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부활의 고백과 신앙

Sunday, April 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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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부활의 고백과 신앙 (요한 20:19~29)1

이제는 “의심하는 토마”라는 낙인을 지울 때도 됐습니다. 이런 별명은 요한복음 기자의 미필적 고의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 나타난 신앙고백과 초대 교회의 전설이 전하는 선교 활동을 보더라도, 토마는 부활의 선교 정신을 용기 있게 실현한 사도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모였던 집에 그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뵈었다는 소식에야 그 집에 돌아와 애타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의문은 두려움에 떨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토마가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다녔다는 상상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절박하고 애타는 용기가 그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고 ‘성령의 숨’을 불어넣으셨지만, 그들은 그다음에도 여전히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토마만이 두텁게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인사와 말씀에 자신의 입술과 마음으로 응대하는 사람은 토마 뿐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무서워서 안으로 문을 닫아거는’ 상황에서 비롯하곤 합니다. 상실감과 배신감에 지쳐서 자기 마음을 걸어 잠그면, 오히려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새로운 죄책감이 찾아듭니다. 자신의 신앙 체험에만 몰두하다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집착하여 자기 안녕이라는 좁은 성안에 스스로 갇히곤 합니다. 이 위태롭고 안절부절못한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닫힌 벽을 뚫고 부활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 자신을 용서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삶을 봉쇄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온갖 분열과 차별, 편견과 미움의 벽을 꿰뚫고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서지고 결함 있는 ‘틈’을 인정할 때, 부활의 생명이 그 ‘틈’ 사이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삶에서 얻은 찢어지고 터진 상처 사이, 의심하며 흔들리는 마음의 틈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꿰뚫고 들어오시는 부활의 생명에 자신의 연약함을 여는 일이 참된 용기이며 바른 신앙입니다.

토마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앙을 정직하게 대면했습니다. 정직한 의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평화와 용서라는 성령의 숨을 먼저 받은 다른 제자들에게서는 신앙고백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독특한 체험이나 특정 교리를 덮어놓고 확신하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 전체를 개방하는 신앙과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불완전하게 흔들리는 삶 앞에,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의 진실을 찾으려는 애타는 용기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와 용서의 음성으로 우리를 감싸며 우뚝 서 계십니다. 그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3일 부활 2주일 주보 []

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Sunday, March 2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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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루가 23:1~49)1

‘호산나, 찬미 받으소서’ 하며 외치던 환호와 ‘그 사람을 죽이시오’ 하는 성난 외침 사이에 도대체 무슨이 있었던 것일까요?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습니다. 성지를 축복하고 손에 받아든 채로 우리는 주님의 수난 복음을 듣습니다. 이 격렬한 변질과 모순의 순간을 성주간 전례 안에서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며 뼈아프게 직시하라는 부탁입니다.

불의한 재판과 모진 고문,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배신은 재빠르고, 희망의 신뢰는 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욕망으로 맞바꾸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 진실을 알고도 모략으로 덮어버리는 권력의 뻔뻔함을 목도합니다. 힘을 보여줄 때 가까이하던 이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멀리 주변부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십자가 고통의 목격자로 중심에 등장합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사회 외면의 불의 속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며, 인간의 기존 생각과 관계를 뒤집는 일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합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로 진실과 정의를 묻어버립니다. 서로 경쟁하던 기득권자들은 정치적 인기주의에 몸을 던져, 무고한 사람을 희생하는 불의를 작당하면서 서로 ‘다정한 사이’가 됩니다. 무죄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뻔뻔한 변명을 내놓습니다. 모든 형태의 기득권자와 권력자가 보이는 이런 행태를 신앙인은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항변도 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에 다가온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시골 무지렁이 키레네 시몬이 난데없이 등장하고, 제자들마저 도망친 십자가의 길을 눈물 흘리며 동행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십자가 처형 틀 위에서 같은 죽음의 고통을 받던 죄수가 낙원의 약속을 받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내력, 재력과 권력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릴없이 고통과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이름없이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를 선언합니다. 고통의 연대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 안팎에 너절한 차별과 분열과 분리의 ‘휘장’을 찢어내는 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환호의 종려가지가 아니라, 고통의 십자나무 위에 우리의 희망과 세상의 구원이 달려있습니다. 높은 권력의 기득권을 ‘비워서’ ‘종의 신분’으로 내려앉아 세상 고통의 밑바닥과 손을 잡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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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20일 성지 및 주의 수난 주일 주보 []

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Sunday, March 13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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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요한 12:1~8)1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이 향기로운 이야기는 다채로운 대비와 역전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권력과 재력의 셈이 빠른 ‘남성성’과 겸손하고 넉넉한 ‘여성성’이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차갑고 인색한 돈과 방안을 부드럽게 휘감는 향유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위에서 힘을 부리는 이들을 내려 앉히고,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을 올려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선명합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희랍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구약성서에서는 특별한 사람을 뽑아 왕과 예언자, 사제들을 세우며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정치적인 업적이 분명한 지도자를 ‘메시아’로 호칭하기도 합니다. 기름을 붓는 사람도 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입니다.

신약의 복음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구약의 왕이나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권력과 행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그런 지위에 있던 이들과 불편하게 대결합니다. 기름 붓는 장면도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사람은 당시에 신분 낮은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것도 일 년의 수고와 땀을 다 모아야 살 수 있는 분량의 기름을 아낌없이 부어드립니다. 한 생명을 어루만지고 감사하며 축하하려는 마음때문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그 향기는 자기 혼자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그 집에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향기의 시간과 공간에 감싸여 다른 이들과 서로 연결되고 함께 삶을 즐깁니다.

현장에 있던 ‘남성’ 제자 가리옷 유다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발에 부어버린 향유 값이면 가난한 사람을 여럿 도울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돈의 효율적인 사용에 관한 고민이 어쩌면 갸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런 즉각적인 해결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문화를 경계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우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제도의 성과에 집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오해와 다툼이 잦아지며 비난과 요구가 더 완고해지고는 합니다. 급기야 서로 멀리하고 피하는 ‘썩는 냄새’를 풍기는 일로도 번집니다.

오늘 향유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과월절을 앞둔 ‘만찬장’입니다. ‘썩는 냄새’가 나도록 부패한 라자로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 그 회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갖 수고와 땀으로 맺은 향기를 아낌없이 봉헌하는 성찬례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을 모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향기를 다른 이들의 머리와 얼굴, 손과 발에 넉넉하도록 듬뿍 부어 축복합니다. 우리 삶의 구원을 축하하는 성찬례에서 신앙인은 서로 섬기며, 이 세상의 메시아/그리스도로 일어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서로 기름 붓는 이들로 세워주고, 겸손하게 기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함께 축하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을 주님의 향기로 가득 채워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13일 사순 5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