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제직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June 28th, 2010

지난달부터 성직 서품이 곳곳에서 있다. 새로운 사제들이 나오고, 부제들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서품 전례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겼을 테다. 예년과는 달리 몸이 참석할 수 없으니, 멀리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합하여 축복한다.

어떤 이는 성직자들 안에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해온다. 한 개인의 지향과 영성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신자요, 사목자이겠으나, 특정한 전통의 공동체(성공회) 안에 녹아들어 그 책임을 지는 ‘사제’인지는 모르겠다는 고민 어린 비평이다. 어느 틈엔가 어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빌미로, 사제 개인들은 공동체의 전통 안에서 받은 사제직의 실천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곤 한다는 불만이다. 시쳇말로, ‘몸은 이 교단에 두어 옷까지 걸쳐 입었는데, 사고와 행동은 전혀 딴 동네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본다. 사제직 ‘본연’에 대한 끝없는 반성은 필수적이다. 규정된 기능과 행동만을 요구하는 교회 조직의 권위주의가 세를 부릴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런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 저항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만연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특정 전통의 공동체 안으로 서품받은 일을 잊거나, 애써 모른 체하려는 게 보인다는 걱정이 일기도 한다. 대체로 ‘본질주의’는 핑계의 한 방법이다. 사정이 걱정하는 그대로라면, ‘평신도’ 사목자로 남되, 그 특정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로는 자처하지는 말 일이다. 어쨌든, 그 의미의 ‘본연’과 그 특정한 공동체 전통의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매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사제직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평신도로 식별하여 살았던, 스트링펠로우에게서 몇 마디를 인용하여 되새긴다. 이는 교회와 사제직에 대한 ‘본연’의 고민일 테니, 다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이를 씨줄 삼아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성직자와 교회는 각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드러내야 하는 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는 교회 전통 안에서 경험하고 논의하며 정리한 내용들과, 서로 다른 맥락과 현장의 경험과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화를 부추겨 계속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서가 기술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교류와 격동, 갈등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대신해서 살아간다.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낯선 이요, 이방인이다. 사회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세상의 사람들과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져서 그 사회에 거스르는 행동을 피하는 도피주의의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은 성사적 예배로 모여서,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몸의 구성원들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사제직에 서품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그 사제직과 사목 활동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을 세상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임(congregation)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그 몸의 구성원에게 펼치는 사목 활동이다. 그 관계의 양상은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교회,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교회의 극도로 복잡한 생명 활동을 향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여, 그들이 세상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게 쓰도록 돕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고해 성사의 활동이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임무와 증언을 듣고, 그 몸의 구성원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뤄가야 할 다른 모든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사목 활동은 교회의 전통, 즉 성령 강림 사건 이래 펼쳐진 선교 사명과 그 일관성을 보살피며 지켜나가는 활동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과 거룩함에 투신하는 것이다.

William Stringfellow. A Private and Public Faith, 1962.

‘주교관 게이트’ – 몇 가지 생각

June 20th, 2010

앞서 적은 일련의 사태와 논란은 세계 성공회에 대한 이해에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또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의 처지도 이해할 만한 구석이 많다. 한편, 영국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발전과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다름은 이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성공회는 같은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맥락에서 역사적인 경험을 거치며 서로 겹치면서도 다른 신학을 발전시킨다. 이 점들은 세계 성공회 여러 관구에도 적용된다. 역사적 경험과 그 신학화 과정은 전통의 연속과 단절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갈등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이 성공회가 자신의 독특한 신학과 신앙의 전통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태도요, 방법이요, 길이다. 다시 말해, 성공회는 교리와 치리를 위에서 내리는 교도권(magisterium)을 거부하는 교회 전통이요, 개인들의 모임(congregation)보다는 공동체의 네트워크(교구:diocese)를 교회 단위로 생각하여 그 네트워크가 처한 맥락에서 나누는 하느님 경험을 통해서 교회의 신학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교회 전통이다. 이런 전통의 특성을 되새기며 이 사안도 봤으면 한다.

