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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잡감 1 – 성직자와 평신도

Thursday, April 19th, 2012

성소 주일을 안내하는 공문과 공동 설교문이 바다를 건너 눈앞에 펼쳐진다. 늘 9월에 지키던 관행을 버리고 4월 말 성공회대학교 설립일 언저리 주일로 옮겼다는 것과, 올해는 마침 부활 4주일 ‘착한 목자 주일’과도 뜻이 통하며, 연합 미사가 아닌 개별 교회에서 지키기로 했다는 안내다. 딸려 온 공동 설교문은 서품받은 성직자들과 미래에 서품받기 위해 훈련하는 신학생들에게 맞춰져 있다. ‘잠깐만!’ 하며 생각을 더듬는다.

성소(聖召)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일 텐데, 그 부르는 주체는 하느님이시요, 그 부름의 내용은 새로운 약속을 받고 그에 다른 임무를 얻어 새로운 길을 떠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성소를 이끄는 주체와 내용은 분명하되, 그것을 듣는 대상은 모호하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라고 하셨다. 모세는 불타도 사그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히브리(합비루)들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는 지도자이지, 제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사장직은 모세의 형 아론의 몫이었다. 아론에게 어떤 거룩하신 부르심의 경험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나이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듣지 못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적어도 하느님의 부르심과 제도적 성직은 별개일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성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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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대사제로 유형화한 것은 신약성서 히브리서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유형화를 확대하여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그 제자의 계보 속에서 성직의 위계와 그 의미를 덧붙였다. 이 유형론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 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본래 ‘성소’의 의미를 매우 위축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제를 ‘제 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부른 해묵고 허황된 주장이다.

성소의 본래 의미를 한편으로 좁게 해석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좁게 해석된 의미를 과대평가해서 나온 행태가 바로 성직자주의(clericalism)이다. 이 성직자주의는 교회를 망치는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아우른다. ‘주님의 종’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수사 뒤에는 온갖 관료주의와 독재가 판을 친다. 소위 ‘만인사제론’으로 불리는 ‘신자의 보편적 사제직’을 강조하는 ‘한국 개신교’에서 오히려 더 못된 독재자가 나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이런 뿌리 깊은 왜곡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성직자의 성소에 맞춰진 한국의 ‘공문과 설교문’은, 평생 ‘평신도 사목자’로 식별하여 헌신한 앨다 모건 박사(Dr. Alda Morgan)의 인터뷰 기사와 겹친다. ‘앨다’와 나눈 사적인 인연과 훈훈한 경험을 세세히 적을 필요는 없지만, 통찰력 있는 교육사학자요, 따뜻하고 지혜로운 사목자로 그를 기억한다. 이번 인터뷰를 읽기 전까지는 그의 ‘성소’와 그 내력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내력도 내력이려니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고민하고 도전하는 그의 메시지가 무척이나 뼈 아프다. “1976년 미국 성공회 관구 의회에서 여성 성직 서품이 통과된 후, 나는 답을 얻었다. 성직자의 교회 안에서 평신도 전문가로 남는 것.”

나는 여성 성직, 특별히 세계 성공회와 한국 성공회에서 여성 성직의 실행을 마음 깊이 지지하거니와, 좀 더 넓혀서 성소 식별의 문제,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 사제직, 그리고 서품받은 제도적 사제직, 사제 양성 문제를 사적인 공부와 고민의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이 틈에 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소에 대한 좁은 이해와 성직자주의라는 현상,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다.

모건 박사는 젊은 시절 미국 성공회 내 여성 평신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계속된 식별 속에서 평신도 사목자가 그의 성소인 것을 알았다. 당시 미국 성공회 본부의 지원 속에서 여러 여성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회고한다. 많은 여성이 교회의 신앙 교육자로, 사회 선교 단체의 일꾼으로, 그리고 학원 선교의 담당자로 일했다. 그런데 여성 성직이 실행되면서 일대 변환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여성 평신도 사목자들이 하던 일을 모두 여성 성직자들이 맡게 되었고, 여성 평신도의 활동은 위축됐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 성직자들은 그의 좋은 친구들이었고 훌륭한 사제들이었다.

모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 성직 서품 후] 교회 안에서 여성이 지도력을 얻게 되었다. 교회 언저리에서 돕는 일을 하다가 성직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서 정말로 많은 측면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너무 오래 지체됐던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성 성직 서품은 평신도 여성이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봉사할 길을 막아 버렸다. 기이하게도, 여성이 자기만의 조직을 꾸려가야 했던 때에는 다양한 여성 활동 단체를 통해서 서로 돕고 응원하는 공동체의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안 보인다. 과거를 돌아보니, 우리가 가졌던 그 열정과 활력, 그것이 너무도 아쉽다.

자주 밝힌 바 있거니와, 남성으로서, 그리고 상대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사제가 된 사람으로 여성 성직에 대해서 이런 말을 전하기가 참으로 미안하다. 여성 사제 서품에는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분투했던 많은 여성과 여성 성직 후보자들의 땀과 눈물이 흥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적 사제직으로 서품받은 한 사람으로서, 성직자라면 쉽게 물들기 쉬운 성직자주의의 위험,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평신도 성소와 사목의 축소 등을 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이는 이제 여성과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의 문제이다. 이 부분에서 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 사안은 교회를 여러모로 위태롭게 하는 사단이기 쉽다.

