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멘탈리티의 틀, 그리고 마커스 보그

Thursday, February 9th, 2012

십수 년 전, 동료와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여러 근본주의 ‘기독교’ 교단들이 성공회를 비난한다는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위 근본주의적 개신교는 아예 우리와 다른 종교라고 여기고 접근해야 해요. 실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에요.”

지금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한다. 근본주의라는 종교 안에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등의 내부 분파가 있을 뿐이다. 누구를 규정하고 구획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병증, 혹은 환부라고 분명히 진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인 탓에 다른 여러 건전한 종교들과도 친연성을 나누기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탓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려, 몇 해 전부터는 성공회 전통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는 ‘개신교 멘탈리티’의 폐해를 몇몇 분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물론 이때 ‘개신교 멘탈리티’란 영미에서 발전한 독특하고 배타적인 복음주의와 연결된다. 그 특징은 전례와 성사에 대한 무지와 거부, 전통에 대한 몰이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접근, 그리고 창조 신학과 성육신 신학을 오해한 지독한 영-육 이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런 특정 형태의 ‘개신교 멘탈리티’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종종 진보 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이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도 비슷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언젠가 적은 대로, 전례적(liturgical) 전통의 교회와 비-전례적 전통의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분은 위에서 규정한 근본주의나 개신교 멘탈리티에 대한 언급에 그대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이해와 형성, 그 실천에 대한 접근에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신앙 형성의 틀이라고 할 만하다. 이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좀 더 적극 펼쳐 나가야 할 참이다.

이 와중에, 마커스 보그의 책 한 권을 들춘다. 성공회 신자인 마커스 보그는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한 짧은 소개와 우리말로 번역된 도서 목록은 여기를 참고할 수 있다. 그 역시 성서와 전통을 보는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전개한다. 현재 통용되는 여러 신앙의 언어와 용어, 개념들이 어떤 틀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아래 이식된 한국 교회에도 적절한 참고서일 것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인듯 하니, 우선 그 고민을 그 책 서문을 통해서 나누려 옮긴다.

마커스 보그,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그 의미와 힘을 잃었는가?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서문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우리 시대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 기본 어휘의 많은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용어들이다. 구원, 구원받다, 희생, 구속자, 구속, 의로움, 회개, 자비, 죄, 용서, 중생, 재림,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서. 게다가 신조, 주님의 기도, 전례 등과 같은 용어들도 그 성서적,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심각하게 왜곡된 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첫째는 근대 세계에 등장한, 언어에 대한 문자주의이다.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슷하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어떤 일반적 틀에서 해석하는 문제다. 나는 이를 “천당과 지옥”의 틀이라고 부르는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종종 그러하듯,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약 절반(아마 더 많을 것이다)의 미국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천당과 지옥’이라는 틀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틀은 죽음 뒤의 문제, 죄, 용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믿음 등을 강조한다. 다른 절반(아마 더 적을 것이다)의 신자들은 이런 틀에 당황해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로 옮겨 간 이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성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대안이 될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길어올린 것이다.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현대적 의미와 그와는 아주 다른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거듭해서,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이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거듭해서,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좀 더 오래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들을 21세기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과 연결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풍요로움과 지혜를 구원하여 재선포하려는 것이다. 실은 이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를 구원하기”라고 붙이려 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받아야 할 말임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구원자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성서적인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다시 말해 ‘구원한다’는 말은 노예 상태, 감금 상태,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로부터 구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구원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이미 예수, 하느님,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핵심에 관한 책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사안들은 여기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전의 책에 나온 사안을 다룰 때에도, 그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각 장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장은 보통 책의 한 장 길이가 되겠지만, 한 두 쪽인 것들도 있다. 다루는 사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설명이 필요하느냐에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이랄 수도 있다. 이런 입문서는 독서법을 가르친다. 독서는 낱말을 구분하고 발음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기존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읽고 듣고,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우리 신앙의 언어를 다시 읽고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

