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걷는 일

Sunday, August 10th, 2014

2014년 8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및 오후 6시 성찬례
열왕상 19:9~18 / 시편 85:8~13 / 로마 10:5~15 / 마태 14:22~33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어리둥절한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적응하려면 밖에서 살아온 만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다른 어떤 분은 너무 잘 적응하려 하지 말고, 그 부적응을 잘 살펴보면 좋겠다고도 조언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좌충우돌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저 자신과 교회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자유롭게 동료와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성주간에 있었던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세월호의 참극입니다. 벌써 넉 달 가까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그 충격과 슬픔, 안타까움과 분노가 제 마음과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라면 제가 적응할 일이 없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계속 이 사회에 부적응하며 사는 것이 더 양심적인 일이고, 이런 참혹한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 일상생활을 늘 참견했습니다. 기도 생활이든, 책을 읽는 시간이든, 대화하는 시간이든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든 늘 제 머릿속에 들어와 저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세월이 가면 세월호는 잊혀집니다. 특별히 그것이 내 피붙이 일이 아닌 한, 그것은 금세 잊혀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월이라는 망각에 힘입어 그 슬픔과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만하라’고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분위기상, 그 말을 내뱉지는 못하더라도, ‘에잇, 이제 좀 그만하지’하는 말이 입안에서 맴돕니다.

그러나 정작 지옥 같은 이 일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입니다. 정말로 슬픔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들은 그 상실과 절망 속에 사는 분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잊고 덮고 웃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웃지 않는 한, 그들이 잊지 않는 한, 우리가 너무 쉽게 조언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도리이며 예의입니다. 하물며 기억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 잊고 묻어가자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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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동안 세월호 참극이 제 마음을 흔들었다면, 지난 몇 주 동안은 복음서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참담하게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참담하게 흔드는 사건을 목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었기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슬퍼하는 이들과는 슬퍼하고, 자신의 상실감을 눈물로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또렷하게 예수님의 마음에 큰 상처와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예수님께서 겪으신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니 지난주에 전한 이야기의 한 대목을 오늘도 되뇌려 합니다.

지난주에 전한 바와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와 오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참담한 죽음을 복음서는 매우 냉정한 어투로 전합니다.

“[헤로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침묵)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았던 사이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갇히자, 곧바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으로 칭송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처절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을 되새기고, 세례자 요한을 충분히 기억하려고,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려고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요한의 삶을 되새기고, 당신 자신의 슬픔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고, 병자들을 데려오고 배고픈 배를 움켜쥐며 주님을 따라나섰을 때, 주님은 그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을 안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통해서 나온 측은지심의 성찬례였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마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은 다시 홀로 있는 시간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서 예수님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더욱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을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은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엘리야 이야기와도 겹칩니다. 엘리야는 독재자 아합 왕과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면서 미음을 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합 왕에게 잡히기만 하면 죽겠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호렙산에 홀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제 저만 남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저마저 죽이려 합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위한 일이 이런 고생길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이 안녕과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라, 온갖 상실과 절망과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엄청난 위력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싹 쓸어버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폭풍 속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산을 삼킬 듯한 지진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불 속에도 하느님은 부재는 뚜렷했습니다.다만, 작고 가녀린 바람 속에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작고 가녀린, 흐느끼는 듯한 바람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속에서 이 현실을 다시금 생각하셨습니다. 산에 홀로 올라서 외로웠던 엘리야를 생각하고, 외롭게 끌려 나와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 노리갯감이 되어 처형당했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닥칠 당신의 운명을 겹쳐서 생각하셨습니다. 인생의 온갖 상실과 절망, 슬픔을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그 뒤에라야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셔서, 풍랑에 휩싸여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넘실거리는 파도는 우리가 겪는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믿음은 이 사회의 여러 눈물들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 눈물들 사이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은 바위를 조각내는 거친 바람에서도, 산을 삼키는 지진에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불길에서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여린 바람”으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 조용하고 여린 소리에 귀 기울여서, 세상의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바다에 한 발짝 내디딜 때야 비로소 우리는 삼킬 듯한 풍랑을 잠잠케 하고, 빠져 죽을 것만 같은 슬픔과 절망의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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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모든 인간 생명과 삶이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모든 인간의 행복과 비극도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 품 안에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참 하느님이셨지만, 참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복과 비극 전체를 통해서 강해지셨습니다. 그 모든 상실과 고통과 순종을 통해서 더욱 강해지셨습니다.

상실이 있는 만큼 신뢰와 신앙은 더욱 커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상처를 통해서 더욱 채워진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움에 도망치며 온갖 고생을 하며, 홀로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속에서, 그 슬픔을 깊이 바라보았을 때, 그 눈물의 깊이를 헤아렸을 때,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지만, 그 슬픔과 상실을 이제 잊어버리자고 할 때, 그것이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모든 인생이 파도가 되어 그를 위협하고 두렵게 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함께 걸으시렵니까?

아멘.

교회의 반석 – 순교와 증언의 주교직

Thursday, August 7th, 2014

2014년 8월 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예레 31:31~34 / 시편 51:10~16 / 마태 16:13~23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생각과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일주일 후면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나라에 방문합니다. 우리 성공회도 교황 방한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현수막을 제작하여 내걸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뿐만 아니라, 교구 여러 교회에도 현수막 설치를 격려한다고 합니다. 그 현수막에 있는 문구는 이렇습니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환영합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황의 방문을 기대합니다. 지난 1년 반 전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에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스스로 낮은 사람이라 칭하고,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향한 그의 시선과 행보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싫어했던 이들마저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활동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지난 여름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젊은 사람들 여럿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이 묻더군요. 현 교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외면받는 종교와 교회에 구세주 같은 분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적어도, 천주교를 살리려고 하느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황은 공식 명칭이 아닙니다. 교황이라는 표현은 과장하여 번역된 말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교황을 일컫는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그저 ‘신부’라는 뜻입니다. 교황이라는 말은 종교의 왕, 황제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도 교회의 ‘맏 어른’이라는 뜻에서 ‘교종’(敎宗)이라 불러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의 공식 명칭은 ‘로마의 주교’입니다. 그는 일개 로마 교구의 주교입니다. 그런데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의 위치가 남다릅니다. 두 가지 전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오늘 읽은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 바르요나를 반석(베드로)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채 순교했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섰습니다.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은 그 첫 성당 자리에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건축된 것입니다.

