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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분노를 내려놓기로”

Friday, February 8th, 2013

“안녕 – 분노를 내려놓기로”

영국 성공회의 사제이자 영국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인 가일즈 프레이저 신부의 말이다. 자신이 9년 동안 글을 기고하던 <처치 타임스>(Church Times) 지에 더는 글을 싣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쓴 글 제목이다. 이 글에 담긴 여러 말이 가슴에 꽂히는 바가 있어서 잠시 그와 해당 글 일부를 소개하고, 그리고 나 자신의 소회를 이에 비춰보기로 한다.

프레이저 신부는 영국 성공회 런던 교구 사제이자 니체 전공 학자로서 교회 및 사회 문제에 관한 진보적 발언을 계속했다. 특히 그가 소속된 ‘영국’ 성공회의 여러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작년 ‘점령 운동'(Occupy Movement)이 런던 주교좌인 세인트 폴 대성당에 천막을 치고 있었을 때, 그는 그 대성당의 고위 성직자인 캐논(canon) 신부였다. 그는 점령 운동을 지지하며, 세인트 폴 대성당 측의 천막 철거 방침에 반발하여 캐논 신부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신자가 거의 없는 런던 시내 작은 교회의 주임 사제로 부임했고, 여전히 가디언지 등에 기고한다.

9년 동안 글을 써오던 <처치 타임스> 지면에 안녕을 고한 이유가 아프다. 새로 지명된 캔터베리 대주교 등 교회 당국자들의 정책에 비판과 분노를 내뱉는 일에 더는 시간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더는 그에게 분노하거나, 내가 소속되어 있고, 앞으로도 나 자신이 그 한 부분일 교회에 대한 부끄러움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나는] 사적으로 불평하기보다는 공적으로 의견을 내어 비판하는 쪽을 택한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가일즈 신부는 새 캔터베리 대주교가 고수하고 있는 동성애 문제에 관한 태도에 실망한 듯하다. 실제로 저스틴 웰비 대주교는 얼마 전에 있었던 대주교 선출 확인 예식이 끝난 뒤, 언론 인터뷰에서 영국 의회를 통과한 “동성애자의 시민적 결합” 법안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었다.

프레이저 신부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영국 성공회는 지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방향에 영구적으로 반대하는 영적인 개척 분야가 있다… 반대보다는 찬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성서의] 지혜를 따라, 더 찬성하면서 편안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찾기로 했다는 말이다…

“내 의견이 잘못된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조직의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을 점점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속성만을 찾는 듯하다. 정말이지, 사탕 발린 말만 던지는 주교들에게 신물이 난다…

“점령 운동 건은 계속해서 나를 흠칫 놀라게 한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남을 멍 자국이다. 새로운 사람이 세인트 폴에서 대주교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 상처가 다시 몰려왔다.

그와 똑같은 사안과 경험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과 결심을 이해할 만한 일들이 내게도 있었다. 거기서 헤어나지 못해서 지난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내 책임도 크다. 그러면서 그동안 사랑과 마음을 두었던 기존의 조직에서 방향을 틀어 ‘영적으로 새로운 개척 분야’에서, 어둠을 직시하면서도 좀 더 밝은 일을 하려는 쪽으로 잠시 가닥을 잡기로 했다. 쉽지 않다. 또 다른 도전과 걸림돌이 많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을 추스르고 쇄신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이저 신부가 말한 ‘흠칫 놀라게 하는 사건과 멍’은 내게도 비슷하다. 외부의 비난과 치기는 실은 참을 만하다. 그것들을 허상으로 보면 되고, 실제로 허상이니까. 그러나 어떤 발언과 일에 대해 거의 철저하다시피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닫아 침묵하는 행태에서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나는 이제 그런 ‘도통한 이해나 단수 높은 침묵의 동의’를 믿지 않는다. 그것들이 설령 어느 차원에서 ‘도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차원에서는 그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 나쁘게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일로 상쇄하기 마련인 탓이다. 공감과 소통이 없는 조직에는 숨과 피가 돌지 않는다

프레이저 신부의 마지막 문장은 내 마음을 울린다.

