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Sunday, December 27th, 2009

갑작스레 당한 집안의 슬픈 일로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 혼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은 아내와 함께 돌아오려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잠시 더 머물렀다. 그 틈에 분당 교회임종호 신부님께서 설교와 강연을 요청하셔서, 상중이었으나 오랜 우의로 받아들여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후에 잠시 임신부님과도 나누었듯이, 낯선 형식에 낯선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내 설교와는 달리 꽤 길어서 청중을 지루하게 했다. 내 여러 처지에서 비롯한 마음의 불안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 불안하게 떠도는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죽비 맞고 싶은 생각에, 설교문 전체를 올려놓는다.

성공회 분당 교회
성탄 첫 주일 (2009년 12월 27일)
1사무 2:18-20,26 / 시편 148 / 골로 3:12-17 / 루가 2:41-5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채 도착하기 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그 슬픔이 더 컸습니다. 이런 슬픔 탓인지, 마음에 휑한 구멍이 난 탓인지,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사회가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멀리 느껴졌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사회, 특별히 도시의 삶이 그토록 빨리 변했던 탓이겠고, 저와 제 가족의 마음 상태도 그전과 달라진 탓이라 생각합니다.

틈이 나서 다른 가족을 만나러 고향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여러 곳도 많이 변해 있더군요. 혼자, 혹은 가족과 거닐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절집에 다시 가보았더니 그마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늘 보아 왔던 어떤 집이 기차길 옆에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대 숲을 뒤안으로 삼은 아름답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섬처럼 남아, 외곽으로 확장되는 아파트의 파도에 막 삼켜질 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삶의 변화 때문이든, 제 심경의 변화 때문이든, 저는 어떤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이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딘가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 느낌은 저 자신을 불안하게 하더군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습니다.

한편, 이런 낯선 거리감을 응시하다 보니, 제게 또 다른 시선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두거나, 바깥에서 보니 사물의 다른 면이 보입니다. 보는 각도 정도가 아니라, 위치와 처지가 달라져서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다른 시선은 신앙인의 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 가곤 합니다. 신(神)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 그 하느님이 살과 뼈를 가진 아기가 되어 한없이 낮게 왔다고 믿는 이 기괴한 종교를 가진 신앙인의 어떤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신앙인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낯설고 기괴한 사람입니다. 종교, 혹은 신앙이 이 세상과 사회와는 조금은 다르게 낯설고, 거리가 있지 않다면 이를 종교라고 부르기 참 어렵습니다. 성탄을 통한 성육신 사건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사건 자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사건으로 남습니다. 세상 끝날에 이르러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하기까지 이 낯선 거리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가 깨지는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하는 또 다른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성탄을 통하여 솜 결보다 부드러운 아기 예수의 친밀함과 따스함을 느껴야 하는 마당에, 거듭해서 낯선 거리감을 말하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거리감과 불편함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중요한 물줄기를 마련해 왔습니다. 좀 잘난 체 하는 말로, 그것은 어떤 사태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해석학적인 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내내 뽀송뽀송한 편안함과 위안의 말만 건네는 성서 풀이나 어떤 안락한 경험이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역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참 종교를 식별하는 기준과 방법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20세기 서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거론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 그리고 참 종교를 구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종교적인 언어와 모양새, 교리 체계, 신앙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축복합니다. 좀 더 깊이 보면, 사람이 가진 어떤 욕망과 심지어는 욕심을 배불리는 일에 봉사합니다. 종내에 이 사이비 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축복, 자기 가족 혹은 자기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는데 몰두합니다. 나보다 큰 것, 어떤 초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해도 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화려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여러 종교가 이런 사이비 종교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는 자기와 같은 전략을 갖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생각을 협박처럼 퍼뜨립니다.

한편, 유사 종교는 종교의 형태를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나 예배 같은 것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자기 자신의 복지와 축복에 집중한다면, 유사 종교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예입니다.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 인류애, 아니면 사회의 체제 등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떤 가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종교보다 이런 유사 종교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이념, 윤리적 이념이 차라리 낫다고들 합니다.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무신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어떤 비판적인 이념의 확장 때문이 아니라, 실은 사이비 종교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참 종교는 그 형태와 논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쉽게 간파하기도 발을 들이기도 어렵습니다. 특정한 종교적인 언어나 신앙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의 축복과 어떤 집단적인 가치의 실현을 생각하면서도, 그 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어떤 것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것, 자기 집단보다 더 큰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바로 참 종교의 태도라고 합니다. 이 개방성이 바로 자신과 어떤 집단을 초월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 상상력입니다. 참 종교는 모든 바른 것이 자기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너머인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초월’이라고 합니다.

