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잡감 2

Wednesday, April 29th, 2009

1.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은 무슨 파우스트적인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이라면 오히려 파우스트적인 도전과 고뇌를 칭찬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 불행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런 의지도 열망도 없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자신이 마주한 어떤 처지에서 자신의 본 생각을 숨기거나 타협하여 그것에 굴복하는 건 오히려 인지상정이겠다. 사람은 생존본능의 노예니까. 그러나 이게 습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타협과 잘못을 비난하는데서라야 자신의 본 생각을 드러내어 짐짓 옳은 체하고, 또다시 다른 처지에서 다른 식으로 타협하는 행태는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이다. 이 짓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일이 성직 사회에서도 넘쳐 나는 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음란한 짓이다.

2.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훈계할 때, 자신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근거를 두고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사태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태의 정황에서 늘 해석되고, 그 이해 당사자에 의해서 사실이 조작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말에 기대는 순간 그 자신의 신뢰를 깎아 먹게 된다. 이 역시 영혼을 팔아먹는 일의 일종인데, 이런 자기 모순이 그 자신의 비참에서 그치면 다행이련만,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공공의 적이다.

3.
성서의 기드온은 오합지졸 병사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 식별 기준은 병사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무의식에서마저 견지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도자는 바른 식별을 해서 이끄는 사람이다. 골라내거나 쳐내는 일은 그 어감과는 달리 식별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겁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삼백명의 정예 군사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렀다. 집으로 돌아갈 걸로 판정받은 병사들은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 성직은 식별을 따르는 행동이지, 고집 피우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간 전쟁도 지고 자기 목숨도 잃는다.

4.
어떤 전략과 전술도, 그리고 어떤 생존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밖에 나가서 정체성을 갖춰라, 성장시켜라 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앵벌이하라는 말이다. 그 앵벌이의 실체는 굽신거리고 거짓말하는 일이고, 좀 힘이 있을라 치면 그마저 없는 이를 ‘삥’ 뜯는 일이다. 앵벌이로 나서는 이들 역시 힘에 눌려 여기서 도망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 일이 반복된다.

5.
사목은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디서든 입에 발린 말들이 되기 쉽다. 그 속내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은 이면에 어떤 복합감정(complex)에 따른 질시와 무시가,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팽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위계질서와 섞여서 작동하면 사목과 교회는 치마만 슬쩍 두른 이전투구의 장이 된다. 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성직자 개인은 불행하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는 교회는 무너진다.

6.
질투와 시기는 차이에 대한 비교에서 비롯된다. 차이가 만만한 것이라면 바르게 경쟁하면 될 일이고, 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차이에서 배우는게 남는 일이다. 질투와 시기는 경쟁을 통한 발전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배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먹이지도 못한다.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다양한 은사를 늘 설교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에 절대로 순응하지 않기에, 결국 복합 감정의 노예가 된다.

7.
가까운 사람들,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좀더 인색한 식별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도전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가까움이 자칫 식별의 눈을 가리고 도전을 멈추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고 전해 듣고, 또 발견하게 된다. 그 잣대로 인해서 그와 멀어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역으로, 무엇이든 받아주리라 생각했는데 애정과 합리로 도전을 해오는 이가 있다면, 그를 붙들어야 하겠다.

8.
누가 그랬던가? “나쁜 사제는 없다, 다만 병든 사제가 있을 뿐.” 문제는 병자가 자신의 병을 돌아다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결과는 나쁜 일들이다. 당연히 사제는 나쁜 일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사제가 늘 옳은 의사로만 자처할 뿐, 스스로 병들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도 병들어 죽는다. 손 쉬운 자기 진단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질이 다른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가? 누구에게 먼저 부러움과 질시가 먼저 일어나지 않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나? 말과 행동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내리 누르려 하고 있지 않나? 사실과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솟아오른 감정으로 논리를 치장하지 않나? 등 등. 하기야 이런 것들을 물어서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병든 사람은 이런 진단 자체를 거부한다.

9.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이상 그리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노라 하셨다. 서로들 벗으로 여기지 않으니 불행한 일이다.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이 “벗”에 대한 갈망과 실천을 말과 몸에 속속들이 배이도록 하지 않는 한, 결코 예수를 따르지 못한다.

