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가짜 걱정, 진짜 신앙

Sunday, February 26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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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걱정, 진짜 신앙 (마태 6:22-34)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꽤 널리 알려진 이 티베트 속담에는 지혜와 핀잔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삶이 복잡하다 보니, 하느님께 모든 일을 맡기겠노라 다짐하는 신앙인의 삶도 염려와 걱정이 없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는 신앙인을 핀잔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를 밝히시고 우리 마음을 격려하시고, 마음의 방향을 바꾸라고 초대하십니다.

‘선택하십시오. 하느님입니까, 재물입니까?’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돈과 재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분명히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삶에 필요한 재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먼저 섬기는 일은 우리를 자유와 은총으로 이끌지만, 재물에 먼저 눈을 팔면 걱정과 불안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재물과 안정에 안달하다 생긴 불안과 걱정을 덜어달라고 하느님을 부르면 신앙이 아니라 염치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부추기는 재물의 성공과 지위의 성취는 우리를 자주 환상으로 이끕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우리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가 경고하는 ‘자기기만’입니다(1고린 3:18). 이 환상이 현실이 되어서 잠시 기쁨이 넘치기도 하지만, 금세 또 다른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마음과는 달리 타인의 성취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으로 다가오고,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얻은 사람은 그 성취감에 휘둘려 타인을 업신여기는가 하면, 얻지 못한 사람은 낭패감에 휩싸여 자신을 낮추어 봅니다. 재물이 가져다준 환상과 기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 그 자체를 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우리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손수 빚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수고와 숨결이 깃든 우리 존재가 저 잘난 환상과 저 못난 패배감에 둘러싸인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려 자기만의 ‘성’을 쌓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이 아니라, 자신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이 감옥에서 가진 것을 잃을까 염려하고, 더 상처받을까 걱정하고만 삽니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십니다. “감옥에서 어서 나오너라”(이사 49:9). 웅크리고서는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기만과 연민의 자기 중심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 막습니다. ‘가짜 걱정’에 휩싸여 자신의 위로와 안위를 먼저 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련히 하시겠느냐는 위로입니다. 그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구하라”는 명령에 따라는 사는 일이 ‘진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여러 질곡에서도 사랑으로 보살피시니, 우리는 세상을 자유와 정의와 평등으로 보살피는 신앙인입니다.

[전례력 연재] 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

Saturday, February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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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의 말이다.

신앙인의 삶도 기대와 예상처럼 평탄하지 않다. 신앙이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다. 누구도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신앙인은 이 ‘슬픔’의 세계에 발을 디뎌, 그 길에서 만난 다른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손잡고 함께 걸을 뿐이다. 그 끝에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있다. 신앙생활은 이 ‘밝은 슬픔’을 걷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순절은 ‘사십 일’과는 관계없이 시작됐다. 그 기원은 부활절을 기다리며 금식하는 관습이었다. 부활 잔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고 실제 몸이 목마르고 배고프게 했다. 몸이 그러하듯 마음도 그렇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되새길수록, 우리 삶에 사랑과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깊이 실감한다. 자기 욕망을 비우면,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들 자리가 그만큼 넓어진다.

사순절은 곧 부활밤의 세례 준비 기간으로 발전했다. 신앙은 배움과 훈련에서 나온다. 초능력자의 도움과 복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종교 ‘신심’일지언정, 신앙에는 못 미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 담긴 뜻을 배우고 익혀야 신앙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유아세례가 성인세례를 교체하면서 신앙교육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를 겪으면서, 4세기 즈음에 ‘사십 일’ 사순절이 정착했다. 예수의 광야 ‘사십’ 일 금식 기간을 모방하는가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도 의미를 따다 붙였다. 이때부터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다. 역사 안에서 사순절은 자기 절제와 비움, 신앙의 준비와 교육, 그리고 참회의 의미가 겹치고 두꺼워졌다.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동방교회에는 없는 서방교회만의 전통이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한 사순절 기간을 40일로 확실히 정하고, 부활일까지 주일은 제외하면서 ‘수요일’이 사순절 시작이 되었다. 1091년의 첫 기록이 선명하고, 12세기부터 서방교회 전체에 퍼졌다.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흙을 빚어 숨결을 넣어서 우리 생명이 나왔으니, 그 숨결이 없이는 우리 인간이 흙 먼지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되새겨주는 말이요, 다 같이 먼지인 처지에 서로 경쟁하여 지배할 심산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이를 깊이 새기고 뉘우치려고, 성공회 전통에서는 시편 51편을 읽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재를 이마에 바른 뒤 참회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이날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말이다.

우리가 걷는 삶이 ‘밝은 슬픔’인 것을 기억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참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자. 이마에 재를 받고 우리 운명의 본질을 되새기자. 성당에는 잘 보이는 곳에 재와 돌과 십자가를 설치하여 사순절 여정을 되새기자. 가정 어느 한쪽에는 모래와 돌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옆에 재를 담아 두도록 하자. 이제 사순절 순례의 기도처가 마련됐다!

  1.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25일치 5면 []

하느님의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Sunday, February 19th, 2017

A Pair of Trees, Dearborn, Michigan, USA. 1995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마태 5:38-48)

종교와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려는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연약한 자신보다 더 큰 능력자를 신으로 만들어 그 도움을 빌자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불행을 피하고 복을 구하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연약함을 틈타 종교를 악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을 종교의 숭배 대상으로 삼고 사람들을 얽어매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때 등장하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신과 결탁하여 사람을 짓누르는 정치권력에 대항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의 탈출을 이끄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해방과 자유의 경험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기억의 신앙을 마련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느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우열다툼은 우습기만 합니다. 그분의 햇빛과 비를 혼자서 독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창조의 하느님 앞에서 모두 같습니다. 다만, 인간은 하느님보다 낮은 미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보물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람들 저마다 그 사랑을 품고 있다는 확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이 관계를 기억하며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려는 약속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다시 존중과 예의의 율법이 남을 억누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면요? 개혁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뜻을 회복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주장과 성취를 향하면 율법의 길은 부패합니다. 율법은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남’을 향할 때, 그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너무 유명하지만, 문자 그대로 따르기 어렵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우리 잣대로 ‘원수’를 지정하지는 않았나요? 타인의 잣대, 하느님의 잣대를 적용한다면 그가 꼭 원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더 가까워집니다. 오늘 복음의 다른 명령들도 모두 ‘타자’와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새롭고 낯선 생명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신 데 있습니다. 인간의 거룩함은 창조의 하느님께 감사하고 낯선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흔적을 기뻐하며 함께 축하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합니다. 이 일을 잊을 때, 하느님께서 다시 새로운 창조와 변화의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낯선 타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자신을 바치실 때 역사가 바뀝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내놓아 우리에게 음식으로 나누어주실 때 거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하고 완전한 부활의 새로운 생명이 피어납니다.

새 창조와 부활의 축제인 성찬례는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을 기억하는 행동입니다. 함께 모인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태어난 것을 확인하고, 서로 최대의 예를 갖추어 존중하고 그들의 자유와 희망을 서로 격려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자신이 멋대로 세운 정의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자신의 빛과 어둠을 함께 비추는 곳입니다. 빛과 어둠이 불안하게 교차하는 우리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서로 깨져버린 관계를 조심스럽게 하나로 붙이는 일치의 자리입니다. 서로 같은 점을 찾아 동행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우리가 서로 거룩하다는 확신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이 거룩함이 하느님의 꿈, 우리의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