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10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 지명 특집 기사

Friday, March 16th, 2012

로완 윌리암스 제104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올 2012년 12월까지 대주교직을 수행하고 사임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작년 초부터 이미 떠돌던 풍문이었다. 지난여름 회의차 영국에 방문했을 때, 그 사안을 잘 아는 지인도 확인해 주었는데, 그때 그의 말과도 일치하는 발표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성공회 성직자가 된 이후로 가장 흥분하며 그의 지명을 지켜봤고 환호했다. 뛰어난 교회사학자요, 영성신학 전문가요, 성공회 전통과 정교회 전통을 접목하여 성공회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전해준 전형적인 학자였다. 사임 후 다시 학교로 가서 가르치신다 하니, 지난 10년의 대주교직 활동을 생각할 때, 훨씬 나은 일이고, 성공회에도 훨씬 이바지할 일인 듯싶다.

지명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넘쳐, 당시 내가 관리하던(1997년 시작부터 2002년 말까지) 한국 성공회 웹페이지에 특집란을 만들고 여러 자료를 번역해서 올렸었다. 시간이 흘러 관리자가 바뀐 뒤 웹페이지 백업도 없었고, 나 자신도 그 자료를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본 archive.org 역시 대단하다. – 10년 전 한국 성공회 웹페이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때는 모두 텍스트 에디터로 html 문법 써가며 작업했는데, 감회가 새롭다.

우선 당시(2002년) 자료를 archive.org 백업 자료를 이용하여 연결한다(발뺌: 몇몇 이미지는 깨진다). 나중에 로완 대주교에 대한 사적인 ‘잡감’을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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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공장’의 정화 –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절 설교

Thursday, March 15th, 2012

세계 성공회의 맏 어른이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로마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전하신 설교를 번역하여 올린다. 로완 대주교께서는 베네딕트 전통의 갈마돌리 수도회 설립 1천 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받은 참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강론, 설교를 펼치셨다.

한편, 천주교의 한복판 로마에 성공회라니? 로마에는 성공회 두 개 교회와 교회 일치 대화 연구소인 성공회 로마 센터가 있다. 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유럽 교구 소속이고, 다른 한 교회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 유럽 교구 소속이다. 이 두 교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을 맞아 사순 3주일 미사를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미국 성공회 소속)에 모여 함께 드렸다.

대주교께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고금의 우상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개인의 안위와 위로를 위한 ‘종교 공장’이 되어버린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 풀어내셨다. 하느님과 인간이 아니라, 그 형색만 갖추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지니스로 전락한 종교의 행태, 특히 그 비지니스(business)에 바빠(busyness) 정작 헤아리고 살펴야 할 것은 돌아보지 못하고 대량 생산 공장이 되어가는 종교 비지니스에 대한 성서의 경고를 되새겨 주셨다. 원래 신앙이 가진 이 대안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이 여전히 절실하다. 그뜻을 널리 나누려고 동영상을 링크하고 설교 전문을 졸역하여 올린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설교

사순 3주일
로마,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 St. Paul’s ‘Within the Walls”
2012년 3월 11일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요한 2:13-2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시 한번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성공회의 형제자매들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도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전해주길 바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들의 연대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주교로 있던 남부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철강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큰 공장에 들어가면 귀를 먹게 하는 소음이 감쌌습니다. 실제로 공장 어느 부분에서는 꼭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써야 했습니다. 소음과 활력, 그것도 귀를 먹게 하는 강한 것들이죠.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랬다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철강 공장에 들어가는 것과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철강 공장에서 철을 만들 듯이, 성전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아주 강하고 바쁜 활동을 온종일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큰 명절이 되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희생제의에 바칠 동물들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적절하게 표현할 상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 세 본문의 주제는 실제로 우리가 종교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종교’와 참 하느님, 즉 참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시작부터 우리는 참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것도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하느님을 가장한 ‘우상’, 우리를 만족하게 할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기도를 채우곤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선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채웁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틈을 막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참 하느님께 깃든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 대신에,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천국의 화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지상에 끌어내려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공장’입니다.

똑같은 경고를 제2독서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과는 너무도 낯설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만족한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적을 찾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이 마술처럼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철학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참 하느님의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사랑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성서 독서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우상이냐, 진리냐? ‘종교 공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우리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여 늘 종교 공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은 아마도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느라 바쁘고, 좋으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가져온 그림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요,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을 치우라고 합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세계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들로도,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으로도 절망하게 하거나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을 묵묵히 보여 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느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사순절기 동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종교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도전에도, 그리스도인은 꽤나 잘 이 종교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십자가 자체는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삶의 쇄신에 대한 부르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종교인이 그저 장식처럼 걸고 다니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순절기는 어쩌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력의 성주간 동안 교회의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그 시기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년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치웠다가,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안녕에 대한 모든 것들을 뒤엎으십니다. 멋진 레저 활동이 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그리고는 종교 공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어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고, 누구도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신뢰가 우리를 움직여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전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교 공장을 나와 섬김으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섬김과 사랑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향한 활동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후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기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신을 우리 안에 짜맞추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살펴 봐야 합니다. 사순절기는 우상숭배를 넘어서 한 발짝 더 나가는 시간입니다. 우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죄수로 묶어놓고 옛 세상으로 끌어당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 공장에 연루된 이들을 내치시고, 당신의 벗들과 더불어 거대한 침묵과 거대한 공간에 우뚝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여길 곳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넉넉한 공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이곳이 모든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예배하러 모일 때, 성찬례라는 성사를 거행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그 거대한 공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쁘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과 성취해야 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서서, 가만히, 듣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밉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우리 생각대로 쥐어짜서 만들려는 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생명과 사랑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사 속에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리하셔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만드신 공간입니다. 크고도 경건한 철강 공장 같은 ‘성전 종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21세기 어느 곳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동안 ‘종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마음을 열어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봄날의 대청소를 시도해 봅시다. 조금이나마 정적과 열림을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때야 비로소 생명의 기적, 하느님의 생명이 그 열린 빈손에 다가올 것입니다. 신비와 경외,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