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위계, 민주주의, 깨어있는 영성

Wednesday, September 5th, 2012

(거의 세기말에나 있을 법한 행태가 우리 교회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이나 속이 쓰렸다. 바다 건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려 하나,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이 블로그 제목이 ‘성공회 이야기’이니 속 쓰리더라도 그 치부에서 나온 몇 생각을 트위터에서 옮겨 놓아야겠다.)

교회의 ‘위계’ 전통, 특히 성직의 위계는 기본적으로 사목적 보살핌과 하느님의 선교를 위한 가치에 종속된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처한 사회의 맥락에 휘둘려 그 사회의 억압적 위계 문화를 자신의 위계질서에 그대로 적용하여 오용하곤 했다.

위계질서 자체가 봉건적인 것은 아니다. 봉건사회의 주종 관계 행태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탓에 위계 질서를 그렇게 오해하고 남용한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이런 오용이 설 자리가 없고, 오히려 ‘보살핌’을 위한 위계를 회복할 기회일 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각종 위계, 특히 교회 내의 위계가 ‘봉건적 행태’를 답습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시대착오적 행태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런 교회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에는 적어도 ‘군사문화’가 심은 두려움과 어쩔 수 없이 습득한 ‘군대문화’의 일상적 폭력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이 어둠은 무의식에 내려앉아 두려움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참된 영성의 적이다.

이 어두운 무의식의 극복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과제인 한편, 종교가 대안적 가치 공동체로서 존재할 이유가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종교가 가장 못된 힘 부림을 일상화하는 일이 잦다. 특히 성직 사회에서.

이런 곳에 자유와 해방의 복음이 있을 리 없다.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골, 혹은 현실 부적응자로 찍혀 치도곤당하기 일쑤다. 이 치도곤은 ‘도통’한 자들의 지혜로운 조언이라는 당의정을 입곤 한다. 이 정도면 ‘자신에게 깨어있는 영성’은 없는 것.

현실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관계는 모두 ‘권력관계’이다. 이 권력관계에 종속된 현실을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는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하셨다. 자신의 권력을 되돌아볼 줄 아는 것이 신앙과 영성의 시작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깨어있는 영성’이며, 우정의 영성이다. 자신의 권력을 깨어 살피는 신앙과 영성에서 바로 권력이 아닌, 권위가 나온다. 이것이 아닐 때, 종교인들은 ‘도통한 척’하는 권위주의자, 관료주의자이기 일쑤다.

반도의 달 – R.S. 토마스

Tuesday, May 15th, 2012

루인 반도의 달 The Moon in Lleyn1

R. S. 토마스

마지막 그믐달
예수의 달은
어둠 속에 묻히니, 뱀이
그 알을 먹어치우네. 여기
나는 무릎을 꿇고, 돌로 지은
성당 안은 오직
그늘이라는 침묵의 신자들과 바다의
소리로만 가득하니, 예이츠가
옳았다고 믿기는 쉬운 것. 마치
성가대는 노래하지 않고, 조개들이
그들을 삼킨 것처럼 썰물이 찰싹거리며
성서를 쓸어가고, 교회의 종소리는
그 누구도 연약한 기적의
빵으로 불러오지 못하네. 모래알은
다시 굴러 들어와 벽에 있는 금색의
유리잔에 들기를 기다리니. 종교는 끝난 것, 그리고
초승달의 그 몸에서 무엇이 나오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네.

그러나 한 소리가 있어
내 귀에 울리니, 왜 그리 빨리 단정하는가,
죽을 목숨아. 바로 이 바다들이
세례를 받았느니. 이 교회는
시간도 파멸시킬 수 없는
성인의 이름을 가졌느니. 도시들에서
자신의 약속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순례자가 되느니,
이곳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영에 따라
새 기운을 찾느니.
그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리. 이 달이
지상의 가로막는 그늘을 뚫고 길을 내듯이,
기도도
그 흐르는 단계가 있으니.

(1974)

RSThomas_Moon.JPG

  1. 역자 주 – 루인 반도: 웨일스 북서쪽 반도로, 고대 순례길의 하나였으나 지리적으로 고립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휴양지로 유명해진 곳. []

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

Monday, May 14th, 2012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이분법적 세계관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숙이 남겨 놓았다. 그 이분법의 폐해를 의심하더라도, 수사학자요 신학자요 주교로서, 선과 악의 문제로 씨름했던 어거스틴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 현실의 문제이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에 관한 이론을 나름 완비하기 전에, 이미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하느님께 순종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지만, 다른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위를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처음에 천사들에게서 드러났으며, 하나는 선한 이들에게 깃들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이들에게 깃든다. 결국, 이것이 두 도성을 구별하게 한다. 하나는 정의로운 이들의 도성이요, 다른 하나의 사악한 자들의 도성이다. 놀랍고도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로 이 두 도성이 인류 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두 도성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 (De Genesi 11:15.20)

흥미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선한 도성과 악한 도성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에 기인한다. 탐욕마저도 사랑의 변종일 뿐이다. 게다가 이 사랑의 향방이 세상의 참된 권위, 혹은 권력의 향방을 가른다는 것이 성 어거스틴의 정치신학이다. 사랑의 방향이 하느님의 진리와 이웃의 공동선을 향할 때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욕이 될 때가 구분된다. 권위는 이웃의 선을 위한 다스림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배욕으로 나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연설에는 사랑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벗”의 관계를 깊이 되새겨 윗글에 적었으리라. 동등한 제자직, 벗 된 제자직이 복음인데도, 질시와 지배, 기어코 무릎을 꿇리려는 허세가 여전히 교회에 득세한다.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까?

시인 오든(W.H. Auden)은 일찍이 “반지의 제왕” 서평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결국,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힘에 의지하는 것일 때 오히려 모순적이다. 사랑과 자유인 선은, 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롭든 불의하든 힘 있는 편이 이긴다…

그러나 악은 선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열세이다. 선은 그것이 악이 될 가능성을 상상하여 이를 거부하지만, 악은 그 자신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악의 눈을 가린다…

악은 선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배와 공포에 대한 욕망 만이 사우론을 이끌었던 탓이다.

다시 이분법적 세계관의 폐해를 염려하면서도,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사회 곳곳에도 극명하다고. 선한 일에 힘쓴다는 이들도 실은 무엇인가에 ‘눈이 가린’ 일이 많다고. 이때 선한 이들이 지탱할 끝까지 선한 상상력이 절박하다. 신앙인에게 그 상상력 훈련은 내용 갖춘 성찰이요 기도일테다. 그런데 절박한 만큼, 성찰과 기도가, 되다.