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의미 – 이브 콩가르 O.P.

Monday, March 28th, 2011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종교개혁이라는 사고 틀 안에서만 ‘전통’을 본다. 이때 전통은 16세기 당시 서방교회가 물려받은 중세의 관습과 동일시되기 일쑤다. 그로부터 5백 년이 흘렀지만 이런 틀거리는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아마도 스스로 종교개혁의 적자라고 생각했던 청교도의 열광이 미국을 거치며 더욱 배타적으로 강화되고 한국의 식민지적 선교 환경과 그 유산 안에서 더욱 말라비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보수파는 그렇다 치고라도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5백 년 동안 서방교회의 유산 아래서 천주교와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몇몇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만 되뇌고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이른바 교회 일치 대화가 무르익으며 서방교회 내의 유산은 물론, 그동안 살피지도 않았던 동방교회의 여러 전통에서도 배우며 신학과 신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게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의 혁명적 사건을 인정하더라도, 당연히 그 한계도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교개혁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20세기의 여러 신학적 반성과 운동은 ‘16세기 서구 맥락과 틀’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가운데 다시 떠오르는 주제는 ‘전통’에 대한 이해였다.

전통에 대한 이해는 역사와 삶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신앙의 연속과 단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역동성이 상실되는 순간 전통과 전통주의가 나뉜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야로슬로프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예고 없던 트윗 대화 (@prayandwork & @viamedia) 끝에 이 전통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폴 틸리히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공교회)는 서기 300년경에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교회의) 첫 몇 세기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톨릭적(이중적 의미) 양상들은 아주 초기에 이미 강력했다. 이는 성공회의 ‘중도’(via media)라는 것도 교회들의 분열에는 이상적인 해결책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작동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이른바 첫 5세기에 마련된 합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의 원칙들과 합의와는 다르다… 첫 5세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한 교리, 권위의 체계, 성사에 대한 이론 등이다. (영역본에서 재번역. 괄호는 옮긴이)

이 부분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온 (가톨릭) 전통을 무시한 채로, (프로테스탄트) 원칙만으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이 설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반대도 말이 된다. 그 참에 20세기 천주교 내의 신학적 개혁, 특히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프랑스 신학자요 도미니칸 사제인 이브 콩가르(1904-1995)의 글을 되새긴다. 그에 대한 우리말 번역 작업은 인색하다.

그의 역작 [전통과 전통들]의 요약판이요 대중판으로 불리는 [전통의 의미](영역본)의 서문을 옮겨 놓는다.

이브 콩가르 O.P. [전통의 의미] 서문

성공회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1956년 성공회와 정교회의 신학 대화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전통과 전통이 성서와 맺는 관계에 관한 토론이 있었는데, 러시아어 통역자는 이 전통이라는 교회 전문 용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통을 그냥 “옛날 관습”이라고 번역하더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 아마도 이 짧은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러시아어 통역자와 비슷하게 전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전통이 별 비판 없이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존중받고 받아들여진 관습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늘 그대로인 것일 뿐만 아니라 “늘 그렇게 행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전통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 사회에서 전통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위험해 보이는 새로운 시도를 막는 장치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제안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전통은 변화를 막기 위해 쓰이는 낱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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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직” 상념

Friday, March 25th, 2011

로메로 대주교의 축일을 홀로 상념에 빠져 지낸 며칠. 당연한 듯, 한국에서는 그 어디에도 그를 기념하는 예배나 미사는 없었다고 듣는다. 아울러 작년에 적은 상념 가운데는 주교직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 어디서나 논란이 되는 주교직. 작년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몇 세기 동안, 주교는 대체로 ‘순교자’와 동의어였다. 이때 순교(martyria: 증언)는 선교의 다른 말이었다. 물론 주교는 지역 교회의 총괄 사목자요, 신학 선생이기도 했다. 이것이 위계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 몇 세기 후, 주교는 교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목 아래 세속 권력과 손잡고 ‘권력자’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권력자로 자리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이후 교회 역사에 큰 어둠을 남겼다. 따라서 위계의 목적도 바뀌었다. 그 어둠을 깨는 빛나는 주교들 몇이 있었으나, 어둠은 오래갔다. 한편, 현대의 주교 행태는 이제 CEO를 닮으려 한다. 이 마당에서는 순교(삶의 증언), 사목(보살핌), 선교(하느님 나라), 신학(기도와 성찰), 심지어 교회 일치를 위한 권위(전례와 교리)는 희미해진다. 볼썽사나운 거들먹거림과 범접할 수 없는 안정된 위치, 그리고 결제 권한이 자리 잡았다.

