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신앙의 책임

Sunday, September 1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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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신앙의 책임 (마태 18:15-20)

신앙생활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여느 종교는 신(神)과 자신의 관계를 개선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거나, 홀로 진리를 깨우쳐 해탈을 바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웃과 맺는 자신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인은 나 홀로 사적인 인간이기를 멈추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 참여하여 살기로 다짐한 사람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다툼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신앙 공동체에도 불화와 갈등, 불신과 상처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인은 이 문제를 하느님의 시선에 비추어 함께 공동체를 쇄신하고 자신의 변화를 찾으며 훈련합니다.

공동체의 갈등 원인은 다양하지만, 선의로 시작한 일이 부주의하게 미끄러진 탓이기 쉽습니다. 교회를 아끼려는 주인의식이 지나쳐 소유의식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체험의 기쁨을 나누려는 열정이 지나쳐 자신만 옳다는 주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나쳐 강요와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의를 올곧게 지켜나가려면 스스로 성찰하고 자신을 삼가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갈등과 불화가 선한 궤도를 이탈하는 일도 있습니다. 작은 실수와 갈등에 관하여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소문에 귀를 빌려줄 때, 공동체는 죄와 불신에 빠집니다. 진실은 사라지고 억측이 난무합니다. 화해보다는 심판의 목소리가 우악스럽습니다.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집니다. 스스로 삼가는 성찰의 궤도를 벗어나면 진실한 변화와 쇄신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고민과 노력이 오히려 오해를 받습니다. 공동체는 불신의 만성질환에 빠지며 생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신앙인은 진실을 찾는 사람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진실을 식별하는 능력을 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진실과 진리로만 서로 타이르고 바로 잡습니다. 조심스럽게 둘 사이에, 여럿이 불편부당하게 충고하고 설득합니다. 바른 지적과 조언을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로 삼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라’(17절)하는 말 속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에게도 회개와 용서의 은총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진리와 공동체의 진실로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진리과 사랑은 함께하지만, 사랑을 들어 진리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 그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다면,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신앙의 책임은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진리과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애쓰는 일입니다. 진리에 이르려는 기도와 대화가 우리 공동체에 간절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쇄신하려는 깊은 배움과 모진 훈련이 우리 교회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줍니다.

교회 – 진리의 반석 위에 서서

Sunday, August 2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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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 진리의 반석 위에 서서 (마태 16:13-20)

영국의 옥스퍼드사전 위원회는 지난 2016년 세계의 새로운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습니다. 객관적인 진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소문이 진실인 양 떠도는 현상을 말합니다. 근거가 불분명하고 확인하지 않은 이야기를 자기 신념과 감정에 따라 진실이라고 우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른바 뒷말과 소문은 이런 ‘탈-진실’의 현상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과정이어서 공동체의 신뢰를 크게 훼손합니다. 그러나 큰 진리를 향하여 작은 진실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과정은 답답하도록 느립니다. 신앙인은 이처럼 느리고 불편한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누룩’은 헛된 과장과 소문을 일컫습니다. 누룩의 용도는 빵을 만드는 것이나, 잘못 쓰면 음식을 썩게 합니다. 입과 말은 진실을 담아 전달하는 통로지만, 잘못 쓰면 헛된 소문으로 사람의 분별력을 막습니다. 인터넷이나 문자로 전달되는 소문이 난무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남에게서 들은 소문과 자기 입에서 나오는 고백의 차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사람이 ‘예언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입니다. 그리 나쁘지 않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라는 말에 담은 속뜻은 저마다 다릅니다. 권력을 비판하며 정의를 외친다는 칭찬일 수도 있지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해서 철없이 일찍 죽게 되리라는 비아냥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의 고백을 묻습니다. 풍찬노숙을 같이하며 길어 올린 배움과 진실의 공동체에 귀 기울이라는 의지입니다. 조금 생각이 다르더라도 함께 생활하고 대화하며 배우는 공동체에 먼저 신뢰를 두는 태도입니다.

공동체 대표 베드로의 고백은 또렷합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교회의 삶에 살아계신 분입니다. 개인의 종교적 신앙 대상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이끄시는 왕입니다. 우리는 자기 길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베드로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남의 입에 발린 소문에 기대지 않고, 친구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정체와 진실을 확인하고 선언합니다.

신뢰와 진실의 고백만이 믿음의 터전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하늘에서 온 고백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자기 신념으로 조작하거나 자기감정 안에서 왜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에 바탕을 둔 튼튼한 믿음 만이 교회가 제대로 서는 반석입니다. 이런 믿음 만이 세상과 교회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고 화해를 이끌어 나가는 열쇠입니다. 세상의 풍파나 유혹, 그리고 생존의 위협도 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선 교회와 신앙인을 흔들지 못합니다.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Sunday, August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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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마태 14:22-33)

희망은 고난으로 단단해집니다. 신앙은 풍파로 흔들리는 삶의 진실 안에서 자라납니다. 믿음은 여리고 아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성큼 다가옵니다. 삶의 상처는 쓰라려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세상의 아픔까지 헤아리게 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신앙의 은총은 여린 상처 안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려 꿈틀거립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흔드는 상처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담한 죽음 탓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뱃속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세례로 연결되었고, 요한이 갇히자 예수님께서 세상 전면에 나서셨습니다.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이 처절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 속에서 요한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과 배고픈 이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의 처지가 마음 아팠습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눈길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펼치신 성찬례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으로 몸부림치며 성취를 향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안에서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우리를 넘실거리며 위협하는 파도는 절망과 상실의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난과 상실을 잊으려 하고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의 무게가 파도가 되어 그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에 눈을 팔 자,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신앙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