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서' Category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Wednesday, August 6th, 2014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8월 6일)1

공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모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고 산 위에서 빛을 감싸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Transfiguration.jpg

사건은 산에서 일어납니다. 이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덧없고 유한한 인생이 영원한 차원과 만나는 곳입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이 두 경계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뚝 서십니다. 이 경계에서 예수님은 환한 빛으로 변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하여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늘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건 등장인물의 만남이 뚜렷합니다. 모세는 가녀린 떨기나무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불을 품었던 순간에 하느님을 만났고, 이집트 노예 탈출을 이끌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악행을 거듭하는 권력과 싸우다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올랐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예수님과 만나 구원 행동의 전통을 나누고 함께 이어가는 만남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세상 속에서 계속 이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사건에 담긴 말들이 이채롭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논의했습니다. 이때 ‘죽음’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엑소더스’, 곧 ‘해방의 탈출’입니다. 이를 위해서 애써야 할 터인데 제자들은 초막을 지어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세상의 억누르는 사슬을 끊으며 해방하는 일에 귀 기울여 참여해야 합니다.

서방교회 영성과 신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몰두하여 참회의 신학으로 깊어졌다면, 동방교회 영성과 신심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바라보며 빛의 신학으로 펼쳐졌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자유롭게 되어서 빛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일이 신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 사건에서 우리 인간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 자체이며, 참된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3일 치 []

오병이어 – 슬픔이 빚은 측은지심의 성찬례

Sunday, August 3rd, 2014

창세 32:23~32 / 시편 17:1~7, 15 / 로마 9:1~5 / 마태 14:13~21
2014년 8월 3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후 6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인생살이에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지배하는 일이 더 잦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이들도 아주 멋진 모습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혹은 아주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우리가 덮어 바른 화장을 조금만 지우면, 우리가 치장한 옷가지를 조금만 벗어 들추면, 민얼굴과 맨몸에 드러날 상처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서, 슬픔을 더는 참기 어려워서, 아니 과거에 난 상처와 그 흉터가 너무 보기 싫어서, 그 모든 것을 잊고,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여전히 종교와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이가 바로 이런 마음을 담고 예배당과 성당, 사찰을 찾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점집을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고통과 상처, 슬픔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사와 씨름한 야곱 이야기는 성서를 자주 읽어보신 분이라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쌍둥이 형 에사오의 장자권, 즉 상속권의 축복을 가로채어 달아난 쌍둥이 동생이 아니었던가요? 야곱은 이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죄책감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넘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형 에사오를 향한 죄책감과 두려움입니다. 형과 어떻게 화해할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선물을 보내면 형 마음이 풀어질까 하여 많은 재물을 먼저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혹은 고민하다 지쳐서 잠시 깜빡 잠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해야 합니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천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렸는데도 그는 천사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 결국, 천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복을 빌어줍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성서 이야기에서 복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곱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께 떼를 쓰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기대합니다. 하느님께 끈질기게 부탁하면, ‘내’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 슬픔과 흉터도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여러분은 기도해서 얼마나 삶이 더 나아지셨나요? 들어주지도 않는 기도, 이제는 불판을 갈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이죠. 불판을 갈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 성서 이야기를 거꾸로 읽으면 사태가 달라집니다. 야곱은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과 씨름하여 축복을 얻어냈지만, 그는 결국 장애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평생을 절름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얻은 보상도 있지만, 여전히 인생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야곱은 그 상처와 더불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야 하느님을 대면했습니다. 신앙은 상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견디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하느님을 되새기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과정입니다.

John_Reilly_Feeding_Multitude.jpg
(John Reilly 1928~, The Feeding the Five Thousand, 1958년 작)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넘게 먹이셨다는 유명한 식사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독특한 자리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볼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 바로 앞 문단입니다.

“[헤로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오늘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 세례자 요한이 참수를 당했다는 소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았던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요한은 그 앞에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그의 선교를 이어받아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사람으로 칭송했습니다.

그 깊은 벗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 낄낄거리는 오락과 내기의 대상이 되어 그 목숨이 속절없이, 그리고 처절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을 되새기며 세례자 요한을 충분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며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요한의 삶을 되새기며 이어질 당신 자신의 슬픔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은 그저 부랑아처럼 떼 지어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슬픔에 잠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에서 이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을 보시며 측은하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애도 속에서 그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은 깊은 종교적 영성의 수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도덕적 훈련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기밀하게 분석한 자료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측은지심은 자신의 슬픔에서 옵니다. 종종 자신의 슬픔은 피해의식과 분노가 되기에 십상입니다. 강박관념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슬픔으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자기 몸 깊숙이 패인 상처와 흉터를 통해서, 밖을 바라보고 밖에 있는 사물과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슬픔의 시선은 우리에게 측은지심을 마련합니다. 슬픔은 측은지심이 됩니다. 자신의 깊은 슬픔을 자기 안에 쌓지 않고 밖을 향해 열 때, 우리의 눈물이 볼록렌즈가 되어서 세상의 다른 아픔과 상처와 슬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생기는 새로운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입니다. 여기서 얻는 새로운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측은지심은 마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뿐인데, 이걸로 어쩌란 말입니까?” 하며 따져 묻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 작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남녀 어린이 모두 합하여 일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풍성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이제 제자들의 몫이 됩니다. 그 광주리를 저마다 둘러매고 세상을 향해서 먹이는 일,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나서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를 성 목요일에 있었던 주님의 만찬으로만 보면 단견이고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든 식사 기적의 종합인 탓입니다. 가나의 기쁜 혼인잔치, 배고픈 이를 먹이신 이야기,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들과 나눈 식사,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나누신 마지막 식사를 종합합니다.

더욱이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절망하며 낙향하던 제자들과 나누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가서 허탕을 치던 제자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고서는 당신이 손수 마련하신 모닥불에 생선을 구워주시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이 모두 낙심과 실패, 상처와 슬픔, 그리고 과거의 흉터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슬픔이 마련한 측은지심으로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슬픔과 상처를 통해서 새로운 현실,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른 슬픔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먹이고 보살피며 곁에 있으라 합니다. 연대하라고 합니다.

신앙은 고통과 상처와 슬픔은 없애는 길이 아니라 함께 견디며 걷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슬픔이 빚은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여러분을 이 측은지심과 연대의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아멘.

눈물로 듣고 보는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Tuesday, July 22nd, 2014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7월 22일)1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 발견되었다는 파피루스 쪽지의 표현처럼 예수님의 아내였을까요?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은 이런 의문을 다뤄 세간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이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교회가 이해하는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Mary_Magdalene-Georges_de_La_Tour.png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를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마귀’로 고생하던 그를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몸을 파는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여인의 사례에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참회와 헌신의 모본을 찾으려고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묻힌 현장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어져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상실과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 가에서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로, 다른 한 분은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도였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운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St_Mary_Magdalene.jpg

  1. 주낙현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주보 글 수정 보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