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과 아포리즘

Thursday, August 9th, 2007

“절대 종교와 정치에 대한 토론은 하지 말라.” 군대에서 짝으로 근무서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랍시고 고참이 들려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는 결국 총겨누기 십상이라는 경고겠다. 한국은 이 두가지 주제에 덤벼들기만 하면 무슨 이무기 싸움마냥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종교는 정도가 심해서, 다른 편끼리 붙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제 안에서마저 물어뜯는 모양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세계성공회 전체가 예외가 아닌데, 늘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부각시켜 선점하고 논의를 모양을 한방향으로 끌고가려는 의도가 뒤에서 작용한다.

인터넷이 마련해주는 익명성의 공간과 댓글이라는 반응 형식은 그 원래 의도와는 달리 덮어놓고 물어뜯는 싸움이 된지 오래다. 최소한 어떤 동네에서는… 관구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겪은 일도 있는지라 별로 눈여겨 안보게 된지 오래였는데 한번씩 들러보면 여전히 장난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깊은 생각을 나눈 포스트나 촌철살인의 댓글을 늘 바랄 수는 없겠으나, 해도 너무한 “민주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는 인상이다.

논쟁이든 사람을 관계하는 방식이든, 짧은 글이나 댓글마저도 자기 성찰이나 최소한의 주저함이 묻어난 단편들이었으면 좋겠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서 읽는 어떤 아포리즘은 논쟁의 방식이든지 그에 대한 반응이든, 혹은 사람살이에 대해서 막 내뱉으려는 말을 주저하게 하고, 잠시 두고 생각해 볼 여백을 만들어준다. 아래의 짧은 경구들은 성공회 성직자로, 노름꾼, 예술 수집가, 그리고 작가로 살았던 찰스 칼렙 콜튼 신부(Charles Caleb Colton, 1780-1832)에게서 따왔다. 특별히 요즘 말싸움들에 대한 좋은 경구들이겠다.

  • 사람들은 종교를 두고 논쟁하며, 그에 대해 글을 쓰고, 그걸 두고 싸우며, 종교를 위해 죽기까지 한다. 그러나 종교를 위해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 진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시간이며, 그 가장 큰 적은 편견이다. 그리고 겸손은 진리의 영원한 도반이다.
  • 할 말이 없거든 아무 말 하지 말라. 위약한 반론은 당신의 적을 강하게 하겠지만, 침묵은 좋지 않은 답변보다 손실이 적다.
  • 성인과 죄인: 자칭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불관용 – 막 생겨난 길이 가장 거칠듯이, 막 성인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처럼 불관용적인 죄인이 없다.

모호한 길의 모험

Monday, February 27th, 2006

격월간 [공동선] 3-4월호에 실린 글을 이 자리에 옮겨 싣는다. 쓰나미 재해에 관련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을 번역하여 싣는 일로 인연을 맺은 “공동선”에서 다소 거창하게 “나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부탁해 왔다. 나이 70줄은 돼야 이런 제목을 받을 만한 터에, 뭘 살아왔다고 “나의 길”을 운운하는가 싶었는데, 바로 으레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앳된 생각이라도 나누려는 게 기획의도라는 해명에 한번 써보마고 했다. 내뱉은 말들은 늘 부끄러움이지만, 여전히 걸어가는 여정길에서 우연히 만날 어떤 날줄이 되는 경험 나누기였으면 하는 한가닥의 바람일 뿐… 여기에 중복 게재를 허용해 준 격월간 [공동선]과 문윤길님께 감사를 드린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