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눈물과 피 –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축일

Wednesday, April 29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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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12:24~13:5 / 시편 67 / 요한 12:44~50
2015년 4월 29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승의 죽음 이후에 저승에 이어지리라 기대하는 영원한 생명은 성서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땅을 넘어서 미지의 물리적 우주 공간이나 소위 ‘영적인 세계’에 있으리라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은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실과 정보를 성서에서 발견하셨다면 제게 속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어떤 분들에게는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소식일는지 모릅니다. 특히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이런 말은 몹시 서운하고 희망을 빼앗아가는 냉혹한 선언일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신앙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매우 위험한 발언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지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럽고 안전한 말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한 번뿐인 인생이니 사는 동안 온갖 것을 먹고 즐기며 살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이승에서 재산을 불리고, 건강을 위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말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보장해 주는 일이고, 종교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저승에 관한 보험 정도로 들어둘 만한 것이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서, 특히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은 내세를 약속하는 여느 종교나, 이승의 축복만을 기대하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 점을 강조하시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읽으니 어떤 오해도 하지 말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간단하고 명백하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을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결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은 사람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끌어내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을 새롭게 해석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믿음을 ‘의심 없이 덮어 놓고 믿는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면,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여, 예수님께서 걸으신 빛의 길을 그대로 걷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예수님의 친구와 동료가 되어 참여하여 함께 걷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함께 걷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약속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어쩌면 그 심정은 이해할 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아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만방의 온 백성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단죄는 스스로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닌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서의 전반부 결말이 이 질문을 던진다면, 복음서의 후반부인 14장부터는 예수님의 길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점차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외로워지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수난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와 절망과 죽음이었습니다. 육체의 아픔에서 나오는 눈물과, 찢긴 몸에서 흘린 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실패와 절망,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명령, 아픔의 눈물과 고통의 피를 흘리는 일이 영원한 생명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도 이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인 예수님은 세상을 덮은 어둠의 질서와 어둠의 권력에 저항하는 예언자였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 가르치는 신앙의 교사였습니다. 길을 걸으며 만난 배고픈 사람, 상처 입고 아픈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선교사였습니다.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의 임무로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과 교회의 사명이 뚜렷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속에서 예언자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대신 외칩니다. 교회의 사명은 온갖 신앙을 빙자하여 거짓 가르침으로 유혹하는 이들과 대결하고 논파하고 복음의 참뜻을 가르치는 신앙의 교사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종교인이 빠지기 쉬운 교만과 태만과 기만을 냉철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길에서 만난 사람을 보살피고 고쳐주며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집과 자기 가족과 자신의 사교 클럽을 벗어나서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복음을 나누며 환대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서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로서 그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성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이어받아 교회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인도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지금부터 700년 전인 14세기 이탈먹리아 북서부 시에나에 살았습니다. 성인은 결혼을 강권하는 어머니의 고집과 학대를 무릅쓰고, 혼자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평생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가족을 넘어서서 남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친구들 제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새로운 신앙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수도자의 특권도 포기하고, 도미니크회 재속회 일원이 되어 평신도로 살았습니다.

성인은 신앙의 성장은 겸손과 인내를 바탕으로 하여 사랑과 자선의 행동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새로운 명령에 충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몸소 행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 가족과 함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겸손하고 끈기 있게 섬기며 돌보는 사목자요, 선교사였습니다.

성인은 이러한 신앙의 행동을 깊이 되새기고 성찰하고 연구하는 신앙의 교사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자기를 깊이 아는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기도와 연구를 통한 그의 지식은 세상의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내면으로 치닫고 반-교회적 태도로 치닫던 당시의 신비주의 신학과는 달리 창조 세계의 사물들과 사람들이 일상에서 몸소 겪는 생활의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펼치며, 교회의 전통 안에서 사람들과 쉼 없이 대화하고 편지하며 자신의 신학을 연마했습니다.

성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bridge)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다리 위를 걷는 여정으로 우리의 신앙과 구원을 설명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발부터 시작하여, 그분의 찔린 옆구리를 거쳐, 마침내 그분의 입술에 다다릅니다.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와 삶에서 얻은 고통 눈물로 그분의 발 앞에 서서 겸손하게 입을 맞춥니다. 그런 뒤에 우리는 찔려서 열리고 상처 입은 그의 옆구리를 바라봅니다.

둘째 단계에서 우리는 상처로 열린 옆구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세상의 아픔을 봅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가 교회에 흐르고, 교회는 그 피로 세상의 상처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성인은 그 상처와 피를 깊이 응시합니다. 그 응시하는 우리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주님의 피와 우리의 눈물을 섞어 마시는 일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다짐과 출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입술에 이르러 그분께 입 맞춥니다. 그 입 맞추는 사랑으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이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몸소 보이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인에게서 기도와 관상의 신비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때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의 땀과 눈물은 주님의 피”와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처형당하신 십자가를 기억하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그대 자신을 바쳐야 하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상처 안에 그대 자신을 숨겨야 하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피 속에서 그대 자신이 빠져 죽어야 하리.”

