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전례력 연재] 주의 봉헌 축일 – 역사가 빛으로 만날 때

Saturday, February 11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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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봉헌 축일 – 역사가 빛으로 만날 때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11일치 5면))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주님의 성탄에 담긴 ‘빛의 오심’과 공현에 깃든 ‘빛의 널리 퍼짐’의 뜻은 주의 봉헌 축일에 절정을 맞는다. 1년 동안 교회 전례와 가정 기도에 쓸 양초를 축복하고, 새 촛불로 제대를 밝히고 순행하면서,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우리 신앙인이 빛의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희미해진 이 축일은 역사 안에서 복잡하게 발전했다. 대체로 공현 축일(1월 6일) 40일 후인 2월 14일에 지키던 관습이, 성탄 후 40일인 2월 2일로 바뀌어 자리 잡았다. 지금은 성탄 장식을 공현일 전야에 치우는 관습에 익숙하지만, 장식을 이날까지 남겨두며 성탄의 기쁨을 연장하는 전통도 많았다. 오랫동안 전례 색깔은 장엄과 절제의 흑색이나 자색이었지만, 몇 세기 전부터 기쁨과 환희의 백색으로 바뀌었다.

신학의 강조점도 결을 달리하며 겹쳤다. 아기의 봉헌이 초점인가 하면, 성모 정결례라는 별명처럼 산후 축복과 감사 예식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촛불 예식 자체로 빛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는가 하면, 나이든 세대의 간절함이 젊은 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만남이기도 했다. 한편, 이 봉헌의 기쁨 안에 서린 슬픔과 아픔이 아련하게 남는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신앙인도 삶 속에서 우리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아픔을 통과하면서 거짓 안에 “숨은 생각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아픈 사명을 새기며 신앙인은 사순절의 순례를 준비한다.

이러한 전례와 신앙의 역사가 신앙인의 봉헌 생활을 새롭게 비춘다. 요셉과 마리아는 빈궁한 살림에서도 작은 정성을 마련하여 바친다. 삶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마땅한 행동이다. 마침내 그들은 아기 예수를 봉헌한다. 봉헌된 아기 위에 우리 자신의 삶이 포개진다. 그리스도교의 봉헌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치는 헌신의 행동이다. 신앙은 역사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에 헌신하는 일이다.

이 봉헌의 현장은 새로운 만남의 공간이다. 인생의 황혼이 되도록 세상의 구원을 겸손하게 기다리던 시므온, 온갖 차별을 이기며 여성 예언자로 홀로 활동하며 늙은 안나를 만난다. 이들 신앙의 어른은 겸손한 기도로 새로운 세대를 격려하고 지지한다. 자기 시대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신앙이 황혼의 원숙한 신앙이라고 몸소 증언한다.

시므온의 찬가는 주님 봉헌 사건의 절정이다. 젊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여 신앙을 물려주는 일이 구원과 연결된다.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옛 종교가 아니라, 만민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신앙이 새롭게 펼쳐진다. 이방인들과 낯선 사람들도 누리고 기뻐하는 구원이 열린다. 이것이 신앙의 대를 잇는 방법이며 선교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걷는 사람들과 갓 태어난 이들이 신앙 안에서 만날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그리스도는 빛이다. 역사 안에서 그 빛을 들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남녀노소 저마다 작은 빛들이 모여서 한 무리 큰 빛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빛의 순례자들이다.

뒤집어야 열리는 행복

Sunday, January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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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야 열리는 행복 (마태 5:1-12)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널리 드러나셨으니, 그 제자들과 신앙인들도 그늘진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삽니다. 신앙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오히려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만든 음습한 그늘이 널렸습니다. 거기에선 거짓이 곰팡이처럼 번집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며 그 가르침과 길을 따르라 하셨으나, 율법은 금세 스스로 ‘선택받은 자’라고 으스대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새 역사를 여시며 새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과거 율법을 뒤집어, 사람에게 참된 행복을 선사하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새롭게 열린 은총의 법입니다. 복음서를 가로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 다섯 묶음은 모세오경을 교체하고 뒤집습니다. 그 첫 단락 참된 행복 선언은 십계명을 넘어서며 우리 시선과 행동을 새로 열어줍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나누어야 할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펼쳐야 할 관계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명령과 조건이 가득한 계명은 압박과 통제의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해, 복음은 우리의 모질고 거친 삶 자체에서 깃든 복락의 씨앗을 발견하시며 축복합니다.

