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

April 4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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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 성공회신학 / 서울 주교좌 성당)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요한의 이 아름다운 환시는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인 구원 사건을 축하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라면 성목요일의 세족례와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 사건, 성토요일의 무덤의 침묵, 마침내 부활밤의 부활사건을 연이어 통째로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 거룩한 삼일 동안 인간의 새 창조와 구원이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부활 전례의 핵심입니다. 모든 주일은 부활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주 매시간 부활한 생명으로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천지 창조는 ‘보시기에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점에서 창조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첫 성사입니다. 그러나 인간 아담은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을 잃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와 인간이 서로 누리는 관계도 뒤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처럼 ‘깨진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상태를 ‘죄’라고 부릅니다.

죄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신 하느님께서는 몸소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산고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배를 찢는 아픔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열었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과정에 담긴 사랑과 아픔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일이 바로 전례의 기본입니다. 성삼일은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성 목요일은 새로운 “명령”의 시간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며 세상 안에서, 특히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모본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동안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던 모든 음식 기적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참 생명을 살아갈 인간의 음식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먹을 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주는 공포는 사람의 호흡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간을 멈추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무죄한 고난과 죽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한, 역사는 더 진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힘은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장엄기도’를 드리는 까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연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 토요일은 예수님의 부재로 어두운 침묵이 이어지는 고독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서는 이 무덤 속 어둠의 시간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펼치셨다고 증언합니다. 삶의 어둠과 고독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세운 성안에 갇혀 지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그 어둠 속에서 발견하여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때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부활밤은 새로운 창조가 열리는 시간입니다. ‘새불 축복식’은 어둠의 과거를 살라버리는 놀라운 힘과 더불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고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빛을 선사합니다. 이 불의 연단을 넘어선 우리는 새롭게 구워져서 아름답게 빛나는 도자기와 같습니다. 이 불은 우리 신앙의 열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뜨거움으로 하느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모든 힘에 도전하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삽니다. 부활 오십일 째 되는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교회야말로 부활의 몸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점을 간과하면 ‘몸의 부활’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교회와 신학, 신앙마저도 뒤틀리기 쉽습니다.

부활 성삼일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 응축된 시간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따르는 우리는 작은 부활일인 주일 성찬례를 계속 거행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며 그 몸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합니다. 이 만남과 경험과 참여의 성찬례가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이때라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그 부활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1. 성공회 신문 2015년 4월 4일치 부활절 특집호 []

예수의 정체 – 배신자는 누구인가?

March 29th, 2015

예수의 정체 – 배신자는 누구인가? (마르 11:1~11, 마르 14:1~15:47)1

예수님의 생애는 역설과 반전의 연속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합니다. 며칠 뒤 이들의 태도는 돌변합니다. 그들의 즐거운 환호는 한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성난 외침이 됩니다. 그 며칠 사이에 사람 마음을 그토록 잔인하게 바꾼 것은 무엇일까요? 성지주일-고난주일을 맞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순행하면서 성찬례를 시작한 우리가 곧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생생한 수난복음을 읽고 듣는 기막힌 전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리스도교 교리에 익숙한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배신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제자들의 행태는 인간의 나약함과 배신을 분명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깨어서 함께 기도해달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지키지 못하고 제자들은 잠에 취하고, 제자 가리옷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어떤 젊은 제자는 알몸으로 도망가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동안에 베드로는 그토록 따랐던 선생을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제자단의 일원이라 으스대던 남성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가고, 여성들이 그 참혹한 시간을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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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배신의 행동과 결과는 나타나지만, 그 동기는 아직 뿌옇습니다. 이때, 역설의 신앙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배신의 혐의를 예수님께 둘 법합니다.

세상이 환호하는 왕으로 오시는 분이라면 말을 타고 개선행진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면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혁명조직 결성이 시급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한가롭게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행실이 의심스러운 여인을 보호합니다. 구세주라면 주류 종교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정통 신앙으로 사람을 결속하라는 기대가 큽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그들 종교권력의 거들먹거림과 끝내 불화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한 장본인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의 틀 안에 하느님을 욱여넣으려는 종교심을 향한 거절입니다. 자기의 안녕과 보호라는 틀 안에서 하느님을 측정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속 좁은 신앙심을 향한 배신입니다. 그 배신에 분노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세운 기대와 요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배신감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 친구들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고 내던지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대와 소망을 여전히 배신하며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우리가 멋대로 세운 기대를 ‘비워서 내려 놓으라’(필립 4:7)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간직하여’ 세상이 말하는 성취의 가치, 승리의 질서를 배신하라는 초대입니다. 종교와 세상이 한통속이 되어 으스대며 휘두르는 권력의 질서를 배신하고,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에 순종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권력에 대한 배신이 진정 예수님의 정체요,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의 배신에 담긴 진실에 우리 몸과 마음을 내어놓고 복된 역설의 성주간을 시작합시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29일치 []

베풀며 닳아서 빛나는 영광

March 22nd, 2015

베풀며 닳아서 빛나는 영광 (요한 12:20~33)1

무슨 ‘영광’을 보자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까요?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찾아와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던 마음에도 이런 질문이 고스란했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높은 영광’은 힘 있는 자리와 많은 재산을 뜻했습니다. ‘영광’은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 제국의 권력에 걸맞은 말이었습니다. 지금 쓰이는 ‘영광’도 이런 뜻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기대와 크게 어긋납니다.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바를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섬겨야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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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답이 펼쳐지는 방식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사실을 바로 보고, 뜻을 헤아리며, 새롭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차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거나 애써 부인하여서 신앙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발언입니다. 적어도 오늘 대답에서 예수님은 객관적인 사실 위에 우리 신앙을 다시 세우십니다. 자연의 이치 안에서 죽은 밀알은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을 넉넉하게 먹이도록 변화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죽음의 한 차원을 끝낼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승의 생을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든 저승의 생으로 연장하려는 기대는 ‘영원한 생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대를 가르치는 종교는 ‘자기 목숨을 아끼려는’ 태도일 뿐이며 결국에는 모두 허망한 종말을 목격할 뿐입니다.

신앙인은 이생에 선물로 얻은 생명을 인색하게 아끼려 살지 않고, 너그럽게 베풀며 삽니다. 베풀다가 닳아버리고 가난해진 삶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삶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고치는 일에 베풀며 쓰셨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쫓으며 사람을 억누르던 세상 권력과 대결하며, 자기 몸을 닳아 없애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의 삶을 닮아 따르며, 사람을 넉넉하게 만드는 일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고통의 지우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마저도 당신이 겪을 ‘고난의 시간’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고뇌와 병고와 고난의 제거는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일이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이 고난의 동행을 받아들이며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 아픈 ‘가슴에 쓰고 새길 새 계약’이며, 고난의 수고를 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우리의 ‘영광’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22일치 –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