“때로는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위해서는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은 신선한 들판, 새로운 풀밭을 위한 때다.”

“운동권 유산” 잡감

Monday, February 4th, 2013

‘운동권’이라는 말에 객관적인 거리 두기가 내게는 쉽지 않다. 내 개인적 관여의 깊이가 균일하지 않았으나 몸이든 마음이든 그 울타리 안팎과 다른 언저리를 오갔기 때문이다. 그 안팎을 지켜보는 처지에서 복잡한 심경이 많으나 그 모진 세월 속의 경험에 대한 판단을 주저했다. 존경과 연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것이 한 사회의 유산(legacy) 일부가 되고 그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든 행사되고 있을 때, 이를 살펴보는 일은 절박하다.

그 운동권 ‘경험’이 아니라, 그 ‘유산’을 두고 든 여러 생각이 많았다. 지난 한 해 동안, 트위터에 잠시 짧은 생각만을 보태고 긴말을 피했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니, 줄기차게 잡히는 ‘멘탈리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더 풀어낼 처지는 아니나, 그 단상의 일부를 옮겨놓고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생각거리도 삼기로 했다. (트윗 기록, 시간 역순)

  • 소위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에서 느끼는 공통점. 격한 경험과 사고로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하고, 상대를 뭉개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태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처한 상황으로 정당화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담함. 결국, 자기 성찰성이 없는 것.
  • 1년 전, 미국을 방문한 기회에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난 기독교운동권 출신 목사님과 맥주 한잔하던 일이 떠오른다. “요즘, 미국서 유행하는 신학이 뭐에요?” “유행하는 신학 없어요. 그런 것에 매달린 탓에 한국 진보 신학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 아닌가요?” – 돌아보면, 이런 내 퉁명스러운 대답이 좀 미안했다. 그러나 식민지 신학을 넘겠다는 고민이 여전히 식민지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발견한 탓에 욱, 올라왔던 듯하다. 한국은 우선 ‘쌈빡한 바람’에 기우는 태도를 잠재워야만 일이 될 것이다.
  • 80년대 운동권 문화 일부에서는 억압적 질서에 대한 비판과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서 무책임한 일탈도 눈감아 주곤 했다. 그러나 종종 그 일탈과 그 성향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다가 이후 권력과 만났을 때, 패권을 휘두르는 억압적 일탈이 탄생하곤 한다.
  • 근사하게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에둘러 핵심을 피하는 동안, 교회 외부를 향해서는 진보로 간판 장사를 하며, 교회 내의 개혁에는 침묵하고 각자도생을 꿈꾸는 이들이 두른 성직 칼라는 도대체 뭘까? 이 일관성이 없는 곳에 권위는 없는 법.

    하기야, ‘교회와 교단이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제는 짐짓 커밍아웃까지 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주도 세력을 자처한다니, 이 교회의 불행은 분명하다. 80년대 설익은 운동권 신학과 소위 조건 활용론의 포로가 된 교회.

    교회의 내적 포로 상태는 이런 것일 테다: 교회/교단 전통에 대한 무지 혹은 무시 + 그 결과 전통에서 길어올릴 해방적 근거의 부족 + 그 탓에 근거 없는 아전인수 + 386 유산이 만든 침묵의 카르텔과 그 개신교 멘탈리티 + 도통한 척 + 각자도생

    이 포로 상태는 다른 말로 하면 여러 형태의 식민지 상태다. 탈-식민은 구호와 논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탈-식민의 논리가 어떻게 자기 성찰의 논리가 되어 삶의 일관성을 회복하느냐는 문제다. 이것이 외적인 정치적 식민 탈출과 탈-식민의 차이다.

