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슬픔을 듣는 법 – 한 사제의 동행

Wednesday, June 1st, 2011

며칠 전 흐느끼는 목소리에 밤을 깨운 나는, 몇 년 전 잇따라 자살한 연예인 오누이와 그 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TV 녹화분을 아내가 보고 있던 걸 알았다. 눈물을 훔치는 아내와 건성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모처럼 청한 이른 잠이 날아간 터라 무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오늘 마주한 글을 읽고는 며칠 전 일과 더불어 마음이 먹먹해졌다. 풀어낼 많은 이야기를 뒤로하고 그저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 글의 주인공을 잠시 생각했다. 곧 생각을 방해하며 여러 잡념이 끼어들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자살의 소식들. 가족사의 그늘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은 무참한 자살의 기억. 세상을 등진 이들과 남겨져 슬퍼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가족사와 이웃의 여러 경험과 더불어 마구 섞였다.

그러고 보니 이 블로그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적었다. 또, 몇 주 전 병원에서 한 생명을 기름 부어 하느님께 보내드리고, 그와 가족을 위한 장례 미사의 긴 일정을 보내는 동안에, 죽음은 사적으로 가깝고 친밀한 것이면서도, 금세 아무렇지 않게 타자로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 사적인 친밀감과 타자적인 거리감 사이는 멀지 않고, 경계 역시 모호하다. 죽음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의 마음과 시선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종교는 죽음에 대한 전문가를 자처했지만, 실은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고 전해주지 못한다.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자처할 때, 어떤 율법주의와 억압적 윤리로 사람을 괴롭힐 공산이 크다. 종교는 오히려 세상에 남아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응시하고 듣는 행위에 집중할 때라야 그들에게 슬픔을 극복하는 힘의 시공간을 열어준다. 그 힘은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힘을 말하겠다면, 오히려 신의 신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둘 일이니, 종교는 우리 주위에 친구로 머물거나 동행하며, 스러진 삶의 기억을 우리 안에 새롭게 그리도록 이끄는 초대이다.

번역한 글을 소개하고, 서툰 번역에 대한 발뺌이나 적으려 했다가 허튼소리를 늘어놨다. 글쓴이는 영국 성공회의 은퇴한 사제이다. 이 동행기의 마지막에 나온 아름다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힘이 달렸다. 그 맛대로 느끼도록, 그리고 누구의 좋은 번역 대안이라도 듣고 싶어서, 원문 마지막 문장을 괄호에 넣었다. 제목은 내 멋대로 붙였다.

슬픔을 듣는 법 – 한 사제의 동행

데이빗 브라이언트

나는 브리스톨 템플 미드 역에 있었다. 다섯 시간 열차를 탈 참이었다. 젊은이들이 승차했고, 한 아가씨가 내 목에 두른 성직 칼라를 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신부님, 이야기 좀 할 수 있나요?” 이런 일은 언제나 ‘신부님과 잡담’이라는 우스갯소리 같은 일의 시작이다.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세 시간 전, 자신의 남자 친구가 자살했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고 치사량의 약을 일부러 먹었다.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죽은 남자 친구를 발견했다. 남자 친구는 자기 존재에서 오는 고통을 더는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그녀는 마음을 위로하려고 자기 부모님께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고뇌가 쏟아져 나왔다. 자살을 둘러싼 이런 절망적인 생각들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성직자로 생활하면서 평생 이런 이야기를 들은 탓이다. 처음에는 하느님을 향한 분노가 나왔다. 한 청년이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멍청하게 서 있는 하느님에 대한 분노였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심원한 이유를 들어서 그의 죽음을 획책한 것은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무참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것은 형벌인가? 아니면 시험인가? 열차가 달려가는 동안 하느님을 향한 분노는 점차 자신의 내면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자기 자신을 공격했다. 정상을 참작할 만한 어떤 이유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썼어야 했어요.” “내가 그를 망친 거에요.” “다 내 탓인 것 같아요.”