행동하는 신앙인이요 신학자였던 성인은 교회 개혁을 향한 예언자였습니다. 권력 싸움으로 부패하고 분열하던 교회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신자와 성직자의 일치만이 교회를 흔들리지 않도록 우뚝 세워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신앙의 낯선 나그네와 순례자를 환대하는 쉼터입니다. 성찬례는 이 신앙의 순례자들과 더불어 “땀과 눈물과 피” 함께 섞여 나누는 식탁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은 자신이 재속회원으로 속했던 도미니크 수도회가 돈과 권력에 맛을 들여 청빈과 설교 수도회로서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여성인 성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성 수도자들을 비판하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편지에서 성인은 자신의 지도 수사 신부님께 적어 보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남자다워지십시오.” 이 말 속에서 성인은 아마도 “성령의 힘을 받아, 두려움 없는 나 같은 여성이 되십시오”하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이처럼 신앙의 친구, 동료와 더불어 서로 사귀고 격려하며, 하느님께서 명령하셨던 길,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이어서 걸어가야 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입니다.

수많은 시를 남겼던 카타리나 성인은 인간의 본질을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부활밤에 타올라 아직도 비추며 영원한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새 불을 되새기게 합니다.

내 안에 영원하신 하느님이 계시니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겠네.
그것은 한없는 사랑, 그것은 불꽃이라네
사랑의 불꽃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리
주님께서 사랑의 불꽃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나니
그대들은 모두 사랑에서 나왔나니
은혜를 모른 사람들아,
하느님께서 그대들에게 심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 당신의 불꽃이 아닌가?
그 고귀한 것에서 멀어지는 죄는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랴.
영원하신 삼위일체, 빛이요 지혜요 힘이신 분,
우리에게 빛을 주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오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어둠의 구름을 거두시고
주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게 하시니
이제 소박하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진리를 걷네.
주여, 우리를 빨리 도와주소서.
아멘.1

  1. 이 시는 영어 번역에서 우리말로 중역한 것으로 강론의 맥락에 쓰도록 요약했다. []

이 잔을 마시겠느냐? – 신앙과 권력관계

Wednesday, March 4th, 2015

예레 18:18~20 / 시편 31:4~5, 14~18 / 마태 20:17~28

2015년 3월 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구원, 나의 바위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치맛바람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가족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오늘 복음 본문에는 제자 곁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간청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가족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가한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걱정돼서 아예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받으실 수난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열 두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비장미를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째 예고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장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께 뭔가를 청합니다. 그 어머니는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음은 알겠는데, 예수님으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죽게 되리라고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자, 이를 뜯어말리며 예수은님을 비난한 베드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큰 노여움이었습니다. 당신의 수제자를 두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장면이 사뭇 다릅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심정이 다 그러하리라고 이해하신 탓일까요? 어머니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 제자 형제를 어머니 앞에서 혼내지도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새롭습니다. 그 어머니가 무안해 할까 염려하셨는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나지막이 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 제자 형제들은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예, 마실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듣는 여러분이 다 당황스럽죠? 답답해서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시지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이해하시려는 듯이 여전히 나지막하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혼내셨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그래,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철없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은 자신을 빼놓고 다른 제자가 무슨 자리를 청탁하고, 예수님이 그 청을 들어주신다고 오해했는지, 그 제자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고뇌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자단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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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권과 자리에 관한 욕심과 오해가 맞물리자,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 내용과 뜻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관심과 생각과 기대에 골몰하면, 자기 눈과 귀가 금세 닫혀 버립니다. 제 눈과 귀가 닫힌 것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생각만 주장하곤 합니다. 신앙이든 주장이든, 자신의 경험과 고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옆에서 고쳐주며 도와주려고 해도 자기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는 누구보다도 잘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이니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깊어지고 시기와 질투만 커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의 수가 인구 사 분의 일이 되는 나라입니다. 사회든 조직이든 제대로 된 20%가 남은 80%를 이끌어간다는 어느 법칙을 생각하면, 한국 사회는 이미 25%가 넘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지닌 변화의 힘을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바른 목표를 이뤄나가는 ‘공동선’의 감각, ‘공공성’의 지표는 다른 여느 나라에 비해 매우 낮기만 합니다.

