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전례력 연재] 공현절 – 세상의 빛 예수와 신앙인

Saturday, January 2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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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절 – 세상의 빛 예수와 신앙인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공현은 ‘널리 드러난다’ ‘빛을 가져온다’는 뜻을 지닌 그리스 낱말 ‘에피파네이아’에서 따왔다. 공현절기의 주제는 ‘예수 안에서 널리 드러난 빛과 영광’이다. 예수의 아기 성탄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비쳤다. 세상의 어둠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빛을 이기지 못한다. 공현절은 성탄으로 시작된 작은 빛이 구원의 역사로 펼쳐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교회 초기 전통에서는 공현일인 1월 6일에 주님의 세례 사건을 기념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점차 공현절의 극적인 전개의 세 가지 사건은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방문과 예수의 세례,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로 정해졌다. 최근에 성서정과가 3년 주기로 바뀌면서 이 주제도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올해 ‘가’해는 가나 혼인 잔치 대신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가르침으로 펼쳐진다.

동방박사의 여행은 공현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교회 전통은 이들의 여정과 선물을 진리의 빛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인의 순례로 해석했는가 하면, 예수는 유대교라는 혈연과 지역의 종교를 훌쩍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자가 되신다고 선포했다. 예수의 삶을 따라 빛의 길을 걷는다면,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이에게 구원이 열려있다는 새로운 역사이다.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새롭게 바뀌었다는 선언이다. 지금까지 유대교든 어는 종교든 ‘하늘’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늘’에서는 처벌과 심판이라는 두려운 말이 들리곤 했다. 그런데 예수의 세례 사건에서 ‘하늘’은 새로운 목소리로 예수를 감싸고, 예수의 세례를 받은 우리를 감싼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께 기름 부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름 부으시어, 이 세상에서 예속과 굴종으로 살아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왕처럼 떳떳하게 살며, 다른 이들도 왕처럼 섬기며 살라는 명령이다.

신앙인은 예수의 제자로서 이 사랑의 음성과 명령에 대답할 책임이 있다.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 이 사랑의 관계를 널리 펼치며 사는 일이 제자도이다. 공현절에 펼쳐지는 빛과 영광의 드라마는 예수에게서 그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그 세례와 가르침을 나누는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가’해 마태오의 공현절기 주일 복음이 가르치고 이끄는 초대이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신앙이다.

다시, 공현절은 우리 삶과 역사에서 교차하는 어둠과 빛을 돌아보게 한다. 삶의 여정에서 사람마다 겪는 영적인 어둠이 적잖다. 손쉬운 종교는 이를 해결하려면 ‘덮어놓고 신을 믿으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공현절의 신앙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펼쳐 놓으라고 초대한다. 빛 앞에서 어둠 속에 감추인 모든 것이 드러난다. 최근 우리 사회는 진실의 빛이 거짓의 어둠을 걷어낸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공현절의 신앙인은 우리 교회가 빛의 길을 걷고 있는지 성찰한다. 다시는 빛과 진실을 가리지 않고, 널리 드러내기 위하여.

(사족: 애석하게도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가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성서정과에는 공현절기의 뜻과 신학이 사순절 직전까지 드러난다. 나중에라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여 바로잡을 일이다.)2

  1. 성공회신문 2017년 1월 21일치 5면 []
  2. 성공회 신문 편집자 주: 성공회 신문은 주낙현 신부(서울주교좌성당)을 필자로 초대하여, 올해 1년 동안 교회력에 따른 주요 절기와 축일의 역사와 의미, 그 전례를 안내하는 기획 연재를 마련한다. []

하느님의 어린 양 – 예수의 정체, 신앙인의 선교

Sunday, January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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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린 양 – 예수의 정체, 신앙인의 선교 (요한 1: 29-42)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정체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행동의 핵심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속의 억압과 질곡으로 생긴 죄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자신을 내어 바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예수님의 삶에 자기 삶을 포개며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두려운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와 평화의 몸짓으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과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언행이 돋보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태중부터 알아보았던 사촌’이었지만, 자신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혈연과 지연 같은 인맥으로 엮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실하고 투명한 삶에서 받은 도전을 인정하고 새로 배우는 일에서만 바른 신앙이 솟아나고 진일보합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새로운 스승을 소개합니다. 새 스승을 따라 새 길을 걷겠다는 제자들을 기쁘게 떠나보냅니다. 과연 신앙의 역사에 우뚝 선 큰 인물입니다. 옛 세대가 새 세대를 격려하며 밀어주는 넉넉한 행동에서 새 역사가 펼쳐집니다.

요한이 바라본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함께 머무시는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번 받는 물의 세례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청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직접 받은 세례는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에게 들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위로와 격려, 희망을 선언합니다. 신앙인의 삶에서도 여전히 아픔과 기쁨, 슬픔과 즐거움, 실패와 성공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밝은 대로를 걷든, 그늘진 험로를 헤매든,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오셔서 머무시고, 베푸시며,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대답한 대로,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겠다는 다짐이 신앙인의 제자도입니다. 이렇게 다짐하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약속을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합니다. 어느 처지에서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당신의 영광을 빛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지극히 귀하게 보시고, 나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이사 49:5).

이제 하느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의 삶과 우리의 삶에 겹쳐져 새롭게 펼쳐집니다.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모시는 우리 신앙인의 정체요, 선교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 신앙의 삶, 신앙의 선교 행진에 함께하시니, 이 길에 초대받은 우리는 정녕 복됩니다.

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Sunday, January 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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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루가 2:15-21)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거리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 아래 고함치는 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마저도 당황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 ‘전도’ 열정을 마음으로 칭찬할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여러 종교의 포교 행태가 자칫 광신으로 그 가르침의 핵심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안에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기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부추기면, 그 종교 자체와 그 종교인마저 애꿎은 비난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민망할 지경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때, 신앙인은 우리가 믿는 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해 첫날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을 지키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그 다짐은 ‘예수-임마누엘-그리스도’의 이름 뜻을 되새기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 사건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사람이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일에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놀라운 행동이 아기 예수 안에서 펼쳐집니다.

새날을 여는 분은 이제 정치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우악스러운 외침과 강요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려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입니다. 춥고 배고픈 빈곤의 현실에 오시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 안에 머무십니다. 다르고 낯설다고 배척당하여 서성이는 이들 옆에서 걸으십니다. 진실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사랑을 회복하려는 수고와 땀을 함께 흘리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왕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동행하시며 부서진 세계에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분이 진정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동행을 걷지 않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 이들은 지배자들이거나 위선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은 우리 자신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창조 세계의 평등한 주역으로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시편 기자와 함께 새날 새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십니까?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