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조롱을 넘어서

Friday, September 12th, 2008

불가사의: 수구들의 부흥

한국 사회 현상 가운데 두 가지 불가사의를 든다면 – 적어도 내게 –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수구 반공 언론의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재 혹은 과시, 그리고 이른바 수구와 근본주의로 무장한 전투적인 기독교(대체로 개신교) 우파 세력의, 역시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재라 하겠다.

이 두 현상은 스스로를 비판적 지성인, 그리고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낭패감을 안겨 주고 있다. 최소한의 양심과 반성과 더불어, 최소한의 교양을 가진 사회에서는 이 두 현상은 스스로 설 수 없다는 낙관이 있었던 듯하다. 적어도 지난 몇 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뤄내고 있는 민주화와 우리 사회의 수준 – 지표상의 경제력, 학력 – 으로 볼 때, 이런 ‘비이성’과 ‘광신’은 곧 물러날 줄 알았다. 그러니 2MB의 대통령 당선을 전후로 승리를 구가하는 두 세력, 혹은 현상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테다.

사태는 당혹과 낭패의 심정을 뛰어 넘고 있다. 이 거침 없는 힘들은 이제 발가벗은 채로 반격을 일삼는다. ‘비판적’ 혹은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빨갱이’ 혹은 ‘철 모르는’, ‘극좌’, 그도 아니면 ‘한심한 불평분자’라는 딱지로 대체되어 되돌아 오는 형국이다. 이 반격은 가히 무차별과 무경계의 경지에 이르렀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려거나, 존중하려거나,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일이 희미해지고 있다.

‘조중동’은 그렇다 치고라도, 종교라는 탈을 쓰고 보여주는 이른바 수구 기독교인들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노라면 아연실색이다. 그런데 남에게 손가락질만하고 있을 한가로운 처지가 아니다.

우리 성공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성공회는 세간의 좌파 사관학교라는 오명을 벗으라’는 충고가 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신자들은 보수, 성직자들은 진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기 성직자에게 ‘빨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데도 혀만 끌끌 차고 만다고 한다 – 이게 그 말에 동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도통’한 태도를 취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분노 전략”

이러한 비이성과 광신의 건재, 그리고 이것들의 터무니 없는 윽박지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 대선이 아닌 남의 나라 대선,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한 시선과 분석과 마음에 와 닿는다. 최근에 읽은 뉴욕타임즈 칼럼리스트 폴 크루그먼의 “분노 전략”이라는 글이다. 짧고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현재 공화당 맥케인-페일린 대선팀의 전략은 ‘분노한 우파’를 이용하는 거다. 미국 사회에서 이 우파들의 분노는 더욱 크고 강력해지고 있다. 이 분노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통해서 힘을 얻기도 하지만, 더 큰 요인은 어떤 근거도 없는 감정적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곧 ‘민주당놈들은 보통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한다’는 감정이다.

공화당 정치가들은 근거도 없이,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언동을 일삼는다. 이것이 노회한 거대 정당의 ‘분노 정치의 진수’이다. ‘당신보다 잘난 엘리트가 아니라, 공화당 후보를 찍으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닉슨(Nixon)의 수법이다. 닉슨은 대학때부터 자기보다 잘 나가는 후보를 잘난 체 하는 인간으로 몰아부쳐 결국 이기는 전략을 취했다. 부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인기는 이른바 ‘반지성주의’에 기반한다. 평가 절하된 평균 C 학점짜리 학생들은 다른 우등생들보다 똑똑하다는 게 판명되었다는 식이다.

여전히 이번 대선에서 맥케인-페일린은 이 노회한 전략을 이용하고 있으며 성공하고 있다.

이를 빌려서 우리 사회의 불가사의들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왜 그동안 한국의 수구파들은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것일까? 개혁하려고 하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들이 이 수구 세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머리 삼고, 적절한 분노를 행동으로 삼아 왔다면, 수구 세력이 이들에게 갖는 분노는 어떤 것일까? 크루그먼이 이를 닉슨의 열등 의식과 이를 이용한 분노 전략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 안에서 이 수구들, 혹은 이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열등 의식과 분노가 있는가?