1. 여성 주교 – 영국 성공회의 고민
세계 성공회의 절반은 아직 여성 성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 성직을 서품하는 나머지 절반은 다시 여성을 부제(deacon)까지만, 사제(priest)까지만, 그리고 주교(bishop)에게도 열어 놓은 교회로 나뉜다. 성공회의 여성 성직은 1944년 홍콩의 리 팀 오이(李添嬡: 1907-1992) 사제 서품 이후 줄곧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 성직 운동과 더불어 1977년 이후 미국 성공회는 여성 성직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영국 성공회는 그보다 한참 뒤인 1992년에 허용안을 통과시키고, 1994년 첫 여성 성직 서품이 이뤄졌다. 이때 영국 성공회 내 보수파들 일부가 성공회를 떠나 천주교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후 여성 주교직이 내내 논란이 되었지만, 실제로 2014년이면 여성 주교직 허용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영국의 잔류 보수파(이른바 ‘성공회-가톨릭주의자’ 일부와 ‘복음주의자’ 일부)는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여성 주교직이 시행되면, 성공회를 떠나겠노라 위협한다.

이런 처지에서 그들을 달래고 있는 영국 성공회의 입장이 참 난감하다. 힘겹게 대화를 이끌고 있는 처지에서, 아무리 다른 나라 성공회의 주교라고나 하나, 여성 주교가 영국 성공회 안에서 ‘주교’로서 공식 행동을 보이면 꼬투리 잡는데 명수들인 보수파의 눈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점을 고민하셨을 것이다. 주교관을 쓰지 말라고 요청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로완 윌리암스 주교 자신은 여성 성직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분이다. 그러나 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처지에서 난감한 처지였을 것이다.

2. 주교의 상징
그렇다면, 실제 주교가 주교관을 쓰지 않는다고 주교가 아닌가? 주교관만 주교를 상징하는가? 주교가 입는 자주색 성직 셔츠나 캐석(성공회에서는), 주교 십자가, 주교의 반지는 문제가 안 되는가? 쇼리 주교는 주교관을 쓰지 않는 대신 주교관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순행했다. 자주색 셔츠도 입었고, 주교 십자가 목걸이로 걸었고, 주교 반지도 끼고 설교를 하고 성찬례를 집전했다.

3. 주교관(mitre): 형평성 문제
영국 성공회가 여성 주교직을 ‘아직’ 인정하지 않으니, 어떤 여성 주교도 영국 성공회 안에서 주교인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영국 성공회는 그 원칙을 지켜 왔는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쇼리 주교는 이미 그보다 몇 년 전에 영국의 다른 주교좌성당에 초대받았고, 성찬례는 집전하지 않았지만, 주교관을 썼다. 영국 성공회를 방문하여 전례에 참여한 다른 여성 주교들도 주교관을 쓰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른 교단의 주교(스웨던 루터교회 같은) 주교가 영국에 방문하여 전례에 참여했을 때도, 주교관을 쓰지 말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전에 없던 일이 쇼리 주교에게 일어났으니, 논란과 의혹이 커질 만하다.

그 ‘원칙’이라는 것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교직이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는 주교직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주교직을 드러낸다고 해서 다른 교구에 가서 그 교구를 치리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교구의 주교는 자기 교구를 떠나서는 주교장(crosier)을 쓰지 않는다. 치리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교장을 치리권의 상징이 아닌 다른 상징, 즉 관구의 대외적인 상징으로 여겨 사용한다면 다른 문제이겠으나, 그런 일은 예외적이다. 주교관을 쓰는 것은 해당 교구의 주교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성찬례를 집전하는 것은 굳이 주교로서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제이면 집전할 수 있다. 그 기능에서 사제이니, 주교의 성찬례 집전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두 번째 문제는 캔터베리 대주교 당신 자신의 사례에서 더욱 불거진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천주교의 몇몇 행사와 전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때 윌리암스 대주교는 주교관을 썼다. 천주교는 아예 성공회의 성직을 인정하지 않는다(천주교 교황령 ‘Apostolicae Curae’, 1896). 1896년 이후 천주교는 성공회 성직을 인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캔터베리 대주교는 주교의 상징인 주교관을 천주교 전례에서 썼다.

여기까지 오면, 영국 성공회 내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금세 접게 된다. 그 처사가 이해할 수 없으며, 일관성도 없기 때문이다.