10.
성직 10년이라는 무게가 나를 무섭게 짓누르는 해에, 되돌아 보고 있는 것들의 편린이다. 이런 수준으로 밖에 돌아보지 못하는 게 스스로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오늘의 부끄러움을 넘어 내일 주님 앞에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으면 한다. (그러니 이 잡감을 오해 마시라. 아니다. 오해하신다면 더 큰 영광이겠다.)

관련 글: ‘성직자’ 잡감

‘성직자’ 잡감

Monday, January 12th, 2009

1.
성직자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위계를 전통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는 그 질서의 압박감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각양각색의 신자들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무엇보다 고민 많은 한 신앙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이는 이를 잘 피해나가는 것이 경륜이자 지혜라고들 하나, 여럿을 보건데 자기 합리화로 들리곤 했다. 그 말들에 사실 행복한 얼굴이 묻어나지 않은 탓이다. 자기 검열에 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나 역시 자유롭노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몇 번이나 그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거니와, 하루에도 몇번씩 다짐과 생각을 고쳐 먹는다. 도전을 객기로 여기고, 슬픈 자포자기를 도통으로 여기라는 충고가 앵앵거린다. 철 들라는 소리와 함께.

2.
그러나 성직자는 혼자가 아니어서 사제들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새로운 도전을 일깨운다. 저마다 부족한 것들이지만, 사금파리로 모여 듬성듬성 삶의 빈 곳을 매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가 이 희망을 저버리거나, 무관심하면?

아마 조급증이었으리라. 이런 절망과 무관심이 우리 교회 안에서 독버섯 피어나듯 하여 우리 그늘을 좀먹고 있다는 생각. 햇볕을 피하는 그늘이 되어 지친 삶을 서로 기대어 쉬는 자리가 아니라, 축축하고 써늘하게 습진 동네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 이 조급증이 사람살이의 복잡한 일을 내밀하게 살피지 않고 간섭하도록 나를 떠밀었는지 모른다.

3.
몸이 이 공동체에서 멀어져 있는 탓도 있겠다. 첨단 테크놀로지로도 몸이 함께 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그 간극을 좁히고 싶고, 내 깐에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보고, 그 사이에 어떤 소통이 마련된다면 족할 일이라서 해서 블로그니, 포럼이니,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니 하는 것에 기운을 주고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대문에 걸어 놓았다. “성공회 카페는 신앙과 지식과 성찰이 어우러져 새로운 지혜와 실천을 열고자 하는 공감의 목소리와 공명의 메아리를 담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게 빈수레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4.
유혹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피하고 싶었을 게다. 그도 아니면 나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동안에, 길동무[道伴]인 신부님은, 같은 물음을 하느님께 물어 그 음성을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내공의 차이다.

네가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많이 얻어
교회의 세력을 이루었다면
그 어울림과 권력의 맛에 취하여
반드시 하느님도 사람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네 외로움, 네 모자람, 네 어리석음 때문에
너는 나를 향하여 나의 길을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5.
어디에다 적었던 글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배운 바 없지 않으니, 다른 식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대화와 나눔이 없으면, 자랄 수도 풍요로워질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검열을 넘어, 좀더 넓고 깊은 자기(‘우리’) 수련과 도전으로 이끌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를 몸으로 살지 않고서야, 미사에서든,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몸”을 운운할 수 없다.

종교: 위로와 도전 사이에서

Monday, May 12th, 2008

아무리 시급한 걱정거리라 해도, 아무리 친형보다 가까운 신부님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객지에서 만난 분을 붙잡아 두고 따져 묻고 비판을 하는 일은 성급하거나 철 없는 일이었다. 그리 행동했기에 일말의 후회가 밀려오고, 잠시나마 함께 말없이 바닷 바람 쐰 것으로 무마하고 싶은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속한 작은 것 안에서는 아웅다웅하다가도, 자연이 주는 신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분을 보내드린 뒤, 여러 생각과 함께 돌고 돌아서 다다른 생각의 편린은 종교의 근본적인 행동적 기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태에 관한 성찰들이었다.

종교의 “기능”에만 집중해서 깊이 내려가면 두 가지 근본적이며 대립적인 면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곧 “위로”와 “도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를 “사제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두 관계의 긴장 혹은 균형이 무너질 때 종교는 한쪽으로는 사이비 종교 집단, 다른 한쪽으로는 사회의 한 운동 단체가 된다. 이럴 바에는 종교에 참여하기 보다는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봉헌하거나, 시민 운동 단체에 기부하는 일이 “실용과 효과” 면에서 훨씬 낫다.