초월에 참 종교의 길목이 있습니다. 이 초월을 향한 열림의 길로 들어서려면, 세상의 편하고 낯익은 것들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이 세상과는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 초월이 열립니다. ‘이곳’에 근거하여 축복을 끌어들여 만족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의 신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종교나 교회를 어떤 특정 이념에 다른 사회 변혁의 근거지로 만들려 하면 유사 종교의 활동가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참 종교인은 ‘이곳’이 불편하고 낯설고, ‘이곳’과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여러모로 매우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다른 외경 말고는 낯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오늘 본문만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도 매우 이상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번 주일을 성 가정 주일이라고 칭하며 축하했습니다. 성탄 첫 주일에 그럴 듯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그 설정을 배반하는 듯합니다. 무슨 성 가정의 부모가 자기 아들 챙겼는지도 모르고 하루나 여행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까? 아니 무슨 아들이, 자식을 잃어버려서 애간장이 탔을 어머니의 염려에 뭘 모르는 소리 말라고 오히려 타박을 합니까? 이게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성 가정의 실체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을 좀 낯설게 보라는 초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조금은 낯설게 보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무엇을 당연하게만 듣지 말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 어떤 도전을 들으라는 말이 아닐까요?

3.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그 열림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보고 상상력을 키워나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교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신앙의 몇 가지 비전과 도전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운동에 대한 믿음이요, 이를 따르는 행동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눈여겨보면 좋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움직임에서 전체를 비추는 어떤 실마리가 드러나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서 지키기로 되어 있는 명절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세상의 공간을 떠나 거룩한 공간인 성전으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이 성과 속 사이의 지속적인 반복 운동은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원형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 적어도 매주에 한번 성찬례를 드리러 구별된 공간에 모이는 탓은 이러한 예수의 운동을 따르려는 중대한 훈련입니다.

다만, 하나 더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운동은 금세 매너리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얼른 정해진 일을 치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습니다. 아들을 챙겼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나홀로 집에’서나 보일 법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예수님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성전에서 기도하고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일이 자명한 대답을 건네주는 것이라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숙지한다고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포되는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석, 그리고 성찬례의 신비에 대한 경험과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으며, 그 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을 붙잡고 늘어질 때, 신앙의 발돋움이 있습니다. 바로 소년 예수가 보여주는 신앙 성장의 한 정점입니다. 여러 궁금증과 더불어 질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는 신앙생활의 운동은 정지하고 맙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명하게 주어진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시다. 교회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한 교회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한 비난과 그 생명력에 대한 비관이 넘쳐나는 이유는 하느님을 질문 속에서 찾기보다는, 자명한 대답을 주려 하거나 강요하고, 여러 질문과 씨름하지 않으려는 탓이 아닐까요?

둘째, 신앙은 균형 있는 긴장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조화입니다.

균형 있는 긴장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몸으로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긴장이 주는 조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낯선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오해받거나 욕먹기 쉬운 일은 갈등하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일입니다. 입장을 선택해서 주장하는 일은 쉬어도, 서로 다른 입장 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화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그 낯설고 힘든 화해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아프고 컸습니다. 그럼에도, 분열된 것들을 화해시키고 조화롭게 하기 노력은 우리 신앙인이 받은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바지에는 소년 예수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 사회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요? 몸을 극단으로 훈련하는 스포츠가 있는가 하면, 머리 사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놀라운 입시 지옥의 교육 현실이 있습니다. 몸을 가볍고 날씬하게 만들고, 예쁘게 고치는 일에 놀라운 투자를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국민 월평균 독서량은 한 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례와 예배 생활은 애초에 몸과 머리가 함께하는 일이지만,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좋은 ‘말씀’만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내 몸의 실천은 나 몰라라 합니다. 몸과 지혜가 함께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편, 하느님께만 잘 보이면 되고, 이웃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상실된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의 총애를 받는 소년 예수의 성장이 드러내려는 복음의 가치가 보이질 않습니다.

바울로 성인께서는 오늘 서신 본문에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덕목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에서는 그저 말 뿐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말하고, 감사의 생활을 입에 달고 살지만, 우리의 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는 권고 있지만, 절대로 가르침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남의 어느 교회가 교회당 건축에 2천억을 들이는 동안에, 국가 예산 절감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사회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로 서신의 원문에는 “옷을 입어라” “옷을 벗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뒤덮은 몸과 머리의 불균형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분리라는 우리 신앙의 분열증을 벗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옷을 입어라”하는 권고를 듣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른바 ‘신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균형 잡히고 긴장감 있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앙적 결단과 실천 속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낯선 사람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되, 비판적인 거리 두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한 사람들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유사 종교를 넘어서서, 참 종교의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낯선 거리두기의 시선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서 낯선 사람들이기를 자처해야 합니다.

4.

