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에 관한 상념 2: 나의 ‘투정’

June 19th, 2010

아마 1998년이었을 것이다. 한국 성공회의 유일한 매체인 [성공회 신문]에 ‘세계 성공회 소식’이라는 난을 만들어 글을 내보냈다. 이후 6년간 그렇게 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한국에서 너무도 작은 ‘성공회’라는 교단에 대한 열등감을 세계적으로는 개신교 최대의 교단인 ‘세계 성공회’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넘어 보자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의 치기이기도 했으나, 작은 이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다. 둘째는 훨씬 내부적인 이유였다. 우리 교회의 행태를 세계 성공회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비춰보고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와는 서로 다른 경험과 도전, 실패와 성공, 슬픔과 기쁨을 나눠서 배워야 하리라 생각했다.

6년 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을 그만두었다(그 ‘말’과 ‘탈’은 적지 않겠다). 의지력이 고갈되기도 했으며, 이 또한 나 혼자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시도는 그리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난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에게는 별로 서운한 내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서운했다. 이후에도 가끔 세계 성공회 관련 소식을 보내거나 올리기도 했지만,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는데 전혀 소개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풀에 견디지 못해 던졌던 호외성 기사이거나 기고였다.

그동안 내 관심은 다른 프로젝트 로 이어졌다. 질문 게시판에, 블로그에, 포럼에, 위키까지 뻗쳤다.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블로그를 빼놓고는 피드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피드백이 없으니 내 잘잘못을 평가할 눈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메일링리스트에 트위터까지 해봤다. 마찬가지 느낌이다. 흥미로운 일은, 그 적은 피드백마저도 우리 교회 외부에서 더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와중에 몇 가지 사건도 있었다. 그 때문에 생긴 상념 몇 가닥은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적어 두었다. 그 사건 속에서 발견한 것 하나는, 숨죽인 독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교회 안팎으로 떠돌며 고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숨죽임이 편만하여, 침묵으로 자리 잡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기다려 보자’라는 유보의 의식이, 나중에는 또 다른 억압의 논리가 되는 일을 여기저기서 봤기에 걱정스럽기도 하다.

선별하여 집어치우든, 새로운 일에 손을 대든,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보려 한다. 그 어떤 형태의 지배하는 권력, 억압하는 권력에도 저항하겠노라고 다짐한 처지이니, 그 사적인 다짐에 책임을 져보려는 것이다.

이 책임의식은 내 현실을 돌아보면 매우 모순된 것이다. 공부하는 처지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보고 배우는 처지는 나를 지식과 정보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한다. 성직자인 것도 어떤 신자들에게는 권력이다. 나보다 어린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나는 여전히 권력이다. 반면, 누군가에게 나는 여전히 철없는 사람이요, 경험 없는 이요, 아직 나이 어린 ‘것’이다. 성직의 위계에서 여전히 밑에 있는 이요, 생계 능력이 거의 없어서 아내의 등을 쳐 먹다 못해 골을 빼먹고 기생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는 있어 보이는 선생이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덜 떨어진 학생이다.

그러나 이 겹치는 모순을 인정하는 일은 내게 축복이기도 하다.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권력자이기도 하고, 또 다른 여러 형태의 권력 아래 있는 ‘신민’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시하는 일. 그 순간 나는 아직 선로를 까는 노동자의 위치에 있다는 소명을 내 의식에 강제하고, 나 자신을 이끌려 한다. 그리고 그 강제의 실질적인 방법은 내 권력을 보장해 줄 어떤 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나누는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억압하는 권력이 되지 않은 유일한 길이요, 궁극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발뺌: 이마저 ‘인정해달라는 투정’으로 핀잔받을 수도 있겠다. (어디서는 비꼬는 말로 “인정 투쟁”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던데, 인정해달라는 게 ‘투쟁’까지야 되겠는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정은 맞다. 그리고 이런 투정 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도통하도록 으젓한 사람이 아닌 탓이니, 그리 봐 주시면 좋겠다.