4. 동성애자 서품 문제와 미국 성공회
아마도, 이 사안은 한 달 전에 있었던 동성애자 주교 성품 문제, 그리고 뒤이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미국 성공회에 대한 조처, 쇼리 주교의 미국 성공회 입장 등이 오가면서 불거졌을 것이다. 동성애자 주교 성품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미국 성공회의 수장인 의장 주교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주교관 문제와는 더욱 관련이 없는 문제이다. 그것은 동성애자 주교 자신도 아니요, 그 성품을 수행한 주교와 그 교회의 대표로서 어떤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으나, 그 자신의 주교직을 드러내는 것을 금지할 이유는 아니다.

5. 삼성직 서품 확인 문서 요청
많은 이에게서 공분을 일으킨 것은 주교관 문제뿐만 아니라, 쇼리 주교에게 삼성직 서품의 유효성을 증명한 문서를 요구한 것이었다. 사안 자체로 보면, 영국 성공회에서 마련한 한 장짜리 문서에 내용을 적어 서명해서 제출하는 단순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공회에서는 다른 교구의 성직자가 자기 교구에서 성사를 집전하려는 해당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나 역시 이곳 캘리포니아 교구에서 성사 집전권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중요한 절차이다. 자기가 성공회 성직자라고 우긴다고 될 수 없는 일이다. 성공회의 각 교구 혹은 관구 법에 따라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널리 알려진 관구장 주교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른 처사인가? 게다가 이전에 다른 나라의 주교들, 특히 관구장 주교들이 그런 절차를 밟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미국 성공회로서는 환대의 정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만하다.

6. 캔터베리 대주교의 두려움?
공교롭게도, 쇼리 주교의 설교는 이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문제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점에서 보면, 캔터베리 측의 대응(이 문제는 람베스 궁에서 따로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관여된 일이 아니라는 말인가? 두고 보면 알 일이다), 나아가 그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보여 준 세계 성공회 일치 문제에 대한 처리 방법의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우선,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적 저술과 언설이 이러한 교회 행정적 치리와 여러 면에서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좀 더 비판적인 신학자들은 여러 논문에서 애초에 윌리암스 대주교의 신학적 논리, 특히 그의 교회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독서와 분석이 깊지 못한지 몰라도, 나는 윌리암스 대주교의 신학에서 좀 더 넓은 지평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어떤 두려움이 대주교로서 행정적 처사에선 그의 혜안과 영안을 막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두려움은 ‘교회의 가시적 일치’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보인다. 영국 성공회 내적으로는 성공회를 떠나겠다는 보수파들의 위협에 직면하고, 외적으로, 즉 세계 성공회 안에서는,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보수적인 주교들이 분열의 가능성으로 위협할 때,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시는 것 같다.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하게 드러나고 누리는 하느님 경험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교리적 획일성을 통해서 ‘일치’를 주문하고, 그것에 벗어나면 분열을 불사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분열주의적인 생각이다. 여기서는 일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윌리암스 대주교는 바로 그들을 붙잡는 일에서 일치를 찾고 있는 듯하다.

지난 식민주의 정책과 식민주의적 선교에 대한 죄책감이 팽배한 탓일까? 몇몇 아프리카나 아시아 교회의 행태에 대한 그의 무비판적인 태도는, 사회 정의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신학적 논지와 주장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아프리카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정말 문제를 보려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아프리카인들을 중심으로 두고, 그에 대해서 아프리카 교회의 행태와 실천이 아프리카인들에게 어떤 하느님의 선교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프리카 교회가 아프리카인들의 가난과 고통을 그대로 대변하지 않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여러 아프리카 친구들에게서 들은바, 아프리카의 문제는 대체로 ‘부패’의 문제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교회가 그 부패의 중심부터 변두리까지 걸쳐 관여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성공회가 더하면 더했지 예외가 아니다. 짐바브웨 하라레 교구는 작은 일례에 불과하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무엇이 그분의 눈과 귀를 막는가?