아마도 ‘조중동’의 분노는, 크루그먼의 지적과는 달리, 열등 의식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 같다. 그 우월은 자신들이 가진 것들, 즉 권력, 부, 지위, 명예, 신념의 ‘많음’에 기반한다(물론 비판적인 교양과 지성은 빼고). 이를 지켜줄 기존 질서가 도전받는 것에 분노한다.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잃는 것이 두려워서, 이를 지키려고 분노하는 듯하다. 사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잃을 것도 없다.

한국의 수구 개신교(천주교나, 우리 성공회도 포함시켜야 할 때가 왔다!)에서는 이 우월감과 열등감이 반복 교차한다. 그간에 누려웠던 온갖 권력과 명성이 도전받고 있다. 이른바 ‘근대화’ – 도대체 어떤 ‘근대화’인가? – 기여에 대한 자부심, 지칠 줄 모르는 성장과 그 힘, 성공 논리의 확대 등과 더불어, 온갖 비(非)자를 붙여야 편할 그네들의 신학, 신앙, 성찰, 교양, 지성이 그렇다. 성장과 성공이라는 결과로 이 열등감들을 치장으로 덮으려 하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털난 발과 아직 깎고 다듬지 못한 손톱과 이빨이 드러난다. 이른바 ‘안티-기독교 운동’은 자초한 일인데도, 수구 개신교인들은 이를 기회 삼아 자못 새로운 분노의 힘을 충전하고 있다. 수구들은 이 참에 대단한 분노의 통일 전선을 마련하고 있으며, 이는 “더욱 커지고, 더욱 힘이 세지고, 더욱 분노로 똘똘 뭉친다.”

비판이 조롱으로 느껴질 때

그러나 이들의 분노를 탓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다. 분석까지도 좋다. 그런데 지금은 비판의 방법과 전략들을 되돌아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 자신을 돌아보고 묻는 일이어서, 수준과 범주가 다른 여러 지점에 생각이 미친다.

학계 혹은 교수들을 보자(신학계로 제한할까?). 비판적이라는 수사를 짐짓 권위있게 독점해 오다시피 한 이른바 ‘학계’의 담론과 전략은 적절한가? ‘상아탑’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내내 스스로를 상품화하려고 적절한 ‘비판’이라는 수사학으로 보통 사람들을 따돌리지는 않았는가? (지나친 일반화이니 억울해 할 분도 많겠으나, 억울해서 죽을 만큼은 아니니 눈 좀 감아주면 좋겠다. 하긴 그런 분들이 이 하찮은 블로그를 둘러다 볼 리 없다).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혹은 기본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대화하기 보다는, 생소한 최신 이론과 개념으로 기죽이는 일이 많지는 않은가?

이 참에 한국의 ‘인터넷 문화’도 돌아볼 여지가 있겠다. 인터넷이 우리의 민주화를 이끌었는가? 몇가지 사례들에만 집중해서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인터넷 댓글 문화는 이미 여러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는데, 그 행태들은 이른바 ‘수구파나, 자유파나, 진보파나’ 엇비슷한 것은 아닐까? 인터넷 안에서 서로를 향한 분노가 과장되고 왜곡된 채로, 스스로 돌아볼 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을 마주하고서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이 넘친다. 절제되지 않는 말들은 비판이 되지 못하고, 대체로 가시로만 남아 분노를 일으킨다.

여러 텔레비전 토론회들을 통해서 스타들이 출몰하곤 한다. 그 ‘스타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혹시 나를 대신해서 상대를 신나게 조롱해 주는 사람이 그 토론회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조롱하는 스타를 통해서 대리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그 통쾌함을 선사하는 정도가 ‘스타성’을 등급 매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조롱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얼마나 알고 접근하고 있는가?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심정은? 하기야 그걸 생각하면 싸움이 되지 않고 이길 수 없다. 또 모든 사안에 적용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토론은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기 위한, 서로 풍요로워지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이런 조롱 끝에 우리는 몇몇 조롱당하는 이들을 반(反) 지성인, 혹은 비(非) 교양인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도도한 체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라면 좋은 일지만, 그래도 반성하고 돌아 볼 일이다. 그게 지성과 교양의 덕목이 아닌가.

