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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구원의 기억 – 성 이레네우스 축일

Saturday, June 28th, 2014

애가 2:2, 10~14, 18~19 / 시편 74:1~3, 22~23 / 마태 8:5~171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는 잊혀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잊어야 살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뇌의 작용이 얽혀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해로운 기억이든 이로운 기억이든, 자기 멋대로, 혹은 자신이 감당할 능력에 따라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우리 마음대로 제어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우리 생에서 살았던 여러 사건과 경험도 잊혀지는 일이 많은데, 2천 년 전, 그것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잊었던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202년경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레네우스 성인을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도서는 이분의 기념일을 5월 28일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실수입니다. 다행히 그 실수를 바로 잡아서 6월 28일 오늘, 그분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이 우연한 실수를 통해서 성 이레네우스 축일을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레네우스 성인을 잘 알거나 기억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의 제자였던 폴리캅 성인의 제자였으니까,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 족보에서 손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인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니케아 신경의 여러 문장이 이분의 글에서 따온 것인데도 이 성인의 이름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분의 생소한 이름뿐만 아니라, 이분의 가르침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일까요? 이 성인이 그토록 싸웠던 이단들,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세합니다.

세상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나누고, 모든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삶의 미래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는 일이 횡행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 불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상은 실제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불완전하고 악이 가득하고 육적인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내적인 세계의 평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있고,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 자처합니다.

우리의 삶에 담긴 갖가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은 그저 모두 허상일 뿐이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지식과 진리만을 깨달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횡행하니, 이런 사고방식을 철저히 반대했던 이레네우스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는 잊고 산 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옹의 교부 성 이레네우스는 이처럼 개인적이고 영적 지혜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았던 영지주의자들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영적 지혜와 일상의 경험, 영과 육, 그리고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오늘 우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드리며 떡과 잔을 나누는 일을 두고 ‘세상의 썩어질 물질을 먹는 헛된 짓’이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수련하여 얻은 영적 지식이 영원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 성인은 성찬례가 육과 영의 결합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성체’의 사건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며, 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희망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만남과 변화의 신비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성찬례이며, 이 성찬례 신비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리와 선언을 세운다고 반박했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구원은 이미 창조 때에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참 좋다”하며 던지신 감탄사에 이미 담겨있노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그 창조 안에서 조금씩 유아기를 벗어나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진화의 과정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우리의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기억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우리의 영혼도,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살다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나누고 마시고,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결국에는 고통을 당하다 죽었던 이유도, 우리의 생로병사 그 자체가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창조 때의 아름다운 모습, 참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키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성인은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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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희 작, 침묵: Shin-hee Chin, Silence)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2001년 6월 28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 딸 아이보다 넉 달 먼저 세상에 선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희’입니다. 그 생명이 한 가족에게, 특히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주어졌을 때 경험한 기쁨을 우리는 간단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나며 우리에게 보여준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는 말과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1년을 지상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이 홀연히 엄마와 아빠 곁을 떠났을 때 닥쳤던 슬픔과 절망감을 우리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사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의 시편 기자가 되어 이렇게 외칠 뿐입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 오늘의 예언자마저도, 비탄에 잠겨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나 너를 어디다 비겨 위로해 주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벌어졌거늘, 어느 누가 다스려줄 것인가? 주님께 울부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같이 흘려라.”

우리는 눈물을 마시며, 눈물에 비추며, 우리의 모든 삶을 기억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존재가 결정된다”고 어거스틴 성인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사랑들 전체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만지고 느끼고 먹고 마셨던 모든 것들을 통해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되살려 기억할 때, 아니, 우리와 11년을 살다가 홀연히 꽃처럼 떠난 아이들의 숨결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지난 4월, 속절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우리를 떠나야 했던 300여 명의 꽃 같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제대로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풍요로운 기억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기억과 세계를 껴안으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인간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기억 속에 잠긴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은 우리의 약함이요, 아픔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라야 그 생명들은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으로 남아 살아 숨 쉽니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고,” “그분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도, 한 명도 잃지 않고, 그분의 품 안에서 있다는 것을 늘 되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1. 한국 기도서는 성인 축일 해당 본문을 제시하지 않아 연중주간 본문을 사용. []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

Thursday, June 26th, 2014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0-42).