7. 정통과 진리의 문제
이제 다른 생각이 따라 나온다. 신앙과 진리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진리를 바로 부여잡고 있느냐를 정통(orthodox) 논쟁으로 다뤘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서로 정죄하고 파문하고, 심지어는 서로 살육하는 역사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나, 그와 관련한 정통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진리는 신, 혹은 초월자에게 유보되는 사안이다. 다만, 인간은 그 진리의 파편을 저마다의 맥락에서 부여잡고, 그것을 어떻게 삶과 역사 속에서 펼치며 살아가느냐를 일로 삼는다. 이때 참된 신앙의 식별자는 ‘정의'(justice)이다. 이른바 ‘칭의론’은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누리지 않으면, 즉 정의로운 관계를 살지 않으면서,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진리를 다루는 방법은 논리적인 연역 혹은 귀납의 문제나 대상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대개 그 진리 안에 압도되는 경험, 즉 ‘나’를 초월한 더 큰 것에 휩싸여서 자신의 한 없는 부족함과 작음, 그 유한성을 인정하는 순간에 느끼는 것이다. 여러 건전한 종교의 경험이 대부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제도로서 교회와 성직자는 늘 ‘매개자'(medium/sacrament)이다. 신학도 하느님의 진리를 불완전하게 매개하는 방법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그 매개자/체가 소유자를 자처할 때, 권력이 끼어들고, 분리를 부추긴다. 권력은 늘 소유와 비소유를 가를 때, 그리고 그 분리를 유지하려는 방법으로 존재한다. 그 권력이 억압과 지배를 낳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교관 게이트'(mitregate)의 배경

June 20th, 2010

최근 세계 성공회 내의 기류가 좋질 않다. 특히 영국 람베스 궁(캔터베리 대주교 집무실)과 미국 성공회의 관계를 둘러싸고 말이 무성하다. 일전에 번역하여 올려놓은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인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의 설교에는 몇 가지 논쟁의 맥락이 있고, 그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은 언론을 타고 일파만파 퍼지면서 두 주교 간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갈등 양상으로 비칠 지경이다. 물론 속내는 더 복잡하니 그리 단순하게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사태는 가까이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그마저도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다. 이 점을 살피지 않고 보면, 특정한 사건에 따른 진영 싸움으로만 오해할 소지가 크다. 그 논란의 내력을 간단히 요약하고, 언론의 관심거리가 된 특정한 사건을 잠시 언급하겠다. 그 사이에 이런 일들을 지켜보는 내 생각을 덧붙인다.

1. ‘인간의 성’과 세계 성공회의 갈등
논란의 맥락을 가까이 살피면, 지난 20여 년 간 ‘인간의 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태도, 특히 동성애에 관한 세계 성공회의 다양한 이해와 논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2003년 미국 성공회의 동성애자(커밍아웃한 게이) 주교 성품과, 지난 5월 15일에 미국 LA 교구에서 다시 동성애자(커밍아웃한 레즈비언) 동성애 주교 성품이 논란의 핵심이다. 이 문제를 두고 세계 성공회는 내홍과 분열의 위협에 시달렸고, 미국에서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를 떠난 보수파 지도자들과 교회로 구성된 독립된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새살림을 차린 교회는 세계 성공회의 다른 보수적인 관구들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이기도 하여, 세계 성공회의 내홍은 복잡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적은 적이 있다.

2. LA 동성애자 주교 성품
지난 5월 15일 LA의 부주교 성품 이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령강림절 서신'(Pentecost Letter)을 세계 성공회에 보냈다. 이 편지는 세계 성공회의 일치가 성령의 뜻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동성애자 주교 성품이 교회 일치를 모색하고 있는 몇 가지 조치(윈저 보고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미국 성공회에 대한 적절한 제재를 제안했다. 그 제안은 성공회 내 에큐메니칼(교회 일치) 대화 기구에 참여하는 모든 미국 성공회(TEC) 위원들의 사퇴였다. 며칠 후 세계 성공회 총무는 미국 성공회 측 위원들의 직무 정지를 통보했다.

