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Thursday, June 2nd,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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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세기 신비주의 영성 연구의 대가요, 현대 성공회 영성의 이정표인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의 70주기가 되는 해이자, 그의 책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이자, 현재는 미국 성공회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 쇼 신부가 영국 처치 타임스 지에 언더힐에 대한 짧은 글을 실었다. 짧은 글에 언더힐의 핵심적 면모를 뽑아 명료하게 정리했다. 그 글을 번역하여 아래에 싣는다.

옮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사실과 이글에서 눈여겨봤으면 하는 부분을 되새기려 한다. 언더힐은 그 당시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강연했던 ‘여성 평신도’였다. 그의 책 <<신비주의>>는 출간 후 3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다. 천주교에 관심을 뒀지만, 성공회를 몸담을 교회로 선택했고, 신학과 신앙에서 “성공회-가톨릭주의자”로 자처했다. 옮긴 글에서 지적했듯이, 초기 개인주의적 영성에서 공동체적인 영성과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고, 이로써 교회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겪었다. 또, 영성과 전례의 삶을 일상의 생활로 이으려 노력했다. 이런 각성의 변화 추이는 오늘 우리 교회에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성공회 전통과 그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언더힐의 궤적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제인 쇼

올해는 이블린 언더힐의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6월 15일은 그의 별세 70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재판을 거듭했다. 언더힐은 이 책에서 영성과 기도를 다룬 위대한 저자들의 작품을 검토한 뒤, 신비주의는 “살아 있는 절대자와 누리는 의식적인 연합”의 길이라고 했다. 이 책은 위대한 성과였다. 폭넓고 깊은 독서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더힐이 정리한 신비주의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언더힐은 머리만큼이나 가슴을 강조했다. 그것은 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열정’이다. 둘째, 그는 신비주의를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자신의 이웃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셋째, 그는 신비주의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이 신비주의의 길을 붙잡고 걸을 수 있다.

1914년, 언더힐은 길이가 훨씬 짧은 책을 냈다. <<실천적 신비주의: 보통사람을 위한 작은 안내서>>이다. 여기서 그는 신비주의란 과거의 도통한 비결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이나 경영을 배우듯이 신비주의도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독자는 ‘학습 과정 속에서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연습 과정에는 내적 고요와 감각의 정화를 위한 다섯 단계가 있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거룩한 존재와 만남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언더힐이 정의한 신비주의의 길은 매우 개인적인 노력으로 한정됐다. 당시 그는 이 연습 내용에 교회 생활을 넣지 않았다. 의아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언더힐은 신실한 성공회 신자로서 영적 지도자요, 탁월한 피정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쓸 때, 그는 어떤 교회에도 몸담지 않았었다.

언더힐의 영적 깨달음은 서른 살 때인 1904-05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후로도 17년 동안 어느 교회도 공식적으로 몸담지 않았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그는 천주교 전통에 눈을 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언더힐의 남편이 주저했고, 당시 모더니즘의 폭풍이 일면서 자신도 머뭇거렸다. 영국의 조오지 티렐을 비롯한 천주교의 여러 성직자가 비판적 성서 연구와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했던 것이다. 1911년 언더힐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여러 면에서 나는 ‘모더니스트’야. 천주교인이 된다면 여러 압력이 있을 테고, 그로부터 도피하거나 변명하며 살아야 할 거야. 그런 곳에 나 자신을 맡길 수는 없어.” 그는 미사에 참여했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신비주의>>를 출간한 지 10년이 지난 1921년, 언더힐은 마침내 성공회 신자가 됐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점차로 공동체적인 영성에 투신하게 되었다.

언더힐이 쓴 마지막 대작은 1936년의 <<예배>>이다. 여기서 그는 영적 발전에서 성사와 공동체적 의례가 지닌 힘을 강조했다. 그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인정했다. “나는 교회 문제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었다. 오랫동안 교회를 반대하는 편에 섰다. 내 큰 잘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란다.”

언더힐은 길을 찾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어느 교회에도 몸담지 않던 시절, 자신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더힐은 자신이 고민하고, 식별하며, 배우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탐구 과정을 다른 이들과 완전히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을 계속했다. 그는 쉽사리 “오직 하느님께로만” 치우치는 자신의 기질을 인정했다. 그래서 바론 폰 휘겔(언더힐의 영적 지도자)을 통해서 신앙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육신적 차원을 배웠다.

언더힐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실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또 정당한 전쟁론을 찬성했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1930년대에 들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언더힐은 탁월한 서신 교환자였다. 그의 편지에는 영적인 지혜와 더불어 상식적 감각과 재치로 넘쳤다. 수덕주의에 기울던 어떤 이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 자신의 사순절을 생각해 봅시다.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육체적인 고생을 사서 하지는 마세요… 잠을 줄이려고 하지 마세요. 추운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친절하도록 하세요.”

언더힐은 자라나던 피정 운동의 지도자로서 성공회에 또 다른 공헌을 했다. 그가 적은 대로, 1913년에 영국 성공회에는 피정집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는 교구 소속으로 22개의 피정집이, 수도회 소속으로 30개 피정집이 운영되고 있었다. 언더힐은 이 운동의 성장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피정집은 에식스의 플레시 피정집이었다.