종종 편안하게 기대어 안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종교 경전에서 멋진 한 두 구절을 만나 마음을 위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거기다가 약속된 상까지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이런 사람 마음에 관하여 몹시도 단호한 선언을 던집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말씀 자체인 예수님의 삶과 그 도전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허투루 듣기 어렵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당부하시며, 그 선교 활동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를 염려하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그 당부와 염려와 격려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예언자와 옳은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그에 따른 보상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 신앙은 예수님을 환대하고,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환대하는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름 아니라, 예언자와 정의로운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환대하는 행동이 신앙이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과 교회가 참된 신앙의 공동체인지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현실의 교회 안에 예언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정의로운 사람이 발을 붙이고 있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환대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예언자로 살아가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작은 사람으로 겸손히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언자는 못 배웠거나 천한 신분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을 가진 사람들, 특히 종교와 정치의 여러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용기 있게 쓴소리를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대하기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교회는 썩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혼자서 이루는 옮음과 정의는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는 늘 공동체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공평한 대접과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를 에둘러서 정의를 말할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건물의 초석이 어긋나면 아무리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도 곧 위태로운 처지에 빠집니다. 교회는 이런 정의와 올바른 절차를 지키고 훈련하며, 교회 밖의 사회를 정의롭게 물들여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때라야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이방인, 재력과 지위가 딸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 대접에 고마워할 정도로 관심과 배려와 환대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찾으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친 신앙의 나그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환대하고 쉼터가 될 때라야, 교회는 참된 희망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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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이콘 – 삼위일체 –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우리 교회 안에서 이들을 환대하고 있나요? 이들은 우리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 괜히 풍파를 일으키는 얼치기라는 핀잔을 받고 있나요? 우리는 이처럼 예언자이고 정의롭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도대체 하느님에게서 어떤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1. 성공회신문 6월 28일치 []

경계의 파수꾼 –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Tuesday, June 24th, 2014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이사 40:1~11 / 시편 85:7~13 / 사도 13:14~26 / 루가 1:57~66,80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들 가운데 탄생 축일을 정하여 지키는 분은 성모 마리아(9월 8일)와 세례자 요한, 딱 두 분입니다. 정교회 성당에는 제대를 둘러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라는 성화벽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대 혹은 예수님의 이콘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양쪽 곁을 지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성서의 기록과 교회 전통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와 늘 비교하여 역사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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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겼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남성 제사장이었던 즈가리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요한의 수태고지를 믿지 못합니다. 그 탓에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났습니다. 젊은 여성이고 시골 아가씨였던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예수의 수태고지를 믿습니다. 마리아는 그 유명한 마리아 송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비교에서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제사장과 시골 무지렁이, 그리고 믿지 않음과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대와 성과 지위와 행동의 전환이 뚜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만두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기대하라고 외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을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신과 함께 이미 와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고 부르시며, 당신 자신과 하나가 된 ‘작은 그리스도’로 여기시고,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모본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 전통을 완성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정교회 전통에서는 9월 23일을 세례자 요한 수태고지로 지킵니다. 추분 때라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수태고지 3월 25일은 춘분 때라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의 선포’를 넘어서서 ‘말씀의 실천’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고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여러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중의 배신으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분은 이런 삶을 미리 알았을까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성모왕문, 5월 31일),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기뻐 뛰놀았습니다. 역사의 공명이 이 두 분에게서 시작되었고, 한 분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기꺼이 옛 역사를 마감하며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분은 그 희생을 이어받아 죽음과 부활로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런 비교는 두 분의 우열을 가리려는 일이 아닙니다.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할 때라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옛 시대가 자연스럽게 가고 새 시대가 자동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임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그다음에 오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자기 몸을 열었다면,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웠습니다.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 기쁘게 뛰놀았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 역사의 전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두고 신학자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는 시대와 시간의 경계를 헤아리는 세례자 요한인가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우리가 서 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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