  • 자신이 얽혀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섬세한 자각과 성찰이 없이는 개혁이니 진보, 영성이니 도통이니 하는 것들은 대체로 의식-무의식의 자기 배신이다. 그러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사학에 불과한 일이 많다.
  • 자신들에게 도전하면 ‘응, 우리도 다 알아’ 혹은 ‘너희는 복잡한 속내를 몰라서 그래’ 라며 입을 막는다. 자신을 예외로 두고는 변화는 없다. 이를 살피지 않고 영성을 말하고 도통한 척들 하니 소위 ‘진보적’ 교회 꼴이 어떻겠나?
  • 80년대 낭만적/나이브한 운동권 신학이, 이후에 성취한 기득권과 만날 때, 더욱 공고한 권력체계를 구성한다. 그 나이브한 낭만성에서 비롯한 진보성의 수사학이 그 세대의 강렬하고 ‘유니크’한 경험과 문화가 지배하는 구조가 만났기 때문이다.

    결국, 열망이 식은 자리에 탐욕이 대신 꿰찬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 열망이라 우긴다. 그 열망을 부인하면 자신의 기득권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식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망과 탐욕을 식별하는 것이다. 갖지 못한 이들은 탐욕할 수 없다. 이들이 거친 것은 탐욕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 때문이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여전히 영적 식별을 하려 한다면, 이제 타자가 된 고통스러운 열망에 귀 기울여 자신의 초발심을 되살리는 길 밖에 없다.

  • 어떤 형태의 좌파든 진보든, 그들이 자리 잡은 처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진보나 개혁이라는 말은 대체로 그 지위의 안전한 테두리에서 나온 호사스러운 변주일 뿐인 경우가 많다. 변혁과 탈식민을 외치는 방식은 엘리트주의에 기울고, 그들이 차지한 자리에서 실제 보이는 행태는 기존질서의 권위주의를 빼닮았다. 이의를 제기하면, ‘너희는 복잡한 속내를 몰라’라며 입을 막는다. 80년대 운동권 문화와 그 얼굴들이 겹친다.
  • 좌파의 힘은 자기 성찰성에 있다. 그 성찰성의 출발은 ‘자신이 지닌’ 현실의 기득권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한계를 넓히기 위해 ‘판단중지’하고, 현실에 직면하여 ‘기술'(description)에 힘쓰는 것. 우리 사회와 교회가 왜 도돌이표인가 생각할 때.

최장집도 작년에 소위 운동권에 대해 뼈아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아래 인용 내용이 폐부를 찌른다. 사회나 종교 조직에도 해당하는 지적이다.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까지 나빠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민주화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 운동 출신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한국 민주화에서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그 뒤 정치인이 되고 진보 정당을 하고 사회 운동을 주도한 것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떠한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경계도시 속의 경계인

Wednesday, January 30th, 2013

오래도록 벼려왔던 <경계도시 2>(2009)를 혼자서 봤다. 중요한 논의를 위한 전화 대기 상태의 무료함을 이기려 내린 선택이었다. 우선, 뛰어난 다큐멘터리. ‘경계인’의 삶과 선택, 그런 삶과 선택이 불편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잔인함을 잘 보여준다.

나는 ‘송두율‘을 이십 수년 전 대학에서 책으로 접했다. 운동권 내 특정 정파가 급부상하면서 그 정파의 ‘구린’ 논리를 그나마 세련된 이국적 철학과 사회학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라 여겨 잠시 살펴봤다. 자기 나라를 떠나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고민할 법한 실존적 고민이 그의 사회철학에 녹아 있었다. 동양인, 그것도 ‘반쪽짜리 한반도인’이라면 당연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했다. 얻는 것도 꽤 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 ‘정파’때문에 그를 잊었다.

오래전부터 경계를 걷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경계인의 삶으로 깨닫기 시작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성공회라는 교단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것은 모호한 길의 모험이었다.