나눔에 관한 상념 1: 권력의 지점

June 19th, 2010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은 세계 성공회 여러 곳에서 진행되거나 논의되는 사안들,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고민과 경험을 우리말로 적절하게 소개받지 못한다. 언어의 벽 때문이다. 이 벽에 문제가 없는 이들이 꽤 많지만 자기가 듣고 본 것을 대체로 나누는 일에는 인색한 듯 보인다. 그동안에 소식과 정보를 접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간극은 넓어진다. 정보에 대한 노출과 소유가 사적인 부분으로만 끝난다면 굳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관계의 그물망인 교회 안에서 정보를 가진 이들과 정보를 갖지 못한 이들 모두에게 왜곡은 점점 커진다. 이 왜곡은 모두 전략적인 갈등에서 비롯한다.

어떤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이는 ‘권력자’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 정보력은, 그것을 못 가진 사람에게는 분명히 권력이다. 여기까지는 중립적인 의미의 ‘권력’ 혹은 ‘권력자’이다. 그 중립이 깨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그 권력을 오용하여 휘두르는 순간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그 정보력, 그 권력을 공유하지 않고, 그 간극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순간, 이미 중립은 이름뿐이다. 소극적으로는,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머뭇거리는 일, 중립적인 듯하면서도 정보의 간극을 좁히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일, 좀 더 적극적으로는 그 정보력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무시하고 억누르는 일, 이 모두, 이미 중립을 벗어난 권력의 억압적 행사이다.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는 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자는 억압을 행사하는 권력에 한 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일방적 시각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가 별로 없다고 치부되는 이들은 정말로 권력이 없는가? 그래서 그냥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소유’에 기반을 두어 권력을 드러낼 때, 같은 형태의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늘 대체 권력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경험과 경륜이 단적인 예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학자가 있어도, 그 앞에서 경험과 경륜을 내세워서 그 지식과 주장과 대결할 수 있다. 당연한 근거이고 권리이다. 문제는 지식의 권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대체 권력의 의욕이라 할 만하다. 이 순간 자기 방어 기제 역시 권력화의 길로 들어선다. 자기 말고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자기만의 폐쇄 회로를 작동시킨다. 종종 이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역시 무시한다.

이 현상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이 오래된 평행선을 교차시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그 교차를 위한 나눔은 서로 부대끼는 일이고 힘겨운 일이다. 대체로, 불편한 일이고, 도전받는 일이다. 그 탓일까? 지식과 정보를 가진 이들은 적극적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른 이들의 경험과 경륜에 비추어 좀 더 구체화해서 도전하여 서로 자라나려는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 탓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의 권력을 승인해 준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간극이 좁혀지기는커녕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서로 이 간극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교회 내 의사소통의 내용과 방식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외양과 수사는 화려하지만, 그 실천의 내용과 질은 퇴보했다고 본다.

지나치고, 단순한 시각이요, 억울한 평가라 볼 멘 소리 할 수도 있다. 이 진단이 잘못이길 바란다. 다만, 서로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는 한, 서로에게 억압자가 되고, 서로에게 피해의식을 느끼며, 서로 반목한다. 학교와 교회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하며, 성직자와 신자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성직자 고하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하며, 신자의 연륜 고하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이 전략에서만큼은 모두가 억압자이고, 모두가 피억압자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모두 안전한 관계이기에, 이 평행선은 유지된다. 무의식으로나마 모두 야합하는 전략이다.

여기서 그치고 마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 그 권력의 이득을 챙기는 이들은 따로 있다. 어느 쪽에서나 좀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좀 덜 가진 이들의 것을 차지한다. 평행의 선로를 끝 없이 죽어라 놓는 이들이 있다면, 그 위를 멋 부리며 기차를 모는 이들은 따로 있다. 그 기차에 편히 몸을 얹은 이들이 그 기차를 멈추겠는가? 변화는 선로를 놓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스스로 기차에 올라 타고 있다거나, 언젠가 선로 노역을 벗어나 기차에 올라 탈 수 있다는 삿된 기대에서만 벗어난다면.