연재 글 “전례 여행” 차례 및 본문 링크

Thursday, February 2nd, 2012

지난 한 해 동안 <성공회 신문>에 실었던 전례 연재 글의 차례를 밝히고, 해당 글이 있는 온라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의 주소를 링크한다. 원래 기대했던 토론이 이곳이든 <포럼>에서든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 여행
(2011년 2월 ~ 2012년1월, 성공회 신문)

주낙현 신부(서울교구)는 현재 미국에서 전례학과 성공회 신학을 연구하며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을 비롯한 성공회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 http://www.skhcafe.org 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 http://viamedia.kr
트위터 @viamedia

1. 연재를 시작하며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2. 예배, 기도, 전례
3. 전례 – 구원과 선교의 잔치
4. 전례 전통과 도전 – 한국 성공회의 위치
5.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6. 전례와 역사 – 전통과 정통 사이에서
7.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8. 성공회 종교개혁 – 전례를 통한 개혁
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11.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12.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13. 성사와 성사성 – 하느님 은총의 통로
14.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전례와 몸의 감수성
15. “나를 기억하라” – 전례의 기억과 시간
16.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
17.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
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
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

편집자 주: 주낙현 신부의 이 연재글은 서울교구 분당교회의 후원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분당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 문구는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서평

Tuesday, June 7th, 2011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 1939~ ) 신부는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성사적 사회주의 활동가요 신학자이다. 이미 그의 책이 우리말로 여러 권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한 소개와 우리말 번역서 목록이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의 저작 선집이 수년 전에 나왔고, 그에 대한 서평을 발견하여 여기에 옮긴다. 그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명료한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서평 – 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Prayer and Prophecy: The essential Kenneth Leech
David Bunch and Angus Ritchie, editors

피터 맥기어리 신부

케네스 리치는 위험한 인물이다. 예언자들은 대체로 그렇다. 그는 사목 활동 대부분을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서 보냈고, 거기서 그의 놀라운 저작들이 솟아났다. 슬프게도 그의 저작 대부분은 이제 읽히지 않거나 알지도 못한다(실은 피한다!). 영국 성공회가 점차로 신-국교주의가 된 탓이다.

이 때문에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케네스 리치가 쓴 글의 선집을 편집한 데이빗 번치와 앵거스 릿치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제 그의 여러 유명한 저작과 편지, 논문들, 다른 글, 그리고 그의 초기 시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선집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글들을 빼야 하니까. 그러나 편집자들은 리치의 미출간 글들을 들춰볼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은 지금 이스트 런던 성 캐서린 재단에 보관된 것들로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이 책에서 여러 부분을 나누는 일도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연결된 리치의 만다라 같은 글들은 기도와 행동을 분리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켄 리치와 같은 목소리가 오늘날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내게 명백함과 정직함과 진리다움을 늘 되새기도록 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신랄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긴 했다.

그의 입장은 값싼 성상파괴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장난감을 내팽개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본다면, 그는 예언자다. 모든 이들, 특히 권력과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항상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예배에 근거했다.

그가 지닌 사상의 주류는 무엇일까? 그것을 정확하기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 제대로 이해한다면, 공교회주의(catholicism)는 명백한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찾는 일이요, 역으로, 거룩함 속에서 일상을 찾는 일이다.
  • 교회는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 확신하면서 예언자적 증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특별히 권력과 부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평가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비판적 행동은 영국 성공회가 지닌 ‘국교’라는 지위 때문에 늘 훼손된다. 그러나 바빌론이 가져다주는 위안은 시온을 향한 싸움과 양립할 수 없다.
  • 기도와 관상, 성서와 성사에 끊임없이 기대는 일은 본질적이다. 급진적이 된다는 것은 사물의 뿌리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참여와 행동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관상적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관계가 아니다.
  • 우리는 사람들과 있는 그대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바라는 사람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을 사시라! 그의 다른 책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다. 재빨리 읽거나, 차례대로 읽지는 마시라. (내가 보기에 5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 리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생각을 얻기에 좋다.) 그리고 그대가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에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읽으시라. 그래서 이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대를 휘저어서 늘 새롭게 하도록 하시라.

저자: The Revd Peter McGeary, http://goo.gl/q95TC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 (서울교구, 대학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