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의 공간 – 어느 벗에게

June 3rd, 2009

서로 이심전심이라면서도 여전히 전화통 붙잡고,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공감하여 격려하는 임종호 신부님께서 “식별(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댓글에서 되새겨 주셨다.

나 자신이 달포 전에 어느 분과 편지를 나누는 가운데 이 식별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이 참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사적인 편지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에서 공개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고 나눈 편지이다.)

식별의 공간

… 우리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런 영적 식별이 깊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별이 깊지 않은 분들이 큰 소리를 내고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진취적 주장, 혹은 보수적 입장에서 판가름 날 일이 아닙니다. 그것 너머의 식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식별의 위기에 있습니다. 힘들어하시는 …님께 부탁하기는, 이 점을 화두처럼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님이 느끼시는 절망과 분노를 …님이 나누고 있는 하느님의 꿈을 펼쳐나가는 힘으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누히 말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여느 성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길에 들어섭니다. 성직에 들어선지 10년에 든 내 자신을 돌아 보면서, 여러 젊고 나이든 성직자들을 보면서 갖게 된 결론입니다. 밑에 적을 다른 지천의 허튼 말들을 말고라도, 이 말만은 꼭 기억해 주십시오. 나중에라도 이 기준으로 역시 저를 비판해 주십시오.

어떤 절망과 분노가 사람을 휘어잡으면, 아무리 명석하고 냉철한 분이라도, 자신을 사지로 몰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더욱 이 위험을 함께 염려합니다… 사람은 약하고, 사탄은 늘 그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 옵니다. 그러니 이를 보강해야 합니다. 식별의 끈 가운데, …님의 약한 고리를 찾아 내십시오.

사람의 생래적인 보호 본능때문에 이 고리는 깊이 감춰져 있습니다. 드러난다 해도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그걸 짚어주는 도전입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첫 생각 말미에 적은 “그저 몇몇 마음 맞는 이들과 책이나 읽으며”라는 말에 저는 염려합니다. 위로의 시급성때문에 자칫 도전이 감춰질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들의 도전에 열려 있는 것이 …님께 더 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 상해 있을 …님의 기분을 헤아리 못하고서 말한다고 타박하지 마십시오. …님의 삶의 목적이 그저 성직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리 하셔도 됩니다. 침묵으로 해결될 일입니다. 그 이후의 삶이 어떤지는 이미 우리 주위에 팽만합니다. 그리 마음 먹었다면 지금부터는 입바른 소릴랑 평생 접는 것이 적어도 위선자 소리를 듣지 않은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위선을 잘 변명하고 도통한 척 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 자신이 또다른 절망의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 낼 겁니다.

기도 속에서 함께 할게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박차고 오르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서, 그 내려져 숨죽이고 있는 손길들을 다시 발견하고 함께 손잡고 오르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의 기도입니다.

누구의 언어로, 어떤 믿음으로 – 교회에 대한 잡감

June 1st, 2009

0. 올해 성령 강림 주일의 성서 본문은 이랬다. 사도 2:1-21, 에제 37:1-14, 요한 15:26-27, 16:4-15

1.
성령 강림 사건 (오순절)의 핵심은 “혀 같이 생긴 불길”이 사람들 위에 내렸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저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다른 지방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다중 언어 사건은 극단적 종교 체험의 비언어적인 표출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지역 언어의 구사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실상 이 ‘방언’ 기적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무지렁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있다. 그 목소리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지렁이들이 증언과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 성령의 불 같은 형상은 기존의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에 닿아 있다. 그러니 오순절 사건은 전복에 대한 증언이다. 한참 어린 것들인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젋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것”이다.

2.
예언자 에제키엘은 광야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에게 숨결이 돌아 살이 붙어 살아나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이 마른 뼈들의 주인들은 적어도 고관 대작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 끌려 나가 개죽음을 당했거나, 떠돌이로 살다 굶어 죽은 이들, 그도 아니면 어떤 집단 학살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숨결이 먼저 닿은 것은 수습하지도 못해 방치되었던 이름없는 이들의 뼈들이었다.

3.
성령 강림일에 읽는 복음 말씀은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삶을 향해 난 창으로 그 너머를 응시할 때 깨닫는 말씀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4.
교회는 이런 성령 강림일에 어떤 말들을 전하고 들었는가?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우파 이념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서를 보는 이들이 교회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축자주의(문자 하나 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엄밀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늘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서와 내가 읽는 성서는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믿는 대상이 다르니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2mb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내게 그저 타종교인이다. (타종교를 폄하하는 말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개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5.
그러나 현실은 다시 언어의 지배력이다. 그 권력의 방식은 미디어에 대한 지배이다. 그동안 교회가 벌이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구조와 그 효용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아니, 알뛰세를 몰라서 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패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이른바 욕망 교회의 분신들인 대형 교회나 그 이데올로기가 교회의 모든 미디어를 잠식해 버렸다. 신학교, 언론, 출판사, 연구소, 혹은 다른 교육 기관을 보아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엄청난 자본 권력이다.