이 거친 평가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다시 도돌이표가 되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반목의 평행선은 계속 유지된다. 그러니 주장하거나 이식하려 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 나눔의 씨앗이 있다면 거름 주고 키워내야 한다. 그 나눔의 다양한 가지를 계속 일으켜야 한다. 우리 교회를 살려 지탱할 유일한 방법이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쇼리 주교, 영국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설교

June 16th, 2010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가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 미사에서 전한 설교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쇼리 주교의 방문과 설교, 성찬례 집전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논쟁들이 있다고 하나, 기회가 닿으면 그 논란의 지경을 살피겠고, 우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교문 및 설교 녹음(영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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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후 2주일
2사무 11:26-12:10 / 갈라 2:15-끝 / 루가 7:36-8:3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The Most Revd Katharine Jefferts Schori
Presiding Bishop of The Episcopal Church

저는 악명 높은 곳에서 왔습니다.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적인 네바다에서 교구장 주교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에 적용하는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을 알코올중독자나 약물중독자들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 있을 때, 꽤 널리 돌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이른바 마담이라는 포주와 그 고용인들에게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따뜻한 환대를 통해 밤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들러 쉬도록 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의 저녁 식사 참석자처럼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가 들인거야?’ 그래서 그 여성들은 그 저녁 식탁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성공회 어느 부류는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꼭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물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요. 이런 식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응답하고, 예배에 쓰이는 여러 책을 적절하게 잘 알아서 찾아야 해. 앞문은 절대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늘 앉는 자기 자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팔을 펴서 누구나 환영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압니다.

제게는 연세 지긋한 친구 한 분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대학 채플린으로 일하시던 매우 기발한 신부님이십니다. 한번은 이 분이 미국 횡단 여행을 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캠핑해야 해서 매일 씻지는 못했죠. 그런데 성직 셔츠를 입고 교회에 가면 다른 대접을 받더라는 거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로드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님은 임기 중 마지막 안식년의 일부를 노숙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여성 주교인 이 분은 자기 교구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자고, 주일에는 그 위층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노숙인인 자신을 환영해 잘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줄 바로 옆에 앉은 냄새 나는 노숙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거나, 기꺼이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불청객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타자’를 두려워하도록 할까요? 우리의 오랜 유전자 기억에는 낯선 이를 만나면 곧장 각성 상태로 이끄는 어떤 장치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존 장치입니다. 낯선 이를 경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죄를 두고 냉큼 심판하려는 비약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경쟁하려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이쿠, 고맙게도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죄 많은 여자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시몬의 집을 배회하던 그 여인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여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그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저런 저런, 저 여자 이제 향유를 발라주고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 보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작자들인 줄 알겠네, 알겠어 할 것 아냐? 참 내.”

저들이 과도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덮어씌우는 경멸은 아직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응답이 바로 그 여인의 용서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축하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걸 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 대한 용서의 증거가 이미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꾹꾹 눌러 담고도 넘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머리카락과 나르드 향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서 우리 자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우리 주변 사람들 속에서 그 두려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다른 식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거리의 여인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용서받은 여인은 탕자의 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오누이들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껍데기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 가족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껍데기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그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로 우리와 마음 깊이 ‘고향으로 환대’하는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나가도록 하는 일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릅쓸 모든 위험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로 성인께서 갈라디아 서신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자신이 율법에서 지시하는 세부 사항을 지키는 것이 마치 베니어합판의 여러 층을 쌓아 붙이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쌓여가는 층들이 합판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층들은 인간 안에서 벗겨져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투명함과 맞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층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리로 이끕니다. 바울로 성인은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사람 안에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속 깊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망을 되새기고, 그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자비심입니다. 바로, 사랑에 우리를 여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몰인정한 주인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식사 잔치는 훨씬 더 흥미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이들을 저버린다면 자비심의 실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요, 그 여인의 눈물이 흘러 넘친 것처럼, 그들도 흘러 넘칠 가능성입니다. 껍데기가 벗겨나가도록 놔두는 일은 아주 모험 어린 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그 껍질 밑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동적인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이 저녁 잔치를 시몬에 남겨 두시고, 다른 곳을 방문하러 떠나십니다. 방탕한 이를 향한 사랑과 방탕한 이를 향한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그분의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분의 식탁 동료는, 그 열두 명과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이었습니다. 흠… 굳세고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셋은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그들은 그 공동체를 돕고 먹였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깊이 받아들여지고 깊은 사랑을 알게 되어 치유와 용서를 얻은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찍어 내려는 자기 방어적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눈물을 감추거나 값비싼 향유를 숨겨두는 일이 사랑을 펼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마련된 자리로 이끌었으며, 이로써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염려마저 치유했습니다. 이 식탁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눈물과 떠돌이의 입맞춤, 그리고 고향의 맛 난 냄새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시렵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로이 나가십시오. 평화에 기대어 낯선 세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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