종교가 사회에 대한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근대” 이후, 종교는 그 여러 기능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분야들에 기득권을 내줘야 했다.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가? “그래도 그렇다”고 당연한 말로 대답하기 전에, 그 근본적인 “위로”와 “도전”의 긴장감이 어떻게 작동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자기 변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은 종교가 사회와 정치에 도전할 때, 영적인 책무와 ‘위로’를 꺼내들어 맞불 놓는 일로 드러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을 향한 위로를 말할라 치면, 교회 안에서는 전통 교리에 입각한 심판으로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회 운동 진영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는 해묵은 명제로 종교 자체에 도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참에 그 사이에 선 선한 사람들의 자리는 좁아진다. (그래,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직자든 신자든 이런 자기 변명에 스스로를 적절히 적응시켜 살아가는 일이 편만하다. 적절하게 눈 뜨고 눈 감거나, 짐짓 모르는 체 사팔뜨기가 되기로 작정한다. (신자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성직자의 잘못은 신자들 탓이 아니지만, 신자들의 잘못은 성직자들 탓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은 뒤로 미루고, ‘위로’와 ‘도전’을 적용하는 기준 설정이 최우선이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말들 앞에 있는 어떤 수식어들을 늘 염두했다. 그 제한적 수식어들이 사라지는 과정과 교회 권력의 보편화는 같이 갔다. (모든 일반화와 보편화는 항상 위험하다! 그 안에서 어떤 작은 목소리들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잊혀졌던 수식어들을 성서와 복음에 비추어 되살려 본다면,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위로”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위로과 보살핌은 약한 이들이에게 우선적으로 가고, 도전과 비판은 힘 있는 자들을 먼저 향한다. 물론 그 약함과 힘 있음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모든 약한 것이 다 위로의 대상이 아니요, 모든 힘 있는 것들이 도전의 대상도 아니다. 어떻게 약하고, 어떻게 힘 있는지를 따져서 그리 한다. 여전히 식별의 문제이다.

궁한 백성의 배고픔과 아우성은 위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기적인 욕망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군중의 이름으로 누구를 십자가의 못박는, 하나된 욕망의 분출이 되면 그것은 비판과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한편,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그 억압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도전해야 하지만, 그 힘의 구조 안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입하여 자유롭지 못한 약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위로와 보살핌도 함께 가야 한다([대장금] 정상궁의 대사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여기서 여전히 유효한 식별의 기준은 영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약함과 권력에 관한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가 이 식별에서 엇나갈 때, 본의든 아니든, 그 적용은 전혀 반대의 행동을 낳는 일이 빈번하다. 사실 계급 의식 혹은 의식화 같은 거창한 말의 본연은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결과는 작으나마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고 영성 수련하고, 때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말씀 읽고 듣는게 아닌가? 그러자고 신학하고 대화하는 것 아닌가?

우리 성공회 안을 들여다 볼까? 치부 자체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른체 하거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 여기서 그만 두고, 몇 사람의 글을 인용하여 마친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가 종교보다는 도덕론이 낫다고 생각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기도가 쉽기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기도를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은 좀더 신랄했다.

인간의 영혼에 관여한다고 고백하는 어떤 종교가 그 인간들을 내치는 빈곤과, 그들을 목 죄는 경제적 조건과,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메마른 먼지 같은 종교일 뿐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떠오르는 정상궁([대장금])의 마지막 부탁

그러나 어릴 적 내가 본 화려한 궁은 허상이었어.

늘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궁(宮)은 외로웠다.

모두들 아마도 그 외로움에 지쳐 그렇게들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 게야.

외로움에 지쳐 승은이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등바등 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부(富)라도 얻어야 겠으니 남에게 빌 붙었을테고
외로움에 지쳐 권력이라도 얻어야 겠으니.. 권모술수라도 써야했겠지..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네가 네 원칙을 지키고싶은 것만큼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러지 않으면 네 단호함이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낮설 게만 느껴질게다.

쉽지않지! 단호하게 하는 것과 융통성 있게 하는 것!

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져!
그게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