6.
이러한 처지에 이들과의 싸움은 여러모로 승산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이끌어야 가야 한다는 주장도 어떤 의지에 기대지 않으면 힘을 잃을 것이다. 정의로운 것에 대한 믿음이 더욱 힘겨운 몸부림을 견디게 하리라. 그 몸부림을 좀더 풍요롭게 하려면,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 안에서 무지렁이의 목소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모아져 들려지고, 거기에 들어있는 슬픔과 기쁨의 다양한 삶의 결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도록 하는가?

7.
공교롭게도, 세상 떠난 이의 글을 이런 생각 끝에 접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우리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도, 촛불도, 정권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반독재 투쟁이 성공한 것은 국민이 생각하는 만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미디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영향력 있는 미디어는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없는 쪽은 돈이 들지 않거나 적게 드는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정보는 넘쳐나지만, 내용이 부실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넘쳐나지만, 사실과 논리는 부족하고, 깊이도 모자라고, 비슷한 생각끼리도 서로 앞뒤가 맞지 않고 충돌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협업으로 역량을 확대하고, 토론과 검증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것입니다.

미디어이든, 인터넷이든, 연구소든, 출판이든, 어디를 보아도 우리가 열세입니다. 그냥 열세가 아니라 형편없는 열세입니다. 이런 열세를 딛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의 진운이 함께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print.asp?article_num=20090527140200

장례, 그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

May 29th, 2009

우리는 결국 그 사람을 보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직전에 여러 사람들과 추모의 시간을 마련했다. 헤아리거나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먹먹함때문에 작은 시간과 공간에 함께 모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위의 성직자들과 신학생들 몇몇이 모여 급히 생각을 모았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지역 한인 사회나 교회의 보수성에 짓눌려 슬픔도 울분도 잘 나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급하게나마 자리를 마련하고, 지역 신문과 인터넷 게시판에 광고를 내어 초대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찾아 주셨다.

무거운 마음에 서로 처음보는 이들끼리 서먹한 인사를 나눴다. 헌화도 하고 분향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들었다. 고인의 흔적을 돌아다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한편으론 나눈 이야기들에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중계되는 영결식을 함께 보며 분노했고, 눈물 흘렸고, 마음마다 어떤 다짐도 했다.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없는 살림들에 보잘 것 없는 차와 쿠기 몇조각을 준비했는데, 수박이며 샌드위치며 다른 음식을 싸오신 분들이 있어 제법 풍성해졌다. 그 마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사회하는 일에 서로들 손사래를 치며 떠미는 통에 나이 한살 더먹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맡았다. 그럼 그저 모임을 여는 말만 하겠노라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맡기자고 했다. 그렇게 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훌륭한 사회자들이었다.

다만 여기에 그 여는 말 하나만 담아 놓는다. 이 “잔치”가 새로운 삶을 여는 축제의 시작이길 바란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찾아주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며칠여 동안 우리는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어지는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을 맞으면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가만 생각했습니다. 저마다 따로 장례와 영결식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처럼 시골에서 자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식을 보고 겪은 처지로서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장례는 그저 슬픔에만 휩싸여 있는 이별의 시간이 아닙니다. 장례식은 고인이 살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초대하여 베푸는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의 장례에서는 음식이 풍요롭고, 떠들썩하며, 이야기가 넘쳤습니다. 심지어는 노름판도 벌이고, 노래도 춤도 추곤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고인이 우리에게 베푸는 환대의 잔치로 이 시간을 바라 보았으면 합니다. 가까이 살면서도 멀었던 친구들이 모이고, 나누지 못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이 자리에 내어 놓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대통령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이 조촐한 모임은 어떤 특정 종교나 정치적인 이념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그저 우리 삶이 녹아들어서, 우리 한국 사회가 좀더 상식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의가 숨을 쉬고, 자유의 춤이 어우러지는, 그런 꿈들이 잊혀지지 않아야 된다는 소박한 생각때문에 마련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에 맡기려 합니다.

순서의 형식과 통제에 여러분을 끼워 넣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을 몹시도 싫어했고, 그런 것이 자칫 갈등의 해소라는 미명 하에 또다른 억압이 될 것을 늘 염려했던 고인의 뜻에도 맞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과 이 공간은 고인이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여러분이 잔치를 채워 주십시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술도 없으며, 화투짝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읽는 시로 물들여 주십시오.
꽃 한송이를 바쳐서 자유로운 영혼이 가는 길을 축복해 주십시오.
향 하나를 피워서 그 영혼이 자연의 숨결로 녹아들게 해 주십시오. 혹은,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 우리가 이뤄가야 할 세상에 대한 꿈이라도 나눠 주십시오.
그도 아니라면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 순간 자신의 다짐을 살펴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종종 고인을 추억하는 동영상도 나눌 것입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나와서 헌화와 분향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촛불 하나를 켜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시 하나를 읽거나, 이야기를 들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몸짓 사이에서, 그리고 사이 사이의 공간 속에서,
고인이 바라마지 않고 이루려 몸부림쳤던 그런 꿈이 새로운 한 발을 내디게 될 것입니다.

이 환대의 잔치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슬픔과 사랑과 꿈을 기억과 마음에 묻는 순간, 비로소 잔치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