주교직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그에 대한 보살핌)에 ‘종속’된 것이다. 그 종속에 충실하여 공동체를 보살피며 지킬 때, 권위가 나온다는 점에서 주교직은 하나의 역설이다. ‘주님의 종’ 혹은 ‘하느님의 종’은 이 역설을 일컫기 위한 것이다. 이 역설의 신비를 살지 않기에 위계는 타락하여 지배 권력의 관리 체계가 된다. 이런 점들은 주교직의 대리(vicar)로서 사제(presbyter/priest)직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그 주교 아래서 그 사제가 나오는 법이다. 이런 점으로 교회 현실과 나를 돌아보며, 내 가슴을 친다.

주말 오후, 잠시 미뤄두었던 짧은 글 하나를 내어 읽는다. 한국 성공회 독자에게도 이미 잘 알려진 마틴 스미스 신부가 주교 선거를 두고 쓴 상념이다. (그는 미국 성공회 성 요한 수도회 SSJE 에서 오래 수련장 수사 신부로 봉사하며 영적 지도와 관련 저술을 다수 펴냈다. 10여 년 전 수도회를 떠나서 좀 더 자유롭게 영적 지도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그 가운데 토막을 옮겨 적는다.

주교직의 핵심 상징 중 하나는 의자이다. 감독한다는 말, ‘캐시드라’, 즉 주교좌에 앉는다는 말은 앉아서 가르치는 행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은 우리가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다. 복음에 빛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라면 주교가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주교가 일에 휩싸인 관리자가 되어 그 사목에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구할 일이다.

복음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상징하는 것과 더불어, 주교좌는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목적 요구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 발밑에서 근간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현대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앉아 중심을 잡고서 사태를 안정시키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초점을 견지하도록 돕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내가 큰 감화를 주었던 주교들은 모두 아주 잘 앉아 있는 이들이었다. 재빨리 뿌리를 내릴 줄 아는 분들이었다. 특히 팔을 걷어붙이고 탁자에 함께 둘러앉는 분들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태를 구별하여 파악하고 초점을 잡는 분들이었다. 사목자로서 그분들은 사람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간명하게 사목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이 주교직을 보완하는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라는 것이다. “에피스코포스”는 한마디로 감독자라는 뜻이다. 이는 조망이 유리한 위치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큰 맥락을 살피고 특수한 처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사회와 조직의 흐름이라는 좀 더 큰 상황에 연결한다는 말이다. 좀 더 넓은 안목을 갖는 것이 주교직에는 본질적이다. 그리하여 곤란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큰 그림과 명령,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위해 기꺼이 우뚝 서야 하는 직분이다. 새로 세워진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비는 하느님의 큰 그림 속에 담긴 명령과 희망을 향해 우뚝 선 그의 사목직을 감동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지엽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주교가 되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앞을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좀 더 멀리 보는 이를 부르신다. 반대와 분노에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더 넓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되새겨주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를 부르신다.