제도 종교와 영성이 충돌할 때

Wednesday, April 18th, 2012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적은 바 있거니와, 그분의 놀라운 영성과 지성이 세계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갈등을 극복하려던 대주교직 수행과 빗나갔던 사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아쉬움과 낭패감의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나는 그분이 평소에 주장하던 예언자적이고 복음적인 삶에 대한 초월적 영성이, 제도의 일치라는 오래된 관념과 관습에 짓눌린 탓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세계 성공회의 식민적 유산과 그 역사에 대한 세심한 식별과 분석을 간과한 점도 지적했다.

미국 성공회의 신학자이자, 미국 종교 및 교회 현상을 연구하는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lter Bass)의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이분을 몇 번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들 모르겠다.). 내 생각과는 약간 다르지만, 현재 서구 사회의 종교 현상의 큰 흐름으로 지목되는 “Not Religious, But Spiritual”(‘제도적인 종교인이기를 거부하고, 영성을 추구한다’)의 맥락에서 살피는 의견과 그 전개가 매우 설득력 있다.

배스는 세계 성공회의 갈등과 분열을 동성애 문제로 벌어진 교회 내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서구 사회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긴장, 즉 종교와 영성의 긴장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장 리더십에 대한 옛 이해와 새로운 이해의 갈등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시대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하더라도, 이제 그마저 제각기 자기 권력을 탐하는 틀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닫힘과 열림이다.

한편, 배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분명했다. 주교는 평신도를 지도하면서, 복종과 희생과 영웅적 신앙 행동을 촉구했다. 주교는 위에서 아래로 신앙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적 기관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갈등한다. 한쪽에는 예로부터 익숙하고 검증된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통제, 획일성과 관료제가 그 특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고 그 미래를 향한 약속을 열어주는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풀뿌리의 권한, 다양성, 관계적인 네트워크가 그 특징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분열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와 영의 분열이다.

하향식 구조는 저물고 있다. 성공회가 겪은 갈등을 보면, 영적인 리더십과 제도적인 리더십이 분명히 구분된다. 영적인 리더십, 그 새로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대는 기존의 관습적인 주교의 역할과는 구별되고 갈등한다.

배스는 이 문제를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분명히 탁월한 영성가요 신학자이다. 대주교로서 그는 세계 성공회의 “영적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라는 종교 기업의 CEO로 행동하며, 사업 중심, 이익 중심, 자산 유지, 새로운 시장 개척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생동감 있는 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관료적인 기업체 문화이다.

배스는 영성과 제도의 갈등과 그 변화를 관찰한다.

역사의 시간 속에서 신앙은 늘 하향적이었다. 영적인 힘은 교황이나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제가 경건한 신자들에게, 목사가 교회 회중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변했다. 사람들은 영성은 하느님을 찾는 풀뿌리 모험이며, 진정성을 담은 통찰과 영감의 여정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제도적인 교회나 회당, 사원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성은 아래부터의 신앙을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신학과 관습에 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두려운 나머지, 세계 성공회를 포함한 많은 제도적 종교들은 이를 명령과 통제로 고치려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을 더욱 위계적인 권위주의로 몰아가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열망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이러면 제도적 종교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더 나은, 더 정의로운, 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큰데도, 교회라는 제도, 국가, 경제가 이런 열망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성과 제도에 놓인 틈이 문제다. 이 틈을 메꾸고 그 제도적 기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 경제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영적 쇄신은 곳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기존 교회와 기존 신자들이 관습에 사로잡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동안에 제도로서 종교와 교회는 죽어간다.

이 시대에, 영적 쇄신은 벗들과 신뢰를 나누고 서로 배우는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일은 거리에서 커피숍에서, 지역의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정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서 일어난다.

이런 평가와 전언은 세계 성공회와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 교단, 우리 교회, 그리고 성직자인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다.

한편, 풀뿌리 영성에 대한 배스의 낙관을 그대로 우리 교회와 사회에 적용하기를 나는 주저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실제로는 개인주의에 들러붙은 영성주의(spritiualism)의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위적인 제도만큼이나 복음적 가치를 해친다. 게다가 풀뿌리의 주인공인 신자들도 여러모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말로 깊고 풍성한 풀뿌리 영성을 키워내지 않고 또 다른 관습적 신앙 체험을 무기 삼아 섣불리 권위를 부리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 안에 또아리 튼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관습주의, 세대주의도 교회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이는 변화의 기로에 서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모든 사회와 교회가 씨름해야 할 문제이다. 수구의 탐욕이 새로운 시대를 열리도 만무하지만, 진보연하는 수사와 이미지 뒤에 여전히 만연한 관료주의와 타성으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성 토요일: 무덤의 침묵

Friday, April 6th, 2012

성삼일(Holy Triduum)과 그 전례적 의미에 관한 글을 작년에 서울 교구 성직자들과 나눴다. 그 글을 이룬 파편들은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있으니, 이곳에 적지 않은 성 토요일에 관한 부분만 따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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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이 보여주는 부재와 결핍이 가장 고조된 날이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시신은 내려져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 무덤은 어둡고 차가운 곳이다. 그 무덤은 단단하게 막혀서 어떤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부재와 침묵의 그늘이 지배하는 곳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로 정지된 시간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피어오를 희망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서 무덤에 찾아가려 했던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부재와 결핍에 따른 침묵은 우리 인간의 몫일 뿐이다. 성서(1베드 3:19)와 전통(사도신경)은 성 토요일에도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하 세계에서도 펼치셨노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부재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의 위업을 멈추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라야 우리는 정교회 이콘 전통이 보여주는 부활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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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이콘 – 음간(하데스)에서 아담과 하와를 이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