정치인이나 다른 종교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아들에게 한자리 주십사 하고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던 제자들 어머니의 마음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보노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이해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받은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여전히 철없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요, 마실 수 있고 말고요. 그 높은 자리 하나 얻는데, 쇳물이라도 못 마시겠어요?” 이런 태도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생각하여 열심을 내는 확신을 신앙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세상 여느 사람의 개인적인 소망과 성취 욕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복 받으리라 믿거나’ ‘축복의 약속을 믿거나’ ‘어떤 교리를 믿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약속을 믿고 ‘몸을 던져서 걷고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어떤 종교든 사이비가 됩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신앙은 미신이 됩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믿음과 따름이 분리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리와 안위에만 관심을 두는 한, 이런 종교생활은 사이비이고 미신입니다. 귀 막고 눈 가리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잔을 마시며 따르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눠 마시기를 원하는 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잔은 권력(power)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과 실천의 잔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권력과 힘을 가져다주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권력은 세상에서 경험한 권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권력, 남을 부리는 권력입니다.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군림하고,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 권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거저 받은 상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공로로, 자신의 덕행으로 스스로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그 힘과 자리의 행태를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자들처럼 자기는 누리고 다른 이들은 누르고, 자신은 꼼수를 쓰고 남에게는 고약한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진정한 힘(power)은 ‘나’의 부족함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하느님의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주신 힘과 자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힘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려고, 잔을 들어 다른 이들의 목을 축여주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힘, 하느님께서 새롭게 여시는 권력관계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우리와 나눠 마시려는 잔의 실체는 우리 자신의 아픔과 세상의 어둠입니다. 그것은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입니다. 어떤 종교적 깊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일상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그 아픔을 너무 쉽게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너무 쉽게 잊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그것들을 느끼는 통로로 삼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우리가 제출한 취업 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거절당하곤 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바라고 그것을 축하할 때, 우리 가운데는 실패하고 숨죽이며 눈물을 삼키는 가족, 친구, 이웃들이 많습니다. 멋진 세상을 즐기자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퉁이만 돌아도 온갖 정신적인 낙담과 경제적인 절망, 온갖 사회적 정치적 절망감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마실 잔은 바로 이들의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왜 우리가 굳이 그런 잔을 마셔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며 따르는 목적은 우리 삶 전체가 어쩌면 거절과 실패와 절망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의 공통점인 죽음과 소멸을 다시 발견하고, 그 운명의 슬픔을 나누고 있는 옆 사람과 이웃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 학자인 월터 브루그먼이 자신의 시 “재를 바르며”에서 읊었던 우리 운명에 새겨진 ‘재의 수요일’의 뜻이 새롭습니다.

“…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

이 운명을 깊이 되새기면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께서 마셨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잔을 나누어 마셔야 합니다.

이 성찬례의 자리에 초대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이 잔을 마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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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Nolde, Last Supper, 1909)

부활을 향한 십자가와 변모

Sunday, March 1st, 2015

부활을 향한 십자가와 변모 (마르 8:31~38, 9:2~9)1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어둠, 세상의 어둠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의 빛과 생명을 향해서 걷는 삶’입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광야에 나아가 우리의 슬픈 어둠과 세상의 아픈 어둠을 제대로 경험하고 깨닫는 사순절 신앙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신앙 여정의 조건과 목적지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고통과 세상의 아픔을 연결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새로운 생명의 계획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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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활의 삶을 기대하지 못하고 ‘십자가’가 드러내는 어둠과 고통에 사로잡힌 신앙이 눈에 자주 띕니다.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는 인간이 지닌 어둠과 잘못에만 집착하여 자기 삶에 벌이 뒤따를까 두려워하는 종교심이 즐비했습니다. 이 벌을 없애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다는 교리가 자라났습니다. 이런 생각에 머무는 태도는 신의 진노를 피하려고 종교를 찾는 여느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 속 좁게 이런 위협으로 우리 신앙을 이끌어내시려는 분일까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소재 정도로 이해하면 부활에 관한 이해도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인간의 고통과 이웃의 고난을 잊고서 ‘부활의 축복’을 구하는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십자가에 새겨진 인간 예수님의 고통이 세상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보는 창(窓)이 되지 않으면, 부활은 여느 기복 종교가 던져주는 개인의 ‘값싼 은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온세상에 두루 미치도록 풍성한 하느님의 은총을 사적인 이익과 복에 제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한 장면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벌이는 한판 논쟁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서야 넓고 깊은 생명이 드러날 테니 그 수난의 길을 걷겠다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려다가 ‘꾸짖습니다’(성서 원어: epitimao). 예수님도 질세라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꾸짖습니다’(epitimao). 자신의 고통을 피하거나 세상의 어둠에 눈감지 말고, 오히려 대면하여 ‘짊어지고’ 가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신앙이라고 일갈하십니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는 지우개로 신을 기대하거나, 벌을 피하는 수단이나 제 이익에 따라 신을 이해하려는 종교 행태를 향해 던지는 도전이자 대결입니다.

오늘 복음의 또 다른 장면인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부활을 예견합니다. 그 부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 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이집트 노예 탈출을 이끌었던 해방의 지도자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악행을 저지르는 권력에 맞서 싸우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예언자가 아닙니까? 이들과 함께 등장하신 예수님은 성서에 면면히 흐르는 인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전통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종교적 두려움으로 대하고, 종교의 ‘초막’에 안주하려는 제자들에게 하늘에서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의 고난을 보고,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귀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두려움을 이기고 세상이 겪는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의 희망과 생명을 향해 걷는 순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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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1일치 –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