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신앙

Sunday, September 20th, 2015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환대의 신앙 (마르 9:30~37)1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원수를 갚아달라”고 애원했을까요? 삶이 이처럼 억울한 고통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도 같은 절규를 내지릅니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종교와 신을 찾는 일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울 때만 다급히 도움을 찾고, 좋은 것만 골라서 축복을 구하는 종교와 신을 ‘도구적 종교와 해결사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구와 해결사는 사람이 부려 쓰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힘주시고 고난 속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통념과 말재간으로 우리 신앙을 풀이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지혜와 지식을 굳이 구별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지혜는 연륜이요, 지식은 정보일 뿐이라며 차별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구분은 부질없습니다. 새로운 배움으로 연륜을 늘 새롭게 물갈이하지 않으면, 지혜도 고인 물처럼 썩습니다. 부질없는 구분보다는 지혜의 이중적인 성격,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살피는 것이 낫습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지혜이지만, 멋대로 가진 지혜는 ‘시기심과 야심으로 분란과 더러운 행실을 낳습니다.’ 그러나 ‘위와 밖에서 오는 지혜’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한결같은 순결함과 평화와 자비행으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즉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자신과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원수 갚는’ 방법은 끊임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도전과 씨름하고 대화할 때 나옵니다.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며 가까이 지낸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은 옛 질서와 고정관념, 과거의 유산과 지위가 끝낸다는 뜻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인 부활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과거에 묶여 자리다툼만 합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바깥에서 ‘어린이’를 불러들여 와 세우십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무력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지위는커녕, 특별한 보호와 배려가 없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낱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37절)에서 우리는 지극한 ‘환대의 신앙’을 발견합니다. 환대의 신앙은 하느님을 도구 삼아 자기만 좋은 축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멋대로 신앙과 지혜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환대의 신앙은 ‘위에서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열고, ‘밖에 있는 이웃’에게 귀를 열어, 하느님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껴안아 동행합니다. 힘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를 밖에서 초대하여 보살펴 키우며 동행할 때라야, 우리의 신앙, 우리 교회의 미래가 열립니다.

Jesus_Children.pn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주보 []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Sunday, September 6th, 2015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마르 7:24~37)1

예수님은 가끔 기이한 언행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기대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을 옥죄고 억압하는 위선자를 향해서 뿜어내신 분노와 독설은 우리로서도 통쾌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더욱 세심하고 근본적인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와 지역, 성차별이 우리 무의식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밝히시고, 이를 발본색원하는 길을 예수님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 이야기에는 대결과 차별 구도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이고 그 여인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지역 차이와 성 차이가 함께 만나면 차별이 곱절로 고약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의 편견을 그대로 시연하시며, ‘이방인 여자’를 강아지에 비유하여 모욕합니다. 이때 여인은 그 모욕을 받아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두려워하지 않고’(이사 35:4)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모든 생명은 그 처지와 신분이 어떻든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의 ‘옳은 항의’를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고정관념을 바꾸십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는데 우리가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마귀가 떠나갑니다.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33~34절). 예수님 당시 장애인이 살던 환경과 처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나빴습니다. 예수님은 위생과 정결의 율법을 넘어서서 징그러울 만큼 친밀하게 자신을 장애인과 맞대십니다. 예수님의 ‘한숨’은 마음 아픈 현실을 향한 한숨이며, 생명을 주는 하늘의 숨결입니다. 그 숨과 함께 ‘귀먹은 반벙어리’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소문은 세상에 더 퍼져나갔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그렇습니다.

‘에파타’ 하며 열리는 경험이 예수님의 치유이며,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귀를 열어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고정관념을 고쳐 세상의 고통과 이웃의 아픔을 경청합니다. 입을 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열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민의 새로운 눈으로 더욱 깊이 응시합니다. 닫힌 신앙을 깨고 귀와 입과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치유되어 서로 열고 살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예수 신앙은 무의식에 깃든 고정관념과 차별이 만든 악령의 질서를 넘어섭니다. 이렇게 예수 영성은 삶의 질곡에 갇힌 사람을 열어주고 살리며 함께 품으며 넉넉하게 살아갑니다.

the-Canaanite-woman-dog.jp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6일 연중23주일 주보 []

선교 – 몸과 피로 생명을 나누는 일

Sunday, August 16th, 2015

선교 – 몸과 피로 생명을 나누는 일 (요한 6:51~58)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오해를 받으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기괴한 ‘식인’ 의식을 벌인다는 의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잔을 들고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이다” 하신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거행했는데, 그 내용이나 뜻은 살피지 않고 말만 엿듣고는 속단한 탓입니다. 상황과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말만 엿듣거나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오해가 일어나기 일쑤입니다. 성서 해석도 그렇고, 우리 신앙과 삶도 그렇습니다.

살과 피는 성서에서 ‘생명’을 뜻합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의학 상식으로도 살과 피는 생명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런 뜻에서 신앙인의 생명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몸에 담고 사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생명과 삶을 우리의 생명과 삶의 내용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습니다. 성찬례는 이 관련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우리 삶이 예수님의 삶을 닮아갈 때라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있다는 진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성찬례를 무시하면 그리스도교는 종종 세상의 여느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 활동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세상은 생명을 내어주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다른 생명 안에 주면 예수님의 생명이 옮아가서 두 생명이 모두 살아가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어주고 나누는 일은 양쪽을 다 살리는 결단이고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늘 내어주어서 다른 생명을 먹이고 치유하고 힘을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늘 살아서 움직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커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실로 성장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 자신을 덜어내어 나누어서, 영적 갈망에 배고파하는 사람을 환대하여 먹이고,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보듬어 치유하고,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을 먹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힘과 능력과 재력을 세상에 나누어야 세상이 하느님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피, 자신이 지닌 소중한 것을 내어놓고 나누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살아가며 성장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집하거나 움켜쥐는 것들은 끝내 소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열어서 나누고 손길을 펼치면 “영원한 생명”이 세상 속에서 펼쳐집니다. 성찬례의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의 몸과 피를 마셨습니다. 영성체하고 파송 선언을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몸과 피가 되라는 선교 명령을 받습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는 ‘식인’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을 내놓아 남을 살리며 함께 살아가겠다고 결단합니다.

nolde-ultima-cena.jp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16일 연중20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