모세가 험하고 외로운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여럿이 함께 오른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락을 선언합니다. 높은 산의 지위를 독점하는 권력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올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가르칠 때, 참된 권위가 섭니다. 세상에서 작고 비천하다고 취급받는 이들을 ‘산 위’로 끌어올려 ‘곁에’ 앉히실 때, 예수님께서 여시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작동합니다. 세상 풍파로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함을 갖추고 정의를 목말라 하는 사람, 깨끗한 마음으로 자비와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을 받고 그 삶이 칭송받는 질서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예수님께서 뒤집은 질서를 깊이 마음에 새깁니다. ‘이 세상 안에서 지혜 있고 강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약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1고린 1:26-28). 바울로 성인은 말끝마다 ‘이 세상’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이 세상’에 대항하여 ‘하느님 나라’에 깃든 가치를 세우라는 요청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성인이 말한 대로, “이 세상의 사사로운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넓고 거룩한 사랑”을 분별하라는 당부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경쟁하여 얻어내고 오른 성공과 성취는 예수님이 선포하는 은총과 행복에서 거리가 멉니다.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함께 초대하고 끌어올려 곁에 앉혀 누리는 삶이 행복의 길입니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서 돌이켜야 참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비추시니, 함께 올라 누리며 빛의 길을 걸어갑시다.

신앙 – 하느님 나라의 이어달리기

Sunday, January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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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하느님 나라의 이어달리기 (마태 4:12-23)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에 가셨으며, 어둠 속에 앉은 백성들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빛을 비추었습니다. 역사 안으로 파고드는 하늘나라의 빛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과 행동을 돌이키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고정관념과 기득권을 버리는 결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쓰러진 이들과 아픈 이들, 연약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이처럼 요약하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와 그 뒤를 잇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히시자’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자신의 삶을 연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뒤를 이은 제자들의 운명과 우리 신앙인을 연결하는 고리는 ‘잡히다’는 낱말입니다. 성서 원어를 좀 더 정확히 드러내면, ‘잡히다’는 말은 ‘넘겨지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헤로데라는 정치권력에 ‘넘겨져서’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뒤따른 예수님도 종교와 정치의 합작 권력에 ‘넘겨져서’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따랐던 제자들도 박해자의 손에 ‘넘겨져서’ 순교합니다. 이 신앙의 연결고리 안에서 우리 신앙인의 운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성찬기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잡히시다-넘겨지다’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빵과 잔을 들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몸과 피이다’에서 ‘주다’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성찬례 때마다 우리 신앙인은 요한과 예수, 그리고 제자들의 삶을 넘겨받습니다. 그 삶은 때로 억울한 모함이고 고통스러운 박해이고, 죽음과 순교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 하느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기득권의 고집이 아닌 포기와 양보 안에서 새 역사가 열립니다. 우리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넘겨받는’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시는 은총이 뒤따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파고들어 펼쳐진 하느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요한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을 목격합니다. 신앙은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벗어나 늘 새롭게 배우며 고쳐나가는 삶입니다. 거짓과 어둠에 맞서 진실을 선포하고 밝히려는 끈질긴 노력입니다. 마침내 온갖 권력 앞에서 무시당하고 빼앗기고 상처받은 이들을 싸매 고치고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이 일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 훈련하고, 세상 속에서 실천합니다. 이 일이 누그러지면, 교회는 하느님의 유산이 없는 여느 친목 단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요한과 예수님, 그리과 제자들을 이어 우리는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 나라의 바통을 이어받아 달립니다. 거들먹거리는 온갖 권력에 저항하며 실패하고 상처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어주고 넘겨주는’ 역사와 신앙의 이어달리기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조금씩 펼쳐갑니다. 이렇게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