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이콘 사이에서 –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3
Monday, February 23rd, 2009이미지와 이콘에 대한 생각과, 우리 교회의 허명(虛名)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든다.
1.
한동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가? 2mb도 어떤 성공 신화와 삽질하는 이미지때문에 당선됐나 하는 생각이지만,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 삽질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만큼 자기 편한대로 조작가능한게 이미지다. 이게 앞에 언급한 천주교에도, 우리 성공회에도 해당이 되지 않나? 문제는 이미지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요즘 이미지는 위선과 동의어로 들린다.
2.
이미지와 말뜻이 같은 다른 말로 “이콘”(icon)이 있다. 특히 정교회 전통의 신학적 영성적 그림을 말하는데 쓰일 때다. 이때 이콘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성사(sacrament)와 그 정의가 가깝다. 감춰져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의 신비는 감춰져 있는데, 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이미지)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를 감상하려면 색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먼저 기이하고 불편한 상을 깊이 응시하여, 그것이 내게 말걸고 도전하는 것을 음미하는 일이다.

진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이콘이 우리 지각을 불편하게 할 것은 당연한다. 반면에 “이미지 정치”는 우리를 낭만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어떤 환상을 비춘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감추인 것은 무엇인가?
5.
남들 탓하자고 일련의 글을 올린 게 아니다.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질문은 대뜸 이렇다. “그럼 우리 (혹은 ‘느네’) 성공회는?”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들 한다. 가난하고 청렴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고,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의 삶을 생각하면 속 상해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그러나 더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작으니, 청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속에 여전히 “중산층 욕망”이 가득한데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에서 비판의 우위에 선 것뿐은 아닐까 하고. 그게 혹 허상은 아닐까? 허명은 아닐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성명서라도 내고 있는데, 그나마 그 입에 발린 말도 성공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우리 성공회의 정의평화사제단(예전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이었다)은 어디에 이름을 팔아 먹었는지, 그 안에서 애쓰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모르겠다. 천주교 주교회의의 성명서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신학적 반성의 언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어떤 신앙적 실천의 면모가 성공회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걸핏하면 87년도 6.10 항쟁의 구심에 성공회가 있었네 하고 짐짓 추억한다. [유월민주항쟁 진원지]라는 돌덩이 하나 구석에 박아두고 ‘왕년에 이랬네’하는 것인가? 왕년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왕년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없다. 그 왕년을 이야기한다 쳐도, 전체로서 교회가, 우리 성공회가 유월 민주화 항쟁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가? 아니, 그때 열심히 참여했던 이들을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 허명을 팔지는 말 일이다. 그 허명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치욕과 굴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울 수 있다. 불편함을 대면할 때라야, 그저 보이는 것 너머로 감춰진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