이 제안과 곧 뒤따른 조처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요, 그 적용의 형평성에 대한 비판도 잇따랐다. 이른바 다른 관구 치리 지역을 침해하고 있는 남미의 서던 콘 관구에게도 비슷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 했으나, 실제로 위원 사퇴 같은 해당 사항은 거의 없다. 게다가 치리 관구 침해 문제와 관련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관구 교회들에는 아직 어떤 공식적인 제재 요구가 전달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제재 제안과 조치는 중요한 의문을 남긴다. 캔터베리 대주교와 세계 성공회 총무가 이런 결정을 내리고 처리할 권한이 있는가? 실제로 지난 몇 십 년 동안 세계 성공회의 운영을 담당해 ‘세계 성공회 협의회'(the Anglican Consultive Council: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의 위치는 지난 10년 동안 유명무실한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3. 미국 성공회의 반응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는 이 제재를 통보받았고, 미국 성공회 관구장인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는 미국 성공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사목 서신]을 발표했다. 서신에서 성령의 활동이 특정하게 제한된 의미의 교회 일치에 갇히지 않는 것이며, 세계 성공회 내의 불일치와 다양성은 오히려 성공회 전통이 발전시켜 온 역사의 은총인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정해진 대로,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와 스코틀랜드 성공회(The Scottish Episcopal Church)를 방문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 관구 의회에 초대받아 행한 연설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역사적 연관성, 특히 국교가 아닌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전통과, 식민지 이후의 교회로서 미국 성공회의 경험을 통해서 근대적인 세계 성공회의 한 방향이 마련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적시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교’가 어떻게 교회를 형성하고 교회를 변화시키는가를 식민지 선교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서 역설했다.

이 점은 세계 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의 형성에서 미국 성공회와 같은 식민지 이후 교회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설명하는 것이다. 성공회를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반복된 오류에 도전하는 중요한 상식이다.

4. 캐서린 주교의 런던 서덕 주교좌 성당 설교
캐서린 쇼리 주교는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와 성찬례 집전자로 초대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문득 스친 생각은 여성인 그의 ‘주교직’이 영국 성공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것이었다. 영국 성공회는 여성 사제를 서품하되 아직 여성 주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교는 여전히 사제인 까닭에 쇼리 주교가 설교하고 성찬례는 집전하는 데는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쇼리 주교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터에 난데없이 ‘거리의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와 자신의 머리를 풀어 눈물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어 닦아 드린 복음 이야기에 따라 설교했다(공동성서정과표). 그 설교 전문은 며칠 번 번역해서 이 블로그에 올렸다.

5. “Mitregate”(주교관 게이트)?
아니나 다를까. 영국의 가디언 지는, 캔터베리 대주교는 쇼리 주교에게 성찬례에서 주교관(mitre)을 쓰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쇼리 주교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되, 주교관을 머리에 쓰지 않는 손에 들고 순행했다고 전했다. 기사가 틀렸길 바랐다. 그러나 곧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가 ‘여성’ 주교인 것과 관련된 문제인 탓에, 그의 설교 내용이 울리는 점이 많았다. 한편, 쇼리 주교를 초청한 서덕 주교좌 성당의 주임 사제도 영국 성공회 내 보수파의 비난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일 저녁 예배 설교에서 쇼리 주교에 대한 일부 보수파들의 반응을 소개한 뒤, 절차 문제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그 주일 미사의 본기도(the collect)와 복음 본문의 뜻을 풀어가며 차분하고 명료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쇼리 주교가 주교관을 쓰지 않도록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서 요청받은 일과 더불어, 람베스 궁이 쇼리 주교의 삼성직(부제-사제-주교) 서품을 증명하는 문서를 요구했던 것도 밝혀졌기 때문이다. 쇼리 주교 자신은 미국에 돌아와서 이러한 처사가 ‘넌센스’이며 ‘기괴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것이 영국 성공회의 특수한 사정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 이 사건은 이른바 ‘주교관 게이트'(mitregate)로 불리며, 세계 성공회의 구도와 미국 성공회에 대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의중을 불신하는 분위기로 치닫고 있다. 당연히 이런 일에는 과장과 오해가 끼어들고, 언론이 부추기는 선정주의에 휘말리다 보면, 불필요한 불신까지 생겨난다. 이런 과장과 오해를 부추기고, 언론에 먹잇감을 던져주는 일은 덕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사태를 보는 내 생각을 다음 글에서 덧붙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