둘째, 로마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행정 체제를 본받아서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로마 역시 서방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는 세계 그리스도교의 맏형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지만, 이런 전통에 따라서, 로마의 주교는 전 세계 교회, 특히 서방 교회의 맏 어른이라고 통합니다. 이는 모든 서방 교회 전통 안에 있는 교회가 인정하는 역사적 신학적 내용입니다. 그러나 맏 어른이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세계 교회를 치리하거나 다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가운데 으뜸’(primus inter pares)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오래된 교회 전통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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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

성공회는 이 전통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우리 성공회의 맏 어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계 성공회의 다른 어떤 교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실 로마의 주교도 그리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오랜 교회 전통을 우리 성공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의 최고 어른이자, 로마의 ‘주교’인 그를 보면서, 우리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되돌아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 예수님의 제자 시몬의 고백을 칭찬하시며,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런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이 선연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 뜻이 너무 깊어서 오늘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본문의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두 가지는 꼭 살펴야 합니다.

첫째, 자신의 경험, 자신의 기도와 통찰, 자신의 언어,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이야기, 풍문, 주입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넘쳐나는 교회 장사꾼의 이야기를 듣지 마세요. 넘쳐나는 기독교 케이블 티비, 설교 방송 등을 듣지 마세요. 대신에, 여러분과 함께하는 신부님들과 더불어 복음을 읽으시고 대화하며 나누세요. 그들이 여러분의 고민과 아픔, 슬픔과 기쁨을 압니다. 그들에게 귀 기울이면서 여러분의 입으로, 여러분의 언어로 고백하세요.

둘째,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축복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직전에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공통된 내용입니다. 오늘 교회에 적용하여 푼다면, 성직, 특히 주교직은 주님의 수난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주교 대부분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순교(martyria)라는 말의 원래 뜻은 ‘증언’입니다. 말과 몸으로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 순교와 선교입니다. 그 순교의 터 위에 교회가 섰습니다. 그러니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세상의 높은 지위가 아니라, 순교할 곳, 묻힐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순교 위에 교회가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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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순교하는 베드로)

오늘 순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뜻을 되새기고 나서야 우리는 주교직과 사제직과 부제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교직에 관해 성공회 요한 수도회(SSJE) 출신의 마틴 스미스 신부님이 쓰신 글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주교직의 핵심 상징 중 하나는 의자이다. 감독한다는 말, ‘캐시드라’, 즉 주교좌에 앉는다는 말은 앉아서 가르치는 행동에서 유래했다. 선생은 우리가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다. 복음에 빛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라면 주교가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주교가 일에 휩싸인 관리자가 되어 그 사목에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구할 일이다…

주교좌는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목적 요구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근간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현대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앉아 중심을 잡고서 사태를 안정시키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초점을 견지하도록 돕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내게 큰 감화를 주었던 주교들은 모두 아주 잘 앉아 있는 이들이었다. 재빨리 뿌리를 내릴 줄 아는 분들이었다. 특히 팔을 걷어붙이고 탁자에 함께 둘러앉는 분들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태를 구별하여 파악하고 초점을 잡는 분들이었다. 사목자로서 그분들은 사람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간명하게 사목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이 주교직을 보완하는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이다. ‘에피스코포스’는 감독자라는 뜻이다. 조망이 유리한 위치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큰 맥락을 살피고 특수한 처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사회와 조직의 흐름이라는 좀 더 큰 상황에 연결한다는 말이다. 좀 더 넓은 안목을 갖는 것이 주교직에는 본질적이다. 그리하여 곤란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큰 그림과 명령,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위해 기꺼이 우뚝 서야 하는 직분이다. 지엽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주교가 되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앞을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좀 더 멀리 보는 이를 부르신다. 반대와 분노에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더 넓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되새겨주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를 부르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어떤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멘.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Wednesday, August 6th, 2014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8월 6일)1

공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모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고 산 위에서 빛을 감싸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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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산에서 일어납니다. 이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덧없고 유한한 인생이 영원한 차원과 만나는 곳입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이 두 경계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뚝 서십니다. 이 경계에서 예수님은 환한 빛으로 변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하여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늘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건 등장인물의 만남이 뚜렷합니다. 모세는 가녀린 떨기나무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불을 품었던 순간에 하느님을 만났고, 이집트 노예 탈출을 이끌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악행을 거듭하는 권력과 싸우다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올랐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예수님과 만나 구원 행동의 전통을 나누고 함께 이어가는 만남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세상 속에서 계속 이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사건에 담긴 말들이 이채롭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논의했습니다. 이때 ‘죽음’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엑소더스’, 곧 ‘해방의 탈출’입니다. 이를 위해서 애써야 할 터인데 제자들은 초막을 지어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세상의 억누르는 사슬을 끊으며 해방하는 일에 귀 기울여 참여해야 합니다.

서방교회 영성과 신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몰두하여 참회의 신학으로 깊어졌다면, 동방교회 영성과 신심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바라보며 빛의 신학으로 펼쳐졌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자유롭게 되어서 빛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일이 신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 사건에서 우리 인간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 자체이며, 참된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3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