 서장

데이빗 브라운

두 권 가운데 이 첫 권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전통의 역할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두 권 모두 서로 따로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 물론 두 권 모두를 볼 때라야 계획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전통이 성서와 그 너머에 있는 계시를 지켜내는 동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은 그저 이차적인 것이나 반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적 계시와 그 이후의 전통을 대립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에 이 둘을 포괄하여 계속되는 과정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봐야 한다. 이 주장을 세우려면 뒤따를 내용에서 성서적 통찰에 대한 제한을 많이 두어야 한다. 이 말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밝히건대, 그 작업은 성서를 얕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성서가 감당할 수 없는 짐에서 성서를 구해내자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느님께서 그 최대치의 진정성으로 특수한 문화적 맥락이라는 제한을 받아들이셨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서에 항상 그 계시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현대 교회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관점들을 가정한다면, 이야말로 계시를 냉대하는 것이 된다. 대신 우리는 어떻게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역사에 끊임없이 관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 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다. 뒤따를 내용에서 이후의 전개를 정당화하는 수많은 논쟁을 제공하겠고, 성서적 관점들에 대한 ‘교정’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이는 앞선 성서적 전통과, 이후에 등장한 것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는 그 힘을 부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라도 지적하는 까닭은 책의 내용에서 그런 점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별로 익숙하지 않은 논점, 즉 지속적인 전개의 필요라는 진리에 대하여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말은 이 책과 그 자매편인 <<제자도와 상상력>>(Discipleship and Imagination)에도 등장한다. 이는 내가 교리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교리적 문제들은 종교적 믿음에 그 형태와 활력을 제공한 이야기와 표상들에 대해 이차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표상들의 형태는 변한다. 이는 현존하는 의사소통의 가정들, 새로운 문화적 맥락들, 그리고 하느님의 계속되는 활동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아주 잘못되어 갈 것이다. 성서 본문의 의미에 대한 현재의 이해를 만든 역사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고, 매개 없이 성서 본문과 대화하겠다고 시도한다면 말이다. 둘째 권은 두 가지 문제에 천착하다. 첫째, 관여한 독자 – 제자 – 가 어떤 차이들을 만들어 내는가? 둘째, 이러한 제자도가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권위에 관한 문제들과 제자도에 대한 좀 더 개인적인 물음을 생각하는 독자라면 둘째 권을 살펴야 한다.

한편, 이 책에서는 논쟁의 일반 구도를 세우는 데 관심을 둔다. 뒤따를 토론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현대 세계의 세 가지 주요 양상들과 관련하여 내 논점의 맥락을 설명한다. 그 양상은 이렇다.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현재 논쟁, 2) 그 결과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와 종교 간 대화에 관한 경쟁적 주장들, 3) 그리스도교의 역설, 즉 많은 곳에서 특히 지극히 매력적인 부분(성탄절 축하 행사)에서 신학자와 설교자가 가장 당황스러워하며 발견하는 풍부한 상상의 세부 결과로 드러나는 역설. 그다음 2부에서는 고대 세계에서 종교 전통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핀다. “움직이는 텍스트”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 발생한 변화를 드러내 준다. 어떤 이들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아우르는 신앙 조상의 이야기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리스 종교 전통과 나란히 놓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한 독자에게는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이 비교는 양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는 것이지, 성서 이야기의 가치를 손상하려는 것이 아니다. 3부는 특별히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 개인에 대한 전유가 그 앞 장에서 보여준 유형에 어떻게 정확히 대응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성육신 교리를 훼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은 그 교리의 진실성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인간성과의 가장 위대한 그 접촉에서조차,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특정한 문화와 그 문화의 가정들에 제한시키셨으며, 그리스도가 이후의 계속되는 시대를 통하여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도록 지속적인 전개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한 장을 시각 예술에 할애했다. 두 권의 책에 시각적,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자료가 거듭 나올 것이다. 이 상상력은 종교적 믿음이 살아서 발전하는 동력에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다.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신앙이나 신앙이 없는 이들과 같이 다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여기서 제공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즉 그 성서적 뿌리와 그 이후에 나온 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화된 이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배척하고 싶겠지만, 실제로 펼쳐지는 전통의 작동 방식과, 특별히 상상력에 대하여 내가 적용한 핵심적 역할과 관련한 주장들에 대해서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책 마지막에 참고문헌은 달지 않았다. 대신에 각 장에서 특정한 저술이 처음 언급될 때 그에 대한 세부 서지 사항을 찾을 수 있다.

* David Brown, Tradition and Imagination (OUP,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