우리 사회(혹은 교계에, 혹은 우리 교단에)에 편만한 반지성과 반교양, 무식에 눈감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에 대한 진단이라면, 이를 넘어서려는 실천의 전략은 좀더 세련되고 친절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친절의 바탕은 여러 성찰들에 대한 열림이요, 그 형태는 경청하고 대화는 나눔일 것이다. 끈기 있게 이 일을 해나가야 분노가 아닌 새로운 공감이 생겨나리라 본다. 그렇지 않으면 편만한 무식과 반지성이라는 현실에 압도되어, 결국에 여기에 사뿐히 몸을 던지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

덧붙임: 용두사미가 되었다. 며칠두고 봤는데 생각이 무르익지 않는다. 내 사적인 반성문의 한 형식이지만, 그냥 날 것대로 생각을 이어나갔으면 해서 올리기로 한다. 민노씨가 잠 못이루는 한 밤 중에 블로그 절필 중인 “아거“를 궁금해 하며, “그의 빈자리가 깊고, 넓다”고 쓴 게 남는다. 사실 아거가 있었더라면 이런 어설프고 설익은 글도 필요하지 않았으리 생각하는 탓이다. 이 혼란한 통에 한 수 배울 자리를 탐하면서, 나도 아거의 글들이 그립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1

Monday, August 25th, 2008

이래저래 바쁜 여름을 보냈다. 몸이 파김치가 되었으나, 참 좋은 경험이었다. 아래에도 적었지만, 한국 방문 기간에 환대해 준 분들의 마음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이어 곧바로 람베스 회의로 영국에 가는 바람에 몸의 집도 비우고, 이곳 블로그 집도 한동안 비웠다. 대신 새로운 임시 천막인 [람베스 통신]을 치고, 거기서 다시 몇몇 분들을 조우했으니 그것으로 족하게 기쁜 일이다.

몸의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길었는데, 블로그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더 멀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연결 문제로 연발과 연착이 거듭되었 듯이, 블로그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의 길에 연착륙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은, 돌아와서 미처 영국에서 끝내지 못한 [람베스 통신]의 몇몇 글들을 정리해서 올려야 한 탓에 제 집을 소홀히 했고, 다른 이유로는 영국에 머물러 [람베스 통신]을 적는 동안, 거기다 적은 글들로 심기가 불편한 분들이 뒷담화하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통에 마음이 산란했다. 이런 일로 마음에 파장이 이는 건 분명 내 그릇이 작은 탓이요, 마음이 깊지 않은 탓이겠다.

수련과 내공이 깊지 못해서 얻은 상처라 해도, 우선 싸매고 치료하고 봐야 한다. 자칫 만신창이가 되면 남겨둔 수련의 일정을 소화할 틈도 없이 불구가 되어 하산해야 한다. 예전엔, 죽도록 싸워봐야 하리, 했는데, 돌아보니 객기였을 성 싶다. 우선 싸매고 보살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움츠리는 건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다.

사실 이런 일에 익숙할 만도 하다. 연전에도 관구 게시판에서 더 험한 인신공격도 겪어 봤으니, 이 정도 가지고야, 할 만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문 상처의 자리는 더 약하다. 그 상처를 보호하고자 짐짓 단호한 어조로 “당부의 말씀”을 드리기도 했으나, 그걸로 잦아든 건 아니어서 다시 이런 공격이 머리를 든다. 게다가 알만한 사람이 뒷담화를 하거나, 인터넷에 주소를 입력하거나 링크를 타고 오면 언제든지 읽을 수도 있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그런 뒷담화를 퍼뜨리는데 가담하는 일은 비겁하다 못해 가여운 일이다. 하릴없이 그 “당부의 말씀”을 다시 들려 줄 수 밖에 없다.