소위 ‘송두율 사건’을 나는 미국에서 지켜봤다. 노무현 참여 정부 때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한 해 차로 겹친다. 그를 대하는 한국 사회나 이후 이어진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싸움은 거의 광기로 보였다. 밖에서 본 탓일 테다. 국가보안법은 거의 박물관에 보낼 수 있었으나 실패했고,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cf. 예수와 국가 보안법

나는 그가 선택했던 어떤 일과 그와 연관된 운동권의 특정 정파를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으나, 그가 귀국 후 겪은 2003년과 2004년의 삶을 통해 경계인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시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할 말이 있겠지만, 경계를 걷지 않는 이들은 그 정신과 고민을 지나치기 쉽다.

그를 돕던 한국 친구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 모진 어려움을 뚫고 버텨왔다. 송두율은 아마도 그동안 민주화 운동을 하며 한국 안에서 고생했던 친구들과 소위 ‘운동 진영과 정세의 곤란함’을 이해하여, 어쩔 수 없이 ‘전향’을 발표했을 것이다. 발표를 위한 늦은 밤 대책회의에서 그의 아내와 귀국 추진 책임자가 벌인 언쟁은 가장 마음 아픈 대목이다. 누구를 나무랄 수 없다.

송두율과 그의 아내는, 누군가에게는 자기 행동의 변명, 혹은 고생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들릴지도 모르는데도, 자신들이 “경계인”임을 강조한다. 내가 듣고 보기에 이것은 그 어떤 변명도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이요, 자기 충일성(integrity)이다. 이를 포기하면 사람은 제대로 서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를 쉽게 포기하도록 얼르고 협박한다.

흔들리는 송두율과 아프게 지탱하려는 그의 아내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많이 생각했다. 그들의 독일 삶은 어땠을까? 마지막 한국 방문이 겨우 3년 넘은 내게도 그리움이 아련한데, 그들은 37년을 이국에서 살아야 했다. 거의 유배요, 망명이다.

송두율은 “경계도시2” 상영에 덧붙여 독일에서 강연을 했다. “경계인”의 정의라 생각되는 대목을 뽑으면 이렇다.

“사람들과 예술은 여러 경계선을 넘을 수록 풍부해지는데 우리는 두 가지밖에 없다. 양자택일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간(人間), 공간(空間), 시간(時間)’ 등, 그 사이(間)가 중요한 것이다. 그 사이를 강조한다… ‘경계’ ‘경계선’이라는 것은 경계가 생겨 제3자가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공간이 더 커지는 개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창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경계는] 모든 것이 서로를 비출 수 있는 공간이다. 고정된 공간이나 무엇을 담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공간이다. 모든 공간이 열리니 “실시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을 비춰줄 수 있는 서로의 주체인 간(間)을 가능하게 한다.”

송두율은 이 “경계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고 경계의 지경을 넓히려 했을 것이다. 강연에서 그는 화엄경을 종종 인용했지만, 예수도 바로 그런 경계를 걸으며, 그 경계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걸었다.

이것은 유배와 망명에 관한 보고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한 사회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새로운 제3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주변부의 유배/망명객이다. 한편, 이 유배의 실존과 지식인의 실존에 관해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오래도록 깊이 고민한 바 있다. 사이드는 말한다.

“유배/망명은 가장 슬픈 운명이다… 어디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 채 언제나 불화를 이루며 과거에 대해서는 슬픔을,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떠돌이이기 때문이다. 참 지식인은 실제 유배된 망명자와 같이 주변자, 길들여지지 않는 자이며, 권력자라기보다는 여행자에 가깝고, 관습적인 것보다는 임시적이고 위험한 것에 가깝다. 현 상황의 권위보다는 혁신과 실험에 더 투신한다. 유배된 망명자인 지식인의 역할은 관습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대담한 행위에, 변화를 표상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일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참 지식인은 모두 타인처럼 여행한다.

송두율은 2004년 다시 독일로 떠났고 그 뒤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방문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전보다 더 큰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내가 기다리던 전화도 결국 오지 않았다.

아, 이국 땅에서 이국 맥주가 급하게 ‘목 마르다.’ 냉장고는 텅~. 깊어지는 밤, 사람도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