예상했던 대로, 원망의 시선은 마지막 방향을 틀었다. 죽은 애인을 향한 원망. 그 약병을 다 삼켜버리기 전에 자기 여자 친구가 느낄 무참한 마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것일까? 그건 겁쟁이 같은 도피일 뿐이야. 그저 수치를 남기고, 애통해 하는 이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자살이라는 낙인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듣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상처는 완전히 배출돼야 하기 때문이었다. 분노는 소진돼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라야 치유가 시작된다.

내 침묵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녀가 지닌 하느님 상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할 시점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신은 벌과 상을 주고, 죽음과 생명과 비극을 독재자처럼 멋대로 관장하는 신이었다. 이런 신 관념은 어서 빨리 고쳐주어야 했더라도 말이다.

더욱이 이런 일을 무거운 윤리로 성급하게 다루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인데, 그런 점에서 보면 남자 친구의 행동은 나쁘고 배은망덕한 일이라 말한다 해도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애인의 죽음은 자유로운 선택이었고, 누구나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녀에게 배신감만 불 지필 뿐이었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죄책감을 두고, 성직자랍시고 입바른 몇 마디를 던진다고 해서 그 감정이 누그러지지도 않는다. 사제가 재빨리 용서의 선언을 한다고 해서 도움될 리 없다. 다만, 자기 수용만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했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녀는 우울증이 드리운 어둠과 그들이 함께 싸우며 보냈던 고통스러운 밤들을 말해줬다. 그리스에서 함께 보냈던 휴가에 대한 추억, 새로 세를 내서 들어간 아파트 열쇠를 받아쥐며 기뻐했던 순간. 그 순간들 사이에 사랑의 기쁨이 한 올 한 올 짜여 있었다. 그 애인이 수채화를 그리는 붓놀림이 뛰어났다는 사실과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상냥하게 대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다 울다를 거듭하며 이야기를 누비는 동안 우리 열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우리는 달링턴 역에서 내렸다. 내가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면서 내게 악수를 했다. 그냥 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알았다. 슬픔이 깊은 만큼, 정적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짐을 벗고 나서는 더더욱.

“도움을 주셔서 고마워요.”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도와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을 한 획 한 획 자신의 붓질로 스스로 그려냈던 것이다(She had done that herself by painting a picture of the man she loved, brush stroke by brush stroke). 그 누구도 그 그림을 그녀에게서 앗아가지 못했다.

원문: 데이빗 브라이언트 David Bryant, http://goo.gl/Fn2H2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현주 & 민김종훈 부제 (서울교구 강동교회)

성소 주일 잡감 – [주교] 성직 소명 체크 리스트

Saturday, May 14th, 2011

몇 년 전 천주교 신부 친구가 웃자고 들려준 말이다. 신학교 졸업 설교를 하던 학장 신부님께서 아주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여러분을 내보내는 제 마음이 두렵도록 떨리고 아픕니다.” 신학생(부제/사제)들은 마침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장)는 말씀을 복음으로 들은 터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 뒤, 학장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이리를 양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고 아픕니다.”

언제나, 특히 서품 기념일이 있는 5월이면 이야기가 떠오른다. 게다가 한국은 오늘 부활 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과 ‘성소 주일’로 지킨다(주일 복음 본문 요한 10:1~10).

성소 주일에 생각하는 ‘성소’란 무엇인가? 성소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이 나누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요, 선교 명령일 테다. 그 가운데 ‘성직 성소’가 하나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이지, 질적으로 다른 성소가 아니다.

5월이면, 이 착한 목자 주일, 성소 주일과 더불어, 성직 서품이 있다. 오랜 식별 과정과 기간의 중요한 마디점이다. 모든 성소 식별이 그렇듯, ‘성직 성소 식별’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성직 서품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그 계속되는 식별에 성직을 걸어야 한다.