그의 글은 재치가 넘쳤다. 성직자 부인 100여 명을 피정 인도한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아무도 성당에서 미사가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미사를 시작하는 종이 울렸을 때 나는 욕실에 있었다. 머리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성당에 다다랐을 때는 복음 독서가 끝난 뒤였다. 그날은 침묵 기간이었는데도 누구도 지키지 않았다… 뭐, 그래서 열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그 곰팡내 나는 교회에서 같이 머물렀지. 그리고 점심으로는 햄 샌드위치를 먹었다. 금요일이었지만.”

실천적이고 신비적이었으며, 열심히 탐구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블린 언더힐. 그는 영적 여정에 있는 모든 구도자들과 신실한 성공회 신자들에게 멘토로 남아 있다.

원문: Jane Shaw, http://goo.gl/3J4h3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유상신 신부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역주: 글쓴이에 대해서 몇 자 적는다. 1965년생인 제인 쇼 신부(The Very Rev. Dr. Jane Shaw)는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요, 역사신학자이다. 현재는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의 주임 사제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직 과정과 신학 공부를 하고, 미국 UC 버클리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29세 나이에 Ph.D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중세 교회사 안에서 잊힌 여성 역사의 재건.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뉴칼리지 신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지금까지 영국 성공회 주교원 신학 자문위원이다. 2010년 11월부터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 주임 사제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성찬례 – 죽음의 권력과 생명의 힘 사이

Wednesday, May 11th, 2011

종교개혁은 간단히 말해서 두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16세기에는 평화기가 10년이 채 안 됐고, 17세기 중반까지 고작 2-3년이 평화기였다… 종교개혁은 이미 자라나고 있던 국가라는 권력 기계를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의 옷을 입혀 그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개신교 종교개혁과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이어진 전쟁 속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교회사학자 디어메드 맥컬로흐가 그의 저작 <<종교개혁>> 막바지에서 종교개혁기의 사회적 갈등에 관하여 내린 평가 한 부분이다. 거의 두 세기에 걸친 무참한 희생을 겪고 나서야 유럽은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지혜에 다다랐다.

‘교리’를 내세운 진리 소유 여부로 복잡다단한 삶의 결을 잘라내려는 무모함이 늘 문제였다.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의 한 장을 덮으려 할 때, 그 무모함이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함부로 누구를 발길질하고 억누르고 목숨을 빼앗는 소식을 듣는다. 강제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역사를 마주한 여러 시선에서 나온 그림과 사진을 본다. 특히 성찬례는 이 진리를 둘러싼 갈등 한가운데 있기 일쑤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전례인 성찬례가 어찌하여 그 죽음에만 집착해 있었을까?

이단자 화형 Burning of a Heretic – Sassetta (약 1430-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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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제대에서는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다. 축성된 성체 거양의 순간이다. 중세 성찬례 신학의 절정이다. 신앙은 거양된 성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단자’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발밑에서 불이 붙었건만 그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 아래서 얼굴 없는 이는 죽음을 지핀다.

죽음을 끝장내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선사하는 성찬례가 교리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진리 판정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타인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중세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기 내내 지속한 일이다.

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 Caravaggio
(약 159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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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이자 복음서 기자로 알려진 성 마태오의 최후를 그린 그림이다. 그는 성찬례를 집전하는 도중에 에티오피아 왕의 명령으로 살해 당한다. 제대 앞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진 마태오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고, 곁에서 복사를 서던 아이의 입은 그 광경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살인자는 천사를 향한 마태오의 간절한 손은 저지하고, 그 오른손은 이제 마지막 철퇴를 준비하고 있다. 화가는 십 수세기를 넘어 그 사건을 당대의 미사 장면으로 재현했다. 그 안에서 카라바지오 자신은 멀리서 그 참혹한 장면을 무심하게 목격한다.

화가의 목격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그림(Sassetta)에 비추면, 두 제대(altar)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나는 권력자들이 소유한 제대이며 죽임을 행사하는 힘의 제대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사제와 어린 복사가 모인 조촐하고 힘 없는 제대이다. 카라바지오는 이단 화형의 중심이 되었던 제대를,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의 제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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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의 “성 마태오의 순교”는 1980년 봄에 있었던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겹친다. 16/7세기라는 당대의 눈으로 1세기 순교 현장을 돌아봤던 화가는 현대에 살아 카메라 렌즈로 로메로의 죽음을 잡아내는 것일까. 화가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할까?

엠마오 만찬 Supper at Emmaus – Caravaggio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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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대속'(atonement)으로 보면서, 죽음 자체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를 의식이나 한 듯, 카라바지오는 이제 성찬례를 친히 세우신 예수를 그려낸다. 이 성찬례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엠마오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와 나눈 식사이다. 죽음이 아닌, 부활의 생명이 더욱 선연하다. 낯선 나그네를 만나 허물 없이 대화하고, 한사코 묵고 가라고 초대해서 마련된 식사이다. 이 대화와 초대가 마련한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깨달음으로 놀란다. 그 식탁은 기름지고 풍성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손은 캔버스를 튀어나와 우리에게 닿으려 한다.

오늘 성찬례는 무엇인가?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