한편, 이에 대한 어느 독자의 댓글이 인상적이다. “옛날에 주교는 신학자요 선생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주교가 신학자가 아니고, 신학자는 주교가 아니다. 설상가상, 많은 주교들은 신학자들을 못 미더워하고, 많은 신학자들을 주교를 못 미더워한다. 다만, 좋은 선생이며 주교인 분을 주시기를 기도할지니…”

성사: 나눔으로 거룩한 일, 혹은 생명의 상상력

Monday, February 21st, 2011

1. 십몇 년 전 신학교의 교실 풍경 하나

교수 신부님은 뜬금없이 “성사(聖事: sacrament)란 무엇이오?”하고 물으셨다. 무슨 맥락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단답형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들에 혀를 차시던 그분은 옆자리로 연이어 한사람씩 물으셨다. 어느 동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거룩한(聖) 일(事)’입니다.” 신부님은 한숨을 몰아 쉬셨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광경에 나 자신도 당황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작정하신 듯 차례로 물어보시던 신부님은 내 차례가 되자 건너뛰어서 다른 학생에게 물으셨다. 아직도 그때 왜 나를 건너뛰셨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국 유학 중이던 외국인 부제님이 대답했다. “성사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수 신부님이 바라던 모범 답안이었다. 너무나 쉬운 개념 정의를 모르던 학생들을 탓해야 했을까? 실제로 이 답을 모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맥락을 설명하지 않았던 문제는 없었을까? 여러 생각을 모아서 개념과 정의로 이끌어줘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마저 그때 스스로 겪었던 당황을 변명하는 것일까?

2. 성사는 나눔으로써 ‘거룩한 일’

오늘 주일 성서 정과의 말씀에는 기쁘도록 복된 말씀이 넘친다.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레위 19:1-2,9-18). 놀랍게도, 하느님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었던 뱀의 속임수가 아니었던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늘 레위기 본문과 창세기 해당 본문의 큰 차이는 ‘독점’과 ‘공유’에 있다고 보인다. 에덴동산 타락 사건은 하느님의 ‘위치와 능력’을 탐내어, 손대지 말아야 할 공유의 영역을 사유화한 문제이다. 반면, 레위기에 나온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한 보호와 배려, 그리고 힘있는 이들을 향한 공정한 재판이라는 실천 목록과 잇닿아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좀 더 확장하신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38-48). 이 말씀 역시 보복이 아닌 용서, 보호가 필요한 이들과 동행, 형편이 궁한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과 잇닿아 있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펼치신 구원 사건의 목표였다.

성찬례는 이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당신 몸까지 내어주신다. 이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 먹는다. 4세기의 성찬례 집전 사제는 영성체에 신자들을 이렇게 초대했다. “거룩한 사람을 위한 거룩한 것입니다.”

3. ‘어머니인 교회’ – 생명을 위한 상상력

중세의 마리아 숭배가 한 극단이었다면, 종교개혁의 마리아 배척은 또 다른 극단이었다. 교부들의 신앙 속에서 마리아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표상된다. 이 표상은 교리적인 ‘동정녀’나 ‘어머니’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낳아 기르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tokos)라 과감히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만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것은 거룩한 변화의 과정이며, ‘거룩한 일’이다.

성 어거스틴의 강론 한 대목을 듣는다.

거룩하신 마리아, 복되신 마리아. 그러나 교회는 그분보다 더 큽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지체입니다. 다만, 고귀하고 탁월한 –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 지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전체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몸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지체인 그분보다 큽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머리와 몸이 함께 전체 그리스도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역시, 제가 말하고 있는 그대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누가 그대들을 낳았습니까?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마리아처럼, 교회는 어머니요, 동정녀입니다. 교회가 어머니인 증거는 바로 그대들입니다. 그대들을 낳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 몸에서 낳은 이를 그들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그 사건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이미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됩니다… 이 세례의 목욕탕에 있는 그대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St. Augustine, Sermon 25

4. 거룩한 실천

여기에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을 넘어선 구원 사건이 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우리는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 성찬례는 그 거룩한 변화(성변화, transubstantiation)의 본질을 말해준다(이 용어를 교리적 논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부름받은 교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 여기에 성사인 교회가 있고, 교회의 선교가 있다. 그 실천 속에서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대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 세상의 질서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이 있다. 이 실천이 ‘거룩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