이 식별이 늘 말썽거리란다. 우리는 어떻게 성직 열망자를 식별하여 신학교에 보내는가? 신학교의 성직 ‘양성’ 과정에는 어떤 식별 과정이 적용되는가? 졸업 후 다시 전임 전도사 생활 1년 반을 거쳐 성직의 첫 관문인 부제 성직, 그리고 다시 2년 후 사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식별의 과정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헤아려 보고 있는가? 이 성소 식별은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품으신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일 테다. 이 식별을 도와주는 성소위원회은 어떻게 운영되며, 성소위원들 자신은 어떤 식별의 훈련을 통해서 이 성소자 면접에 응하는가?

성직 성소의 식별은 부제품과 사제품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멀게는 십수 년 짧게는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주교를 뽑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선거가 되어 버렸다. 주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에 해당하는 성소 식별 과정이 존재하는가? 없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식별이어야 하고, 적절한 식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지도자를 식별하는 일에 그 교회의 미래가 달렸다.

이 과정에서 성소자 스스로 묻고, 그 식별을 돕도록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성직 서품받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개인 식별에 있을 이이든, 서품 기념일을 맞는 이이든, 주교직에 있는 이이든,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블로그 이곳저곳에 적었으니, 오늘은 다른 이의 말도 들어본다.

주교 선출을 맞아, 영국 성공회의 은퇴한 사제가 던지는 질문은 주교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성직후보자, 그리고 신자들이 늘 되새겨야 할 말이다.

주교 선출 위원회의 면접위원들은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첫째, [주교] 후보자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려왔는가? 과거의 고통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살펴보지 못한 고통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힘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보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을 잘 보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둘째, 후보자의 전반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그가 만드는 분위기와 환경은 어떤 것인가? 그가 가진 희망과 평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꽃을 피우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가 발설하거나 풍기는 비판 속에서 사람들이 말라 죽는가? 뽑혀야 할 사람은 예수 이야기를 멋지게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를 판단하려는 ‘영’은 종교적 권위의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늘 유혹이다. 이 판단하려는 영은 훼손된 영혼에 사로잡혀, 덕을 세우기보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셋째, 후보자가 면담하는 동안, 그 면접위원들에게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는 고향에 대한 독특한 열망에 관여한다. 사람은 그 내적인 열망의 불꽃이 있으나 사는 동안 이것이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주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복하도록 돕는 주교가 필요하다.

넷째, 그의 꿈(vision)은 무엇인가? 진실한 꿈은 다음 세 가지를 수행한다. 사태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의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연대하도록 연결해 준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꿈이 솟아난다. 사람들은 다만 그 지도자와 더불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것이다.

다섯째, 후보자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생각, 곧 무너질 내용, 전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멋지게 표현한 것일 뿐임을 지각하는가? 진실은 어떤 공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오직 그가 슬쩍 비추는 웃음과 인사, 표정 속에서 드러난다. 좋은 후보자는 말에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그는 여러 틈과 사이에서 삶이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이가 주교관을 써야 한다.

원문: 사이먼 파크, http://goo.gl/mXW74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송경용 신부 (서울교구, 걷는 교회, 나눔과 미래)

다시, R. S. 토마스 – Via Negativa

Wednesday, May 11t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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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길 Via Negativa

R. S. 토마스

왜 부정인가! 한번도 달리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하느님은 커다란 부재일 뿐
우리 삶 속에서, 그 텅빈 침묵
안에 깃든, 우리가 가는 곳
다다르거나 찾으리라는
희망 없이 추구하는.
우리의 지식 안에, 별들 사이의 어둠에
그분은 깨진 틈을 남겨두리니.
그는 메아리일 것이니
그가 남겨 놓은 흔적만을 따르리니,
우리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그 따뜻함을 찾으려 하느니. 사람을 둘러보며
장소를 찾느니. 그도 마치 그것들을 바라본 것처럼.
그러나 생각을 잃을 뿐.


R.S. Thomas (1913-2000), “Via Negativa”
번역: 주낙현 신부

譯註: R.S. 토마스, 웨일즈 성공회 사제, 시인. “부정의 길”(via negativa)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하느님은 ~ 이 아니다”는 식으로 기술하는 방법이다. 하느님은 어떤 인간의 긍정적 기술(via positiva: ~이다)로 잡히지 않는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신학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 / Apophatic theology)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