우리 인생에는 모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슬픔과 실패와 배신의 고통이 우리를 뒤덮어, 이 세상이 낯설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이러한 낯설어짐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림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상식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미 떠나간 우리의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녀과 함께 하는 ‘성인들의 친교’는 이 세상이 주는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기괴한 신비 사건들을 믿으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백성만이 누리는 희망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낯선 이방인 여러분, 하느님의 집 안에서 머물러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즐깁시다. 집으로 향하는 길과 예배의 공동체로 향하는 길의 반복된 긴장과 균형 속에서 여러분의 몸과 지혜를 날로 키워나갑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놀라운 지혜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신앙의 실천이라는 몸을 단련합시다. 복음의 가치 속에서 피차 낯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내는 초월의 공동체를 경험하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합시다. 그 즐김과 키움과 단련과 분투 속에서,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역설의 사건, 임마누엘의 신비를 높이 찬양합시다. 오늘 시편의 가수와 함께 그 신비를 목청껏 노래합시다.

“이제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주시니,
당신을 가까이 모신 이 백성,
당신을 믿는 모든 신도들에게 자랑이로다.”

아멘.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

Monday, March 30th, 2009

1.
여러 죽음의 소식들이 지난 몇 주간 내 자신과 주위를 우울하게 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야만을 고발하며 한국의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저혈당 쇼크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이웃 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전에, 이제 지성에 경륜과 너그러움을 더하여 새로운 목회를 꽃피우던 지인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셨다. 그동안에 이웃 도시에서는 네명의 경관이 총격에 쓰러졌다. 죽음은 그 자체로 삶 전체를 압도하며 넘실 거리기에, 옆에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할 말을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앞에 침묵과 눈물만을 보탤 뿐이다.

2.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침묵과 눈물 속에서 죽음은 숭고하다. 죽음은 이후에 내내 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쓰러진 이가 젊을 수록, 혹은 더 많은 기대를 받던 이일 수록, 무너지는 억장과 슬픔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 의미는 비루한 언어로 담기에 벅차다.

그 슬픔의 눈물 안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같은 직종이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아, 나도 준비해야지, 생각한다. 이 순간, 그 죽음의 사건은 타인의 것이 되고, 금새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런데 이게 연민에 의한 감정의 중첩 지점인지, 아니면 타인의 죽음과 내 삶을 거리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인지 잘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어려운 걸 보면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삶의 자리가 달랐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응시보다, 이내 그와 연관된 이야기거리로 관심이 옮아간다. 때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딱히 서른 생애를 이 땅에서 몸부림쳤던 삶 자체의 숭고함에 맞춰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에둘러 실체를 가리고, 귀 막고, 덮어두더라도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진실은 감춰지고, 뒤마려운 이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죽음과 삶 자체보다는 이야기거리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가십거리가 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게 된다. 우리가 늘 그들 삶의 한부분씩을 훔치며 소비했던 것처럼.

3.
밥 한숟가락을 물어 목구멍에 넘기려는 찰라, 한웅큼 치밀어 오르는 울컥증과 그만큼의 눈물이 섞이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빈자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긴다. 생의 욕구가 더 큰 탓일까?

4.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이다(적어도 우리 전통의 장례와 그에 대한 내 경험의 해석으로는). 죽은 이를 보내려는 일정이 가져온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훔친 눈물은 금새 지인들끼리 나누는 반가운 히히덕거림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반가움의 결이 어떤 불폄함 없이 겹쳐진다. 우리 삶은 이렇게 겹쳐진 것들도 가득차 있다.

5.
우리에게는 죽음을 설명할 말과 논리가 많지 않다. 때로 종교를 통해서, 혹은 경전의 몇 구절과 그 해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하는 바, 혹은 희망하는 바를 선포할 뿐이다. 엄밀히 그건 설명도, 논리도, 설득도, 심지어는 위로도 아니다. 다만 이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화두일 뿐.

6.
그렇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분노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일 때, 그 죽음이 조건지어져 있을 때다. 그건 사랑때문이다. 아직 사랑할 일이 많은 이가 이내 꽃피울 그 사랑의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도록 내몰린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기회마저 어떤 이에게서 빼앗아 버릴 때, 그 죽음을 대하는 분노가 스러져서는 안된다.

다시, 삶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한 연민의 중첩 과정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게 악다물며 되뇌이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더 많이 기뻐해야지,””사랑의 기억으로 삶을 수 놓아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서는 안될 일이다.

그 사랑을 막는 것들, 훼방하고, 심지어 훼손하는 것들에 향한 분노가 여전히 살아 남아야,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 죽음과 삶이 숭고한 것은 사랑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침묵과 눈물로 말을 잃는 것도 실은 그 사랑때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사랑을 앗아가는 것들과 끈질기게 대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