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 상식을 이기는 감사의 신앙

Sunday, July 26th, 2015

오병이어 – 상식을 이기는 감사의 신앙 (요한 6:1~21)1

성서의 기적 이야기는 늘 우리의 상식을 시험하는 듯합니다. 덮어놓고 믿자니 허무맹랑하고, 의심하자니 신앙의 덕이 모자란듯하여 입 밖에 내기 부담스럽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오병이어’ 사건은 복음서 네 권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일 만큼 예수님의 삶과 선교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다섯 주간 동안 요한이 전하는 ‘생명의 빵’ 이야기를 이해하는 열쇠이니 허투루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오늘 이야기의 장면으로 초대합니다.

– 무대는 산에 펼쳐집니다. 요한복음서는 늘 구약성서 이야기를 머리에 담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나고 계명을 받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과 노예의 사슬에서 끌어낸 해방자 모세를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우리의 궁핍과 어려움을 보고 지나치지 않는 분입니다.

제자들 –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손익계산서를 예수님께 내밀며 실행이 곤란하다고 머리를 젓습니다. 현실을 나 몰라라 한 무리한 요구라는 불평입니다. 빠듯한 살림에 다른 사람을 보살피거나 선교에 힘쓸 겨를이 없다는 우리의 걱정이 겹쳐지는 장면입니다.

소년의 도시락 –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앞에 소년의 오병이어 도시락이 올라왔습니다. 이름 있는 제자들과 이름 없는 소년이 비교됩니다. 큰 어른의 손익계산과 작은 소년의 봉헌이 대비됩니다. 마련해야 할 엄청난 음식과 작은 도시락의 차이가 뚜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무명의 소년이 지닌 작은 도시락의 정성에서 일을 펼치십니다. 신앙인은 크기와 관계없이 어떤 헌신과 봉헌에서도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고 믿습니다.

감사기도 – 예수님은 감사기도(유카리스티아-성찬례)를 올립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축복’이라는 표현과는 사뭇 다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행동으로 축복이 널리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나서야 제자들이 움직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 분량의 음식은 제자들이 이전에 흔들었던 손익계산서 한 장과 좋은 비교를 이룹니다. 모세의 만나는 썩었지만, 예수님의 음식은 모아도 썩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더 먹이는 데 쓰입니다. 삶에 감사하는 모든 행동이 풍성한 변화를 낳고 썩지 않으며 널리 펼쳐집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물 위의 예수님 – 은총과 축복을 받았다 해도 우리 삶은 여전히 세상의 풍파와 사나운 파도 속에서 위태로운 시간을 겪습니다. 은총과 위기를 번갈아 겪으며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동행하시니 ‘두려워 말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목적지에 닿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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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26일 연중17주일 주보 []

측은지심 – 자비로운 휴식, 넉넉한 신앙

Sunday, July 19th, 2015

측은지심 – 자비로운 휴식, 넉넉한 신앙 (마르 6:30~34, 53~56)1

“아, 쉬고 싶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입에 달고 사는 말입니다. 쉼 없이 바쁜 생활, 특히 현대의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이 드러납니다. 선진국 반열에 든 우리 사회이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생활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는 더욱 깊은 한숨이 되어 나옵니다. 깊이 듣고 살피면 육체의 피로를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매일 듣고 살며 경험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어지럽고 불의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깊은 피로를 느끼며 평화를 목말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응답해야 할까요?

예언자 예레미야는 쉼 없는 사회의 피로가 어디서 나왔는지 갈파합니다. “겁이 나서 무서워 떠는” 사회와 인간관계가 이런 한숨 섞인 피로의 원인입니다. 소위 ‘갑을관계’가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사람을 향한 보살핌과 안녕을 도외시하는 여러 정치 행태와 규율이 사람을 겁나게 합니다. 자녀교육과 취업 문제로 시름 깊고 마음 불안합니다. 이때 신앙인은 인간관계의 정의를 기도하고,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에게 모두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람 사이에 만드는 정의와 평화의 토대를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는 누구도 서로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억누르거나 강요하는 삶을 떠나, 낯선 사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여 형제자매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성장 비결은 그리스도의 환대와 사랑을 중심으로 커가는 새로운 가족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집’인지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을 이룬 가족의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몸소 보여주십니다.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기에 육체의 피곤을 느끼십니다. 피세정념(避世靜念), 즉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일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생활에서 잠시 발을 멈춰야 큰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과 사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멈추어 바라본 세상에 마음을 주는 일이 측은지심입니다. 그런 뒤에 일상에 다시 돌아와 움직이는 행동은 이제 일이 아니라 치유요, 구원입니다. 치유와 구원을 펼치는 자비의 손길은 피곤함을 모릅니다.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련해 줍니다. 말씀과 성체로 서로 먹이는 풍요로운 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휴가와 휴식의 계절에 우리는 정의와 평화, 측은지심의 기운을 되살렸으면 합니다. 성서로 기도하고 좋은 신앙 서적을 읽으며 우리 자신을 가르치고, 낯선 사람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고 발견하는 시간을 가꾸어 갑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과 가정, 우리 교회와 사회를 ‘신령하고 넉넉한 하느님의 집’으로 세워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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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ian Maier)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19일 연중16주일 주보 []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Sunday, June 28th, 2015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마르 5:21~43)1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 이야기는 모두 ‘구원’ 이야기입니다. 성서 원어에서도 ‘치유’와 ‘구원’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아픈 이들을 고치신 사건에는 우리 삶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비롯한 오늘 독서에 담긴 구원의 선포는 분명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여성이 오늘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 두 여성을 이해할 때, 오늘 복음의 뜻이 풀립니다. 2천 년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의 고통 아래 살았습니다. 한 여인이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았습니다. 당시 종교의 정결법은 피를 흘리는 여성은 ‘더러우니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오염된 여인’의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아픔을 돈벌이로 이용했습니다. 회당장의 딸은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상황에 관한 고발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착취에 희생당하거나, 주어진 능력과 뜻을 펼치지 못하고 짓눌리기 일쑤입니다.

하혈병 앓던 여인은 몰래 예수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세상은 ‘두려운 남성의 체제’였기에 치유의 힘마저도 숨어서 얻어야 했습니다. 여느 ‘남성’과 달리, 작은 이들에게 세심하고 예민헀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 나오게” 했습니다. ‘나오라’는 말씀은 그의 존재 전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고통, 숨기고 싶은 자신의 연약함을 당당히 선언하며 ‘커밍아웃’(coming-out)하여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때 새로운 정체성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이제 “딸”(디가테르)이라 부르며, 온전한 “평화”(샬롬)의 삶을 분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랑하는 작은 딸’(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미 죽었으니 ‘폐를 끼칠 일 없이’ 그만두셔도 좋다는 조언을 마다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희망을 만드는 일에는 그 어떤 일도 ‘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을 무릅쓰고서라도 손을 펼쳐야 합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희망을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라”는 말씀에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을 뚫고 일어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미리 드러납니다. 억눌린 ‘작은’ 이들의 생명은 일어서야 하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지닌 이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며 걷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치유는 아프고 혼란스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감수성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에게만 예민하지 말고, 밖에서 다가드는 요청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한계와 정체성을 인정할 때, 구원이 펼쳐집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이웃과 사귀며 하느님과 신뢰를 마련할 때, 신앙이 힘을 얻습니다. 이 신앙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눌린 생명을 살리고 꽃피우는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합니다.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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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28일 연중1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