제 생각을 나누기 전에 여기서 잠깐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지 않으시고, 그저 몇가지 주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덧칠하려는 분이 있다면, 아래 내용을 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당사자 개인에게도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말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영을 추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민스러운 내용과 글을 어렵게 나누고자 하는 처지에서 나온 글에 대한 이런 비방들이 그 주장을 정당하게 하기 보다는 교회 전반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교회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서로 바쁜 처지에 어떤 정신적 노동과 수고를 강제할 생각도 없습니다.

익명성으로 가려진 공간에서는 신앙인이라면 스스로를 더욱더 삼가는 일이 덕이겠습니다. 솔직히 저만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을 받으면서 무대 밖의 어둠으로부터 화살을 맞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처지라면 오히려 실명을 밝히시고, 교회에서의 위치를 밝히면서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 자신의 영을 건강하게 붙잡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은 논쟁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한 명의 사목자로서 몇몇 신앙인에게 드리는 권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신자들이나 동료 성직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 남을 윽박지르는 일을 삼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이 글을 쓰면서 매우 엄격한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요, 둘째로 제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세째로 신학 공부와 사목적인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누려는 하나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교회에 대한 책임있는 자로서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물론 성직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제게 부여한 책임이고, 또 검증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면 그에 상응한 절차로 제게 책임을 물으시면 됩니다. 그에 따라 저도 제 말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외부의 “윽박지름”이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분들 (신자, 성직자, 수도자 모두)에게 지나친 자기 검열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위험이자 손실입니다. 외부에서 강제된 이러한 검열은 결국 교회의 숨통을 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자기 듣기 좋은 말만 듣거나, 혹은 남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친목 단체로 전락할 것입니다. 교회의 사제직과 예언자직의 균형을 위해서 신자들이 먼저 성직자들을 응원해 주십시오. 저는 최소한 이것이 다른 교회와는 달리 성공회가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있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떠나실 분들은 제발 떠나시고, 나머지 역시 읽지 마시고, 여러분의 영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아래의 이야기들이 그런 분들의 생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돌이켜 살피거니와, 화살을 맞는 장면을 지켜보는 보는 입장에서 느끼는 짠한 마음과 실제로 그것을 맞는 처지의 느낌은 다르다. 게다가 다른 각도에서 보면서 가려진 면들 때문에 저 친구가 진짜 화살을 맞았는지 아닌지 의심하는 부류도 있을 뿐더러, 비명을 엄살이라고 우기는 분들도 종종 나타난다. 그동안에 화살은 살을 꿰뚫고 피를 내고 몸에 독을 퍼뜨린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돌아오고 있다. 사실 마음을 같이하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 훨씬 많이 있다는 걸 안다. 게시판에서 그야말로 장난질하는 사람이나 뒷담화하는 분들은 극히 적은 한 두 사람에 불과하고, 사실 또다른 배려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화살에 맞는 사람은 그 충격을 감당하고 그 상처를 싸매느라, 혹은 그것이 나중에 덧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 참에, 사서 고생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까?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곳은 내 돌아갈 작은 거처로 삼은 곳이요, 무엇보다도 선한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고 삶을 나누는 통로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으나마 이 공간에서 생명의 둥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다물고 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참이다.

여기는 캔터베리…

Wednesday, July 16th, 2008

한국에서 돌아와서 며칠 쉬고는 – 실제로는 앓고는 – 다시 영국 캔터베리에 왔습니다. 그 탓에 지난 번 한국 방문에서 만난 여러 신부님들과 교우들,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도 다시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적어왔던 소소한 생각도 정리해서 올려야 하는데 잔뜩 미뤄놓은 채로 캔터베리에 와 있습니다. 예, 람베스 회의가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세계 성공회 사무소 커뮤니케이션 팀의 일원으로 들어와서 회의 기간 동안 일하게 됐습니다. 복잡한 내막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요.

우선 람베스 회의에 대한 소식과 생각들을 되는 대로 올리는 블로그를 마련했습니다. 이곳 일정과 일이 있으니 얼마나 블로깅에 충실할 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좀더 정리되거나 발전된 생각들은 이곳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이 블로그와 더불어, 새로운 – 한시적인 – [람베스